교부시대부터 문학을 멀리하던 신학자들이 20세기 중반부터 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이 문학을 수용한 것은 단순히 문학을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문학에 기대어서 문학비평을 성서 해석에 적용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문학을 멸시하던 신학자들이 태도를 바꾸어서 문학에 의지하게 된 것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신학자들이 태도를 바꾼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태도를 바꾸기까지 나름대로 심각한 내적 고뇌를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왜 그렇게 고뇌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태도를 바꾸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이 축자영감설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적 교단에서는 축자영감설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축자영감설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진보적 교단의 신자들도 대다수가 축자영감설에서 파생된 성경무오설을 믿는다. 축자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자에게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불러주셨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했을 뿐 그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렇게 기록된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나오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에 그 근거를 둔다.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감동”이 플라톤이 그의 『시학』에서 언급한 영감(inspiration) 정도로 보이는데, 축자영감설을 내세운 사람들은 그 감동을 극단적인 하나님의 간섭으로 밀고 나갔다. 열광주의자들은 어떤 것이든 극단으로 밀고 나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랬다. 그럴 때 항상 문제가 생긴다. 과한 것은 부족함만 못한 법이니까.
기독교에서 맨 처음 축자영감설을 주장한 사람은 교부 이레니우스이다. 종교개혁기에 와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가톨릭에 맞서서 성서만이 모든 신앙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축자영감설을 앞세웠다. 1643-1647년에 걸쳐서 확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인간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는 소위 기계적 영감설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영감설은 17세기 루터파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문서는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장로교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받아들여졌고, 한국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와서 한국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로 통용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19세기 중반에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맞서서 축자영감설을 신조로 내세웠다.
축자영감설은 역사적으로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신학체계에서 주로 주장되었다.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서의 원본에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최선의 해석으로 보면서 성서내용을 과학적,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다.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축자영감설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 영감설과 성경무오에 대한 믿음이 한국교회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조과학을 지지한다. 그들은 창세기의 기록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정도라고 주장한다. 필자의 친구는 대학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친 장로인데, 창조과학에 몰두해 있다. 일전에 만났을 때 정년한 후에 어떻게 소일하느냐고 물었더니 창조과학회 일로 바쁘다고 대답했다. 지질학 박사인 그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가르친 내용과 창조과학회에서의 연구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도 성경의 기록은 과학적이고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원본은 오류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창세기 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만큼 축자영감설은 한국 교인들의 의식 깊이 자리해서 흔들릴 줄을 모른다. 그들은 축자영감설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불신앙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17세기에 오면 합리적 사고의 영향으로 인해서 성서를 합리적, 비판적으로 보려는 시도가 신학의 울타리 밖에서 시작되었다. 그로티우스(Hugo Grotius), 홉스(Thomas Hobbes) 등은 성서의 저자들과 성서기록의 연대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된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18세기에 신학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19세기에는 자료비평으로 정착했다. 자료비평가들은 구약성서의 각 책 안에 서로 다른 문체, 어휘, 신학적 관점이 나타나는 일정한 길이의 단위들이 섞여 있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서는 여러 자료를 모은 책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여러 자료를 모았다는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이 한자 한자 불러주어서 기계적으로 기록했다는 축자영감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러한 자료비평이 소위 고등비평의 시작이다.
성경에 여러 사본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축자영감설이 위축되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사본에는 그 본문과 다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고 주를 달아서 설명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서, 개역개정판에서 마태복음 18장 11절에는 “없음”이라고 씌어 있고 아래 주에는 “어떤 사본에 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5절에도 “네 형제가”에 주가 달려 있고 아래를 보면 “어떤 사본에, 네게 죄를”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어떤 사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 한글번역 성경에서 원문으로 삼고 있는 사본 외에 다른 사본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사본이 있다는 사실은 축자영감설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령이 한자 한자 불러주었다면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사본이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시나이 산 수도원에서 발견된 2세기경의 성경에서 보면 계속해서 성경 내용에 수정을 가한 부분이 보인다. 이러한 수정 역시 축자영감설이 무리한 주장임을 드러낸다.
또한 신학자들은 구약과 신약 안에 상치되는 기록이 다수 나오는 데에 주목했다. 성경에 상반되는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성경무오설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내용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직접 불러주셨다면 성경에 상치되는 내용이 있을 수 없다. 여기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그런 기록을 몇 가지씩만 예시하겠다. 창세기 4장 14절에서 가인이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아담과 하와가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아들 가인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가인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사무엘상 16장 10-11절에서 보면 이새에게 아들이 8명인데, 역대상 2장 15절에는 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된 나이가 열왕기하 8장 26절에서는 22세인데 반해서 역대하 22장 2절에는 42세로 되어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은 이 외에도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썼지만,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왕국과 남왕국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축자영감설이 오류라는 사실을 말해줄 뿐 아니라, 이 두 가지 기록이 객관적인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신약에 오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맞지 않는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은 일치하지만, 요셉의 아버지에 가면 마태복음에서는 야곱이라고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헬리라고 한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실상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이 아니라고 해놓고 예수님의 족보를 나열하는 그 자체가 자가당착이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받은 날이 요한복음 19장 14절에서는 유월절의 예비일인데, 마가복음 15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 다음날 재판을 받는다. 이렇게 두 복음서들에서는 재판을 받은 날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우리는 두 복음서의 기록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썼지만, 사람이 다르고 그들이 참고한 자료가 다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다마섹으로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에서 비춘 빛을 보고 신성한 소리를 들었는데, 사도행전 9장 7절에서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인데, 22장 9절에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는 소리만 듣고 뒤에서는 빛만을 보았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누가복음 1장 2절에서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책을 쓴 사람들을 따라서 자기도 누가복음을 기록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안에서 이렇게 앞뒤의 내용이 다른 것은 그가 참고한 자료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든 주변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록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차이로 인해서 축자영감설은 설득력을 잃었다.
성경의 기록이 축자영감설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객관적인 역사적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기록도 객관적인 과학적 기록이라고 볼 수 없다. 천지창조의 기록은 하나님이 전능자이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글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이야기는 사실을 적은 글이 아니고 동물과 인간이 대화하는 우화적인 이야기이다. 기록자는 이 우화적 설화를 통해서 인간에게는 죄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바벨탑 사건, 노아 홍수 사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역시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기 위한 설화이다.
구약의 기록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축자영감설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모세가 오경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구약은 기원전 1,400년에서 기원전 400년 사이에 기록되었고 성경의 맨 앞에 나오는 창세기가 맨 마지막에 첨가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원전 400년경에 창세기를 기록한 것은 당시의 범신론이나 다신론과 그들의 유일신 신앙을 구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사야서 등의 예언서들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의 신앙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이렇게 구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의 목적을 위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하나 불러주는 대로 기록했다는, 기록한 사람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축자영감설은 설득력이 없어졌다.
신약에 오면 기록자들이 겨냥하는 목적이 뚜렷이 보인다. 마태복음 기록자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예수님의 족보를 맨 앞에 내세웠다. 그리고 구약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뒷받침했다. 마가복음은 로마의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가 필요 없었다. 누가복음은 그리스인들을 위한 글이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등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를 변증할 목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학적인 논리를 구사했고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했다. 서신서들에는 맨 앞에 누가 누구에게 그 편지를 보냈는지 밝혀져 있으며, 그 편지의 내용에서 그 편지를 쓴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성경은 여러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그 기록자들은 그들의 기록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들인지, 왜 우리가 그분들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고 성경을 기록했다. 그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썼다. 그러나 한자 한자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 것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성경에 역사적 사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기록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맞게 가감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기록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쓴 주관적인 글이다.
이러한 문제를 앞에 놓고 신학자들은 많이 고민했다. 여러 가지 성경 사본의 발견, 성경을 번역할 때 여러 사본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 성경의 정경화 과정에서 개입된 인간의 판단, 성경 기록 과정에 대한 연구의 결과, 성경 본문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내용의 차이 등을 감안할 때, 신학자들은 축자영감설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성경을 문학적인 글로 받아들이는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전에 다니던 길이 막혀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신학자들의 눈에는 새로운 길이 보였다. 그것이 바로 문학적 성경읽기이다.
교부시대 이후로 1,900년 가까이 문학을 멀리해 온 신학자들이 성경을 문학적인 글이라고 판단한 것은 획기적인 방향전환이다. 이 방향전환은 최근의 이야기가 아니고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일이다. 이제는 문학적 성경읽기가 대세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신학생들이 문학비평적 성경해석을 모르고서는 논문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교인들은 아직도 근본주의자들이 고집하는 축자영감설에 집착하고 있다.
이러한 대세를 외면하면서 축자영감설이나 창조과학을 옹호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축자영감설을 고수한다고 해서 신앙이 확고해지거나 전도가 활성화하지 않는다. 당장은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고집스러운 과거 지향적 태도를 외면하게 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교육받은 것과 상치되는 것을, 그들의 비판적인 사고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강요에 의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세계는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도태된다.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 보고 있다.
하영조 목사가 연예인 교회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성경공부 시간에 하 목사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에 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그 설명이 끝나자 뒤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연예인이 손을 들고 말했다. “목사님, 어떻게 여자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임신할 수 있는지 저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 말을 듣자 하 목사는 천사의 고지, 요셉의 행동 등을 자세하게 다시 설명했다. 그래도 그 젊은이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것을 본 구봉서 장로가 화를 내면서, “이 새끼야,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믿었는데, 네가 뭐라고 못 믿어!”라고 소리쳤다. 이 에피소드는 신성종 목사의 『목회유머집』에 나온다.
하 목사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 젊은이는 구 장로의 우격다짐으로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문자 그대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가 받아들일 만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옛날 사람들과 달라서 안 믿어지는 것은 못 믿겠다고 말하고 못 믿겠으면 외면해 버린다. 그들에게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문자적으로 설명할 때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뱀과 하와의 대화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할 때 외면해 버릴 것이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살아서 나왔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말할 때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느냐고, 성경의 기록들이 왜 이렇게 서로 맞지 않느냐고, 학교에서 배운 것과 왜 이렇게 다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도 믿는데 왜 너는 못 믿느냐고 구봉서 장로처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일 것인가? 하나님도 자주 실수하신다고 대답할 것인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잊으라고 말할 것인가?
젊은이들의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주제로 하는 문학작품이라고 대답해 주면 된다. 이렇게 말하면 문학작품은 속된 것이라는 편견을 지닌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문학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해 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반문에 대해서는 축자영감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볼 때 모두 해결된다고, 그리고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본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의 거룩함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축자영감설에 그토록 매달리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은 확신의 문제여서 한번 배운 것에 집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에서 배운 것과 다른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무조건 그 이야기를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이 축자영감설을 고집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고가 정통신앙을 훼손한다고 믿고 비판적인 설명에 맞서서 정통신앙을 옹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축자영감설을 버리면 그들의 신앙이 와해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구시대의 사고에 집착하면서 새 시대의 사고를 무시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새 시대의 사고를 무시하면 주님의 복음이 새 시대의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것이고, 전도의 길이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 한국교회의 장래에는 희망이 없다.
이렇게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귀를 열고 눈을 뜨면 전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는 성경 이해의 방법이 들리고 시원하게 뚫린 길이 보인다.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타까워 하셨던 이 고정관념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수천 년 동안 따라다니는 고질적인 병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축자영감설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신학생들은 흔히 ‘공부는 진보적으로 목회는 보수적으로’라고 말한다. 목회 일선에 나갔을 때 그들은 대학에서 배운 진보적인 신학이나 새로운 비평적 성경해석을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소개하지 않고 보수적인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인간의 전적인 무능과 타락만을 가르친다. 진보적인 것, 현대적인 것은 모두 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매도해 버린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이기 때문에 신정통주의 신학을 거친 현대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는 다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965년의 제2차공의회를 거치면서 현대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변신을 꾀했는데, 개신교는 아직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식이 없는 목사들의 가르침은 교인들을 오도하고 기만한다.
목사들이 구시대의 신학만을 가르친 결과 신학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온다. 전도사 자격을 얻으려고 지방 신학교에서 공부한 어느 여 집사가 신학공부를 하니까 믿음이 깊어지기는 고사하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신학공부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집사가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배운 것과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말 신학공부는 필요 없는가? 신학대학은 없어도 되는가? 우리는 현대인에게 구시대의 언어로 말해도 되는가? 그래도 되기 때문에 한국의 대다수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은 구시대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가? 현대인에게는 현대인의 언어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축자영감설을 고집하는 사람은 현대인의 사고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19세기 이전의 사고의 틀 안에 머물려는 사람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농촌에서 현대문명의 이기를 외면하고 옛날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정통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매노파교도들이 있다. 한국에도 청학동에서 상투를 틀고 사는 일심교도들이 있다. 물론 우리들에게는 그들처럼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과거에 안주하는 삶을 살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현명한 일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고 대다수가 인정하는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인다. 1,900년 동안 문학을 외면하던 신학자들이 왜 20세기에 와서 문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태도변화의 원인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은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