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87)
금반삭립봉천첩 (金盤削立峰千疊) ☆
(소반 위에 나란히 빚어 놓은 송편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 겹쳐 있는 것 같다.)
김삿갓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마누라를 잡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수안댁(遂安宅)은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있었다.
"여보게 정신(精神) 차리라구!"
얼굴에 냉수(治水)를 끼얹고 인정을 비벼주고
하여 한바탕 소란(騷亂)을 떤 뒤에 수안댁(安宅)은 간신히 숨을 돌렸다.
"여보게! 정신(精神)이 좀 드는가? 자네, 별안간(督眼間) 왜 이러는가?"
수안댁(遂安宅)은 남편(男便)의 얼굴을 얼빠진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보다가
간신(辛)히 입을 열어 말했다.
"몸도 불편(不便)하신 당신(當身)에게
이런 꼴을 보여 드려 미안해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요. 잠시 그대로 누워서 안정(安靜)을 취하구려."
김삿갓은 그제야 안도(安堵)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당을 저주(咀呪·祖呪)한 말이 당신(當身) 마음에 거슬렸던 모양(模樣)이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아요."
사실(事實) 이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누라에게
정신적(精神的)인 타격(打擊)을 줄 말은 안 할 결심(決心)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당신(當身)만 빨리 회복(回復)해 주세요."
"나만 회복(回復)해서야 되는가, 자네도 건강(健康)해야지."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수안댁(遂安宅)은 일어나 앉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연방 외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졸도(卒倒) 사건(事件)이 있은 날부터 수안댁(遂安宅)의 얼굴에는 날마다 수심(秋心)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밤중이면 제단(祭壇) 앞에 정안수(井華水)를 떠놓고, 남편(男便)의 환생(還生)을 비는 축원(祝願)만은 어느 하루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삿갓은 “제발 그런 짓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진심(眞心)으로 부탁(付)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누라 혼절(絶)을 겪어 본 바가 있으므로 무슨 오해(誤解)를 사게 될지 몰라, 숫제 수안댁(宅)의 일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김삿갓도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가까운 곳을 다닐 수 있을 만큼 상처(傷處)가 좋아졌다. 그러나 수안댁(宅)의 공포(恐怖) 증세(勢)만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런 마누라의 안색(顔色)을 눈여겨 본 김삿갓은 마누라의 마음도 추스를 겸
웃으며 농담(弄談)을 건넸다.
"지난여름은 여러 가지로 우울(憂鬱)한계절(季節)이었어,
이제 계절(季節)도 바뀌었으니 이번 가을에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행복(幸福)이 찾아올 거야.“
마누라에게 용기(勇氣)를 주기 위한 위로(慰勞)의 말이었다.
"고마워요. 그래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은 "고맙다"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을 보면 수안댁(遂安宅)은 아직도 정체불명(正體不明)의 피해망상(被害妄想)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分明)하였다.
그것은 단순(純)히 피해망상(被害妄想)으로 보기보다는, [신(神)의 저주(咀呪)를 두려워하는
공포감(恐怖感)]이라고 해야 정확(精確)한 표현(表現)이 될 것만 같았다.
김삿갓은 마누라의 정신상태(精神狀態)를 바로 잡아 줄 방도(方途·方道)를 여러 가지로
궁리(窮理)해 보다가 어느 날
"참, 수안(遂安) 고을에 당신(當身) 큰아버지께서 사시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가을에는 우리 둘이 큰아버지를 한번 찾아가 뵙기로 하면 어떨까?"
그 말을 듣는 순간(瞬間), 마누라의 얼굴에는 불현듯 싱싱한 기쁨의 빛이 역력(歷歷)하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 둘이 함께 찾아가면 큰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래요, 조만간(早晩間) 수안(遂安)에한 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시간(時間)이 흐르는 동안에 김삿갓의 상처(傷處)는 거의 완쾌(完快)되어 갔다.그러나 수안댁(遂安宅)은 오밤중만 되면남편(男便) 대신(代身)에 자기(自己)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祝願)을 하루도 빠트리는 날이 없었다. 그런 마음의 고민(苦悶)을 안고 지내는 탓인지 안댁(宅)의
얼굴은 점점 수척(瘦癢)해갔다.
김삿갓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날그날을 살얼음판을 밟으며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리박빙(如履薄氷)]
어느 날은 마누라에게 마음의 변화(化)를 일으켜 주려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추석(秋夕) 명절(名節)이 가까워져 오니, 우리 송편을 한번 만들어 먹을까?"
송편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누라의 불안(不安)한 심리(心理)를 다른 일로
상쇄(相殺)시켜 보려는 심산(心算)이었다.
마누라는 그 말을 듣더니
과연(果然)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어머! 송편이 잡수시고 싶으세요?"
"응, 당신이 만들어 주는 송편을 먹고 싶네."
"가만히 계세요. 당신(當身)이 자시고 싶다는데
오늘 당장(當場) 만들어 드리지요."
수안댁(遂安宅)은 전(前)에 없이 밝은 얼굴로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다가 반죽을 하여
송편을 빚기 시작(始作)하는데
그 솜씨는 보기만 해도
신기(新奇)할 만큼 능숙(能熟)하였다.
적당(適當)히 반죽한 재료(材料)를 조금 떼어내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달달 굴리니 새알처럼 동그란 형태(形態)가 되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의 네 손가락으로 새알의 한복판을 오목하게 파헤치고 그 속에 고물을 넣은 뒤에 가장자리를 마주 잡아 오므리니 조그만 조가비 같은 송편이 되었다.
이렇게 빚은 것을 쟁반 위에 하나씩 나란히 세워 놓으니 얼른 보기에는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 들이 첩첩(疊疊)이 늘어서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도 재주 좋은 여인이 어째서 허망(虛妄)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측은(側隱)한 생각이 든 김삿갓이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게!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양(模樣)을 보니, 나는 시흥(詩興)이 샘 솟네그려. 내가 '송편'이라는 제목(題目)으로 시(詩)를 한 수 읊어보기로 할까?“
생각조차 못 했던 말을 듣고 수안댁(遂安宅)은 어리둥절한 표정(表情)이었다.
"송편을 빚는 모양을 시(詩)로 읊어보신다고요?"
"그래, 시(詩)로 읊어 볼 테야."
"그런 시(詩)도 지을 수 있어요?"
"그럼!"
"어디 한 번 써서 보여 주세요."
수안댁(遂安宅)은 김삿갓이 유식(有識)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詩)까지 능숙(熟)하게 지을 줄은 몰랐는지 흥미(興味)로운 눈으로 남편(男便)을 바라보았다. 지필묵(紙筆墨)을 꺼낸 김삿갓, 그 자리에서 "송편"이라는 제목(目)으로 한시, 한 수를 써 내러 갔다.
수리회회성조란 (手裡廻廻成鳥卵)
지두개개합방순 (指頭個個合蛙脣)
금반삭립봉천첩 (金盤削立峰千疊)
옥저현등월반륜 (玉著懸登月半輪)
물론 그 시(詩)는 한문(漢文)이었기에 수안댁(遂安宅)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한문(漢文)을 몰라 알아볼 수가 없네요.“
"이 시(詩)는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습(模襲)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네.
내가 설명(說明)을 할 테니 잘 들어 보라고."
김삿갓은 첫째 줄과 둘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이렇게 설명(說明)하였다.
'수리회회성조란 (手裡廻廻廻成鳥卵)이란 쌀 반죽을 손바닥으로 달달 굴리니까 새알처럼 동글하게 되었다.'는 소리요.“
"지두개개합방순(指頭個個合蛙脣)은 송편 속에 고물을 넣고 가장자리를 하나하나 조가비처럼 오므린다'는 소리라네."
"어머나. 당신(當身)은 어쩌면 솜씨가 이렇게도 오묘(奧妙)하세요. 반죽한 것을 손바닥으로 새알처럼 동글하게 만든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송편의 가장자리를 조가비처럼 오므려 만든다는 말은 기막히게 좋네요."
"다음은 마저 석면해 주 테니까 새알처럼 동글하게 만든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송편의 가장자리를 조가비처럼 오므려 만든다. 말은 기막히게 좋네요."
"그 다음을 마저 설명(說明)해 줄 테니까,끝까지 들어 보라고."
이번에는 셋째 구절(句節)과 넷째 구절(句節)을 가리키며 설명(說明)을 계속(繼續)하였다.
“'금반삭립봉천첩(金盤削立峰千星)은 빚어 놓은 송편을 쟁반(錚盤) 위에 차례로 세워 놓으니까,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疊疊)이 겹쳐 있는 것 같다' 는 소리요.”
{"옥저현등반륜(玉著顯登月半輪)
은 빚어 놓은 송편을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드니까
마치 하나하나의 송편이 반달처럼 보인다'는 말이야. 어때? 이만하면 잘 지었지?"
"나는 시(詩)를 모르기는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지으셨어요.
당신이 글을 잘 아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시(詩)를 지으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수안댁(遂安宅)은 모든 시름을 잊은 듯이 진심(眞心)으로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