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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욥기 1장 1-5절
하나님과 욥의 행위
욥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기의 후반부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방금 우리가 읽은 욥의 행위 그리고 이후 나오게 될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 대한 욥의 신앙고백과는 달리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시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만 봐도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렇게 말하고 있고, 또 1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모든 재산과 모든 자녀들을 다 잃어버렸을 때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0-22) 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남으로 매우 가렵습니다. 그런 욥을 보면서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욥2:9). 그러나 그때도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욥2:10).
그러나 이런 욥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책망을 하시느냐? 38장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이지만 욥기 40장 8절만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쉽게 말하자면 1장과 2장 이후 세 친구들이 찾아오게 되고, 그런 그들과 변론을 하게 됩니다. 세 친구들의 말은 까닭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측면이고, 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측면입니다. 그런데 그런 변론이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욥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악하다,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판에서는 불의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욥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에 대해 욥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입을 가릴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 제가 이런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말씀드리느냐 하면 욥이란 인물은 소위 우리가 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부각이 되어 욥기 자체가 말하고 있는 욥의 의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걸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분명 욥은 의인입니다.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입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의가 부각됨으로 그런 의를 주신 하나님을 놓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서는 이미 처음부터 욥의 실수와 다르지 않는 실수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도 “하나님과 욥의 행위” 이렇게 정한 것입니다. “욥의 행위와 하나님”도 아닌 “하나님과 욥의 행위”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에 대해 살펴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도 보면 욥과 같은 평가가 노아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인가? 성경 자체가 말하길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합니다. 특히 5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5-7) 그러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신다는 표현은 후회했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번 실행하신 일에 있어 후회하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속성으로 말하자면 불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소위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 겁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전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게 된 것,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을 때 그분은 거룩한 분으로서, 그리고 공의를 시행하시는 분으로서 그것을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의미로서 이렇게 표현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시대 속에 누가 살았느냐? 노아가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노아에게 어떤 말을 돌리고 있느냐 하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신약 성경과 함께 이해하자면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당연히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제외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도 죄인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 역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가? 창세기 6장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비록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지만,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생각, 그리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시대 속에서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던 겁니다. 그 결과가 뭐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 순서를 분명히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노아도 그렇고, 오늘 보게 되는 욥도 그렇습니다. 다니엘과 그 외 죄에 대하여 전혀 지적이 없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 역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의인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제가 “하나님의 욥의 행위”라고 했느냐?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욥의 행위와 하나님” 이렇게 제목하지도 않았느냐?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없으면 욥의 행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대할 때 욥의 행위에만 집중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이 욥에게 그런 내용을 돌리기 때문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는 걸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것만 말함으로 그것이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 있게 되는 그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앞서도 살폈지만 욥이 큰 사건 이후 자신의 의를 변호하게 됩니다. 세 친구는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다”고 말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를 변호하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시지만, 욥의 말과 세 친구의 말을 비교해 볼 때 욥의 말이 맞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죄를 지어서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이 거기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의만 변호할 뿐, 그것 이상의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듣게 된 책망이 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불의하다 하겠느냐?
저는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욥의 행위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만 그것만 강조하게 된다면, 아니 그것만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성이 마치 없는 것처럼 말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서 신인협력으로, 나아가 행위구원까지도 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주의를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고보서에서도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야고보서 5장 11절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일반적으로 욥이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 욥의 인내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이런 내용을 설명합니다. 7절만 보더라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는 말씀이 있고, 10절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면서 욥을 말하는데,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너희가 욥이 인내를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인내를 본받으라고 나와야 되지만, 방금 확인한 것처럼 욥이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뭔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으로 하자면 이것이 진정한 답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욥이 인내할 수 있었는가? 그분의 자비와 긍휼 때문입니다. 인내의 열매는 욥이 그만큼 인내하는 자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을 통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지 않고는 어떤 선한 열매도 내놓을 수 없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게 뭐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b).
그러므로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온전하고 정직하였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받고 있지만, 이런 평가 때문에 “욥은 뭔가 달라도 달라!”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아닙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입니다(cf.약5:17).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의 은총도 없고, 구원 받은 자로서의 열매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온전하고 정직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로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면 그것보다 앞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분의 자비와 긍휼이 있다는 걸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냐? 여러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자로서 선한 열매들이 있다면 그 열매조차 여러분의 것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악한 열매만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도 참된 믿음을 주셨다는 것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 아니 신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죄 아래 있게 하시느냐? 그렇지 않은 겁니다. 간섭하시고 간섭하셔서 의인답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고자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고, 그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바인 겁니다.
좀 길었지만 매우 중요하고, 또 이것이 우리의 모든 신앙의 틀로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다시 오늘 본문 1절로 오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의 경우 성경의 중앙에 위치하다보니 욥이 살았던 시대를 창조 이후 한 참 뒤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욥이 살았던 시대는 매우 고대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욥기는 창세기 시대, 즉 족장 시대를 배경으로 나타난 인물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디에 살고 있었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우스 땅’에 욥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스 땅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약간 견해 차이가 있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스 땅의 위치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내용은 뭐냐? “욥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 보면 욥에 대하여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고 그 결과로 맺는 열매가 이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가 그 결과로 온전함, 정직함이라는 열매를 맺는다고 할 때도 거기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온전함, 정직함이냐?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욥은 어떤 자인가?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온전한 자로서 표현합니다. 사실 온전하다는 이 말은 말 자체로서는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이전 성경(개역한글)의 번역인 ‘순전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칼빈의 경우 그의 설교에서 이 단어를 후세 사람들이 잘못 해석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석할 경우 하나님의 은혜를 희미하게 흐려 놓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에 ‘온전’이라는 말보다 ‘순전’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했을 때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순전한’이라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거짓이나 외식이 하나도 없고, 겉과 속이 동일한 경우에 쓰여지는 보편적인 용어입니다. 또한 자기의 속마음을 가리거나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감정들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보이며, 다만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하기를 추구하는 경우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결국 욥은 어떤 사람인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외식이나 거짓이 없는 사람,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을 품는 사람, 그런데 그 한 마음의 대상이 누구 앞에서의 한 마음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가 바로 욥이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욥에 대하여 정직하다는 말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옳게 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박윤선). 순전하다, 온전하다는 말이 그의 내면과 관계가 있다면 이 정직하다는 말은 그의 외면적인 것과 관계가 있는데, 쉽게 말해 그는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을 해하거나, 손해를 끼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남을 속여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 그가 욥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욥은 그의 내면의 내용이 어떤 면에서 외면으로 나타나는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내면은 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외면만 그럴 듯한 외식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내면은 선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외면으로서는 아무런 열매가 없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가 있는 사람, 야고보서 말씀으로 하자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서 그 믿음을 증거하는 자가 바로 욥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성경의 많은 부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열매에 대한 요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을 돌아보면 참으로 열매가 없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름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한 부름이지만, 그 일이 얼마나 더딘지 얼핏 보면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순전하기보다는 거짓과 외식이 우리의 열매로 있을 때가 많고, 정직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위하여 거짓으로 치장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고자 하시면 그 은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면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차원에서는 분명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와 관련해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어떤 수도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돌릴 때 어거스틴은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어거스틴의 은총론4, p.493). 한 편으로는 옳지만 한편으로는 옳지 못하다. 어떤 점이 옳은가?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말하는 그 부분은 옳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선하게 사용해야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를 선하게 사용하지 않고 악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악이요, 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라고 말한다면 분명 한편으로는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진리로서 하나님 탓을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인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방편으로서 교회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또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며, 매주 말씀을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순전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무조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행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를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뭐냐?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 증거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기 백성들에게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사실과, 그 열매를 위하여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죄악 된 길을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욥의 성품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의 말씀을 주고 계시다면 우리는 어떤 자인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순전한 자인가? 과연 나는 정직한 자인가? 거짓이나 외식이 하나도 없고, 겉과 속이 동일한 자인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을 해하거나, 손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는가? 남을 속여 빼앗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는 아닌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는가?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욥의 내면과 외면을 지배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순전하고 정직한 것은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순전할 수 없다, 결코 정직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순전이라는 말, 그리고 정직이라는 말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위 도덕적으로 좀 괜찮은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날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하자면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어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저 사람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느냐? 사람들은 인정하고 박수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만, 그리고 이웃 사랑의 정신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자기 의’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불신자의 선행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 의를 세울 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열심!
오늘 본문에서 욥을 순전한 사람, 정직한 사람으로만 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서 소개하는 것은 욥의 인생을 사람들만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계시다는 걸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이웃 사랑의 실천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냐?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가 순전할 수 있었던 이유, 그가 정직할 수 있었던 이유, 심지어 그가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경외’라는 말은 뭔가? 문자적으로 하자면 ‘두려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공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하시고, 그 요구에 응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그러니까 경외라는 말은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담긴 그런 의미에서의 두려움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 떠는 마음을 함께 말할 때 경외라는 말을 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욥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단지 두려움의 대상만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 또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욥은 악에서 떠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매튜 헨리는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그의 모든 대화를 지배하는 원리였다. 이것이 그를 순전하고 정직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대해 성실하고 흠 없게 했으며, 믿음에서는 일관성이 있고 완전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의 의무에 충실하고 꾸준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의 위엄에 대해 경외감을 품고 있었고, 그의 권위를 존중했으며 그의 진노를 두려워했다.”
여러분, 내면의 순전함과 외면의 정직함의 근거는 하나님 경외에 있습니다.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것도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죄에 대하여 민감해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사랑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도 아셔야 합니다. 욥 당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욥 당시 주변에는 분명 타락한 자들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욥기 1장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자신의 물질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습니다(욥1:15,17). 도둑과 강도들 등이 그의 주변에는 분명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그 주변에는 많이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열매는 욥과는 다른 열매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과 동화되어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과는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순전하고 정직한 자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악에서 떠나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2절과 3절은 욥의 외적인 복과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어떤 분들은 1절의 근거로 2절의 결과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해석은 공로주의적인 해석이요 또한 번영 신학으로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복을 주셨다고 말하는 걸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출처가 하나님인 것은 맞습니다. 외적인 복의 근원도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면 무조건 외적인 복을 받느냐?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경우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계셨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면서 이 땅을 사셨습니다. 때문에 1절과 2절을 원인과 결과로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외적인 복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구약의 성격상 외적인 복을 통하여 알리고자 하는 핵심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늘 유산을 생각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인데, 이 부분과 관련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신구약의 차이점과 관련해 이런 내용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차이점은 첫째로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자기의 백성이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하늘 유산을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이 소망을 더욱 잘 배양하시기 위해서 그 유산을 땅에 붙은 혜택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들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내세의 은총을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계시했으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직접 내세를 명상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시던 낮은 훈련 방법을 버리신다.”(기독교강요, 1559, 2권 11장 1항) 그러니까 욥의 경우도 분명 하나님께서 그런 의미에서 주셨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인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후 말씀을 보면 그 모든 복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시험 이후에 다시금 그런 외적인 복을 더 많이 받게 되지만, 욥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문제였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1장 전체를 읽어보면 그 모든 외적인 복을 다 빼앗겼지만 어떤 고백을 하느냐? 앞서도 읽어드렸지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바로 이 고백이었습니다(욥1:21). 외적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4절과 5절은 한 예로서 그의 행위가 항상 어떠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어떤 면에서는 1절 말씀의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악을 저지를 수 없는데, 단지 자신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분가한 자신의 자녀들까지도 항상 주 앞에서 살도록 챙기고 또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5절 마지막에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런 모습이 변치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되 한번만 경외하고, 혹은 두 번만 경외하고, 혹은 어떤 날은 경외하지만 어떤 날은 경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욥의 이런 행위를 통해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것은 우리 역시 그런 자가 되도록 우리를 살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전한 마음과 정직한 모습으로 이웃 앞에 서 있는가?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여기면서 그 죄를 미워하고 있는가? 특히 부모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까 항상 저들을 살피고 또 살피는 자로 있는가?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맨 처음에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본문 1절을 통해 우리가 교훈 받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 앞서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한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셔야 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건성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남달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런 경외로 말미암아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다 하나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이런 열매가 없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들을 향하여 말씀과 교훈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가 아니라, 이런 말씀 앞에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해야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성화에 있어 더디고 신앙의 연수에 비해 변화가 없는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이런 말씀에 교훈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살피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부모의 경우 자신을 먼저 살피시되, 자신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도 항상 살피셔서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도록,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도록, 나아가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도록 멀리할 수 있는 그런 열매가 우리에게 있도록 더욱 힘쓰시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