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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받은 표창장, 임명장, 감사패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나에게는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서 받았고, 그것을 준 기관이나 단체에서도 줄 필요가 있어서 주었을 텐데, 학교 소임을 그만두고 보니까 저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까 전부 가명이고 가상입니다. 전부 껍데기입니다. 무슨 이름을 붙여 주고, 무슨 격을 갖추고, 어느 조직에 들어가고, 어느 형식을 갖추는 등 조직과 형식에 매어 살아갑니다. 거기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어떤 혜택을 누리고 사는데, 그것이 저누 껍데기입니다. '나의 껍데기'입니다. 그러면 '나의 알맹이', 나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인가? 이 진실상에는 껍데기가 없습니다. 그게 본래 나입니다. 껍데기가 없는 진실상이 무엇인가? 항상 독송하는 의상 義相(625~702)스님의 「법성게法性偈」첫머리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입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아 본래 고요합니다. 천지만법이 법입니다. 하늘도 법이고, 땅도 법이고, 사람도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의 진실상에 성性이 있는데 근원적인 성을 법성法性이라고 합니다. 이 법성은 원융해서 둘이 없습니다. 색.수.상.행.식이 전부 법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제법諸法이 공상空相이라고 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제법이고, 안. 이. 비. 설. 신.의도 제법입니다. 또 색. 성. 향. 미. 촉. 법도 제법입니다. 십팔계(六根. 六境. 六識), 천지만법이 다 제법입니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이 적멸寂滅입니다. 형상이 없는 적멸입니다. 이것이 의상 스님의 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제법도 우리 자신이고 법성도 우리 자신인데, 법성은 둘이 없고 제법은 본래 적멸입니다. 나고 죽는 생멸이 본래 적멸이라는 것입니다. 또 일체 천지만불이 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각자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에는 물의 자체 성질이 없고, 돌에는 돌의 자체 성질이 없고, 사람에게는 사람 자체 성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법무자성法無自性 이타위성以他爲性' 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고, 다른 것으로써 자성을 삼습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의상 스님이 계속 강조하신 것처럼, 우리 몸이 자체가 없고 전부 다른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 불, 온갖 생각, 전부 다른 것이 모여서 된 집성체입니다. 흩어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도 삶의 요소들이 모이면 살고, 죽는 것도 다른 요소들이 모이면 죽습니다. 전부 모여서 죽고 모여서 사는 것입니다. 죽을 수 있는 것들이 모이면 죽고, 살 수 있는 것들이 모이면 삽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그런데 생겨도 자성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니까 생긴 것과 안 생긴 것이 둘이 아닙니다. 흩어지는 것도 다른 것에 의해 흩어지니까 흩어지는 것과 흩어지지 않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없이 생긴 것이 그대로 생기지 않은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생긴 것은 생긴 것대로 자성이 없고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않은 것의 자성이 없어서 법성이 둘이 없습니다. 법의 본성이 둘이 없고, 제법이 본래 적멸이라는 것이 우리의 진실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것 자체가 본래 적멸입니다. 생기지 않은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생긴 것은 자성이 없고 전부 다른 것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입니다. 또 없어지는 것도 자성이 없고 전부 다른 것에 의해서 없어지니까 생기지 않은 것과 생긴 것이 그대로 적멸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대로 둘이 없습니다. '부동본적不動本寂 원융무이圓融無二' 를 다 보는 것이 자기 진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원융무이가 나입니다. 나는 누구냐? 부동본적이 나입니다. 이것이 나의 진실상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껍데기입니다. 늙는다. 죽는다. 남자다. 여자다. 잘났다. 못났다. 공을 세웠다. 못 세웠다 이런 것은 전부 가명상假名相, 껍데기입니다. 억만년을 살아도 껍데기로 사는 것입니다. '원융무이 부동본적'이 나의 진실상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을 보면 고민을 많이 합니다. 지금만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끝없는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도 고민을 했습니다. 또 다음에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들도 고민을 할 것입니다. 밝은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애를 많이 쓰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세상이 와도 인생의 고민은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고민이고, 하고 싶은 것을 못 해서 고민, 행복하지 못해서 고민, 이렇게 고민의 형태만 바뀔 뿐입니다. 인간은 왜 고민하느냐? 껍데기로 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름, 나의 모습, 나의 소속, 나의 신분 등 이름 하나 얻으려고 별짓을 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과 행복입니다. 병원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그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고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데 취직해서 돈 많이 벌어라." 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발 건강하게만 자라라. 제발 행복하게 살아라." 이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님들이 다른 껍데기를 자꾸 아이한테 덮어씌웁니다. 그런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인생 망칩니다. 그러니까 행복해지려면 부모님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꾸 학벌이나 직업 같은 껍데기만 아이한테 씌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중심이고, 나머지는 전부 껍데기입니다. 그런데 건강도 행복도 또한 껍데기입니다. '원융무이 부동본적'은 불행하려야 불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복하려면 거기에 불행할 수도 있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그런데 아예 불행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원융무이 부동본적, 이것이 우리 진실상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의 알맹이, 인간의 진실상을 깨달아서 모든 껍데기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공포의 껍데기, 불안의 껍데기, 괴로움의 껍데기, 전부가 가짜고 허명虛名입니다. 평생 가짜의 모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요즘은 더 심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늙고 죽을 몸인데, 얼굴 고치고 몸매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얼짱 껍데기, 몸짱 껍데기는 얼마 못 갑니다.그보다는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한 나의 진실상을 찾는 원융무이 부동본적, 이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요즘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인구가 늘었습니다. 노인삼고老人三苦라고 해서 세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첫째, 병고病苦입니다. 나이가 들면 병이 자꾸 찾아와서 온 몸이 종합병원입니다. 늙으면 병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노병老病, 즉 늙는 것 자체가 병입니다. 둘째, 빈고貧苦입니다. 늙으면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가난한 고통이 있습니다. 셋째, 독고獨苦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늙으면 새로운 정보가 없어서 늘 옛날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자꾸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자꾸 더 도망갑니다.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데, 한국전쟁 때 고생한 이야기만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연애 대상도 아니고, 새로운 정보도 없고, 가끔 용돈이나 많이 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인터넷에 어떤 아이가 '우리 할머니 개똥'이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 이유가 자기가 세뱃돈으로 5만원을 받고 싶었는데 5천원만 줬기 때문이랍니다. 아이가 할머니한테 바라는 것은 용돈뿐입니다. 이것이 노인의 고독입니다. 그러면 젊은 사람은 고통이 없느냐? 청년육고靑年六苦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취직하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취직을 못하니까 젊은 사람이 돈이 부족합니다. 돈이 없으면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이도 낳을 수 없고, 자기 집도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래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을 청년육고라고 합니다. 노인보다 고통의 숫자가 많습니다.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고독과 고통이 전부 어디서 오는가? 다 나의 껍데기에서 옵니다. 생사가 본적本寂이고 법성이 원융圓融이라는 진실상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이런 껍데기를 좇아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껍데기로 살면 괴롭습니다. 청년이나 노인이나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이 자립自立입니다. 스스로 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가면 안 됩니다. 부모님 따라가고, 친구 따라가고,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면 항상 껍데기만 좇게 됩니다. 이처럼 자립이 안 돼서 우왕좌왕하면 항상 껍데기로 살아갑니다. 다음은 자성自成, 즉 스스로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가서 힘을 빌려서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락自樂, 즉 스스로 즐겨야 합니다. 스스로 서고 이루고 스스로 즐기고, 이런 힘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것 한다고 따라가고, 누가 저것 한다고 따라가고 그러면 언제나 껍데기만 좇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망虛妄해집니다. 그런데 자성自成을 하려면 자기가 자기를 고용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고용해서 하고자 하는 목적사업을 하면 자락自樂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고용주가 되고 내가 고용인이 되니까 고용주와 고용인이 딱 들어맞습니다. 분쟁이 생길 것도 없고 임금 협상할 것도 없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 따라가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을 때까지 죽은 후에라도 스스로 서고, 스스로 이루고, 스스로 즐깁니다. 스스로 즐기는 게 중요합니다. 이루면서 즐기고 즐기면서 이루고, 이것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됩니다. 요즈음 행복이 자꾸 멀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얼 하기만 하고 즐길 줄 모르고, 즐기기만 하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하는 것이 즐거움이고 즐거운 것이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고용합니다. 취직하기 힘든데 나한테 취직합니다. 좋은 사람 뽑기 힘든데 나를 뽑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나를 고용해서 그냥 하는 것입니다. 또 즐깁니다. 내가 나를 고용해서 하니까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하고 즐기고, 즐기고 하고, 이렇게 하면 나이 알맹이, 진실상에 접근하게 됩니다.『천자문』에 '운등치우雲騰致雨 노결위상露結爲霜'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름이 올라가서 비를 이루고, 이슬이 맺혀서 서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구름. 비. 서리. 이슬 네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네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운우상로雲雨霜露 상상수상相相水相' 이라, 모양모양이 물 모양입니다. 이것이 진실상입니다. 구름은 떠돌아다니고, 비는 내리고, 이슬은 맺히고, 서리는 업니다. 이것이 전부 껍데기입니다. 진실상은 물 하나뿐입니다. 물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상입니다. 구름 보고 따라 올라가려고 하고, 비 보고 뛰어 내려가려고 하고, 이슬 보고 방울방울 맺히려고 하고, 서리 보고 꽁꽁 얼려고 하는 것이 전부 껍데기로 사는 것입니다. 구름이 되든 비가 되든 이슬이 되든 서리가 되든, 아무 상관없는 것이 부동不動이고 본적本寂입니다. 서리가 된 물이나, 구름이 된 물이나, 이슬이 된 물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이슬이 본래 물뿐이기 때문에 본래 적멸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성원융이상 제법부동본래적'입니다. 옛날 선지식들은 이것을 깨달아서 멋지게 살다 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껍데기만 좇다 보니까 온갖 근심걱정 다하며 살아갑니다. 울면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웁니다. 울면서 와서 울면서 갑니다. 왜냐하면 '구심구사求心求事는 의진배각依塵背覺', 구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일은 티끌에 의지해서 자기 본각本覺등을 등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각돈휴頓覺頓休는 무주성각無住性覺', 바로 깨달아서 몰록 쉬면 머무는 데 없이 본각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진실상은 머무는 데가 없습니다. 물은 인연 따라 이슬에도 머물지 않고, 서리에도 머물지 않고, 비에도 머물지 않고, 구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껍데기를 좇는 마음에서 본각 본성으로 돌아가면 바로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망 때문에 쉬지 못합니다. 구하다 죽고, 찾다가 죽습니다. 구하는 마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한 살짜리도 구하고 백 살 되어도 구합니다. 그 구하는 마음이 스트레스입니다. 자꾸 잘 보이려고 하니까 노인도 떱니다. '나이 들어서 왜 떠느냐.'고 하는데 그것은 인생을 잘 모르는 소리입니다. 늙으면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집니까? 그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똑같습니다. 잘못 보이면 어쩌나 해서 떠는 것입니다. 구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일은 티끌에 의지해 본각을 등집니다. 몸도 티끌이요, 물질도 티끌이요, 명예도 티끌입니다. 그래서 본래 자기 진실상을 등지게 됩니다. 의상 스님은 인간의 진실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구하는 마음, 껍데기 찾아가는 마음으로 스스로 등지면서 살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진실상은 구름이 되어도 물뿐이고, 구름의 자체상이 없습니다. 비가 되어도 물뿐이고, 이슬이 되어도 물뿐이고, 서리가 되어도 물뿐입니다. 서리와 물은 절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비가 서리가 되려고 하고, 서리가 구름이 되려고 하고, 모양만 따라서 돌다 돌다가 물이라는 진실상을 까맣게 모르고 윤전輪轉, 즉 바퀴 돌듯이 돕니다. 이것 좋아하다가 이것 좋아지면 또 딴 것 구합니다. 그러니까 "꼭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소리에 절대 속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못 가진 것을 가지려고 애쓰지만, 처음 설렘이 없어지면 똑같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적응하면 끝납니다. 적응하기 전까지만 좋습니다. 3,000원짜리 짜장면 먹다가 6,000원짜리 짜장면을 먹으면 서너 번 먹을 때까지만 좋을 뿐 익숙해지면 더 비싼 만 원짜리 찾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항상 구하고 쉴 줄 모릅니다. 구하다 죽습니다.이것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구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번뇌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너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인생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의상 스님은 이것을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라고 하셨습니다. 가도 가도 본래의 곳이고, 이르러도 이르러도 출발한 곳입니다. 법성이 원융무이하고 제법이 부동본적입니다. 깨달으면 가도 가도 내 집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역대 선지식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알맹이로 사는 배경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해야 할 일 하는 것도 좋은 데 거기다가 '나는 무엇인가? 지금 생각하는 이거은 무엇인가? 움직이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자기 자신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진실상으로 돌아가는 아주 중요한 길입니다. 좇아가고 좇아가면 끝이 없고, 좇아가는 나를 돌아보면 거기에 문이 열립니다. 저 사람을 미워하고 미워하면 끝이 없고 미워하는 그놈을 딱 돌아보고 '미워하는 이놈은 무엇인가?', 무서운 것을 계속 무서워하면 끝이 없고 '무서워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계속 따라가면 끝이 없고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라고, 내가 나를 돌아볼 때 길이 열립니다. 내가 다른 데로 좇아갈 때는 길이 없고 윤전이 있을 뿐입니다. 좇아가면 바퀴 돌듯이 돌 뿐이고, 돌아보면 열립니다. '보고 듣는 이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전부 하나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움직이는 것 하나뿐입니다. 오늘부터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십시오. 좋은 일 다 하고, 해야 할 일 다 하면서는 못 고칩니다. 몸만을 위해서 그냥 계속 앉아 있으면 몸을 수련하는 것이니, 그것도 좇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십시오. 돌아보면 열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

첫댓글 부처님법을 만난지 한 3년정도 나라고 하는실체가 없다는데 나는 있고 알면 알수록 어렵고 어려운데 알수 없는 즐거움이 또 있어 즐겁습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인간은 항상 구하고 쉴 줄 모릅니다. 구하다 죽습니다.이것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구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번뇌라고 합니다---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