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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길포 그림자는 어디서 지워졌을까
강병철(대산노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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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벌판은 꽃 천지다.
통근버스를 타러 나올 즈음에는 벚꽃 봉우리들이 불어터질 듯 팽팽했었다. 그리고 ‘아차’ 깜빡 신발장의 핸드폰을 가지러 다시 엘리베이터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중이다. 이상하다. 그녀들이 십분 남짓 사이에 일제히 처녀막 터치고 꽃 잔치로 피어난 것이다. 봄비를 받아 물미역 줄기처럼 미끈거리는 종아리마다 울긋불긋 꽃이 피리라.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초로의 허벅지 끌고 씨앗 뿌릴 시점이다.
교정의 봄은 더욱 생동적이다. 친구의 눈꺼풀 벌려 지우개 밥 먹이려는 심술보 봄도 있고 점심 종 울리자마자 공중제비로 급식실까지 치달리는 야생마 봄도 있다. 그리고 스승이 교실을 비운 사이 사물함에 농구공을 꽂아보는 에너지 봄도 있어서, 나는 부글부글 끓기도 한다. 수시로 B사감이나 간수로 변신하지만, 그래 봤자 마음뿐이다. 내가 불같이 화를 내면 아이들은 뺘샤샤 웃는다.
아이들은 출발 시각에 딱 맞추어 스쿨버스에 탑승한다. 7시40분 출발인데, 35분까지 텅 비어있다가 마지막 1,2분 남짓 사이에 60여 명이 우르르 올라타는데 신기하게도 지각생은 없다. 앉자마자 통학거리 9분 동안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21세기형 인간들이다. 주로 신흥 소도시로 정착한 대기업 샐러리맨의 자제들이거나 그들을 단골로 하는 요식업자의 자식들이고 간혹 오리지널 농업 토박이의 후예도 있다. 덕분에 나까지 그 버스에 탑승하는 것이다.
속을 태우는 부류들은 여기서도 존재한다. 예전 학교보다는 현격히 적지만 애정결핍족이나 애연족도 숨어있고 오토바이 매니아와 미니스커트 걸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리라. 그래도 대부분은 형광등 아래에서 글자 수 맞추는 걸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 수업 시간에만 유독 닭병 사춘기가 많아서 불안하지만 그래도 왔다갔다 좌충우돌하지 않아서 눈물이 좔좔 흐르게 고맙다.
1학년 3월, 입학하자마자 밤 10시까지 야간자습을 시킨다.
성실한 학동과 부실한 학동을 구분해 실시하는 자습시스템도 있다. 작금의 교육계는 모든 게 문서화된다. 마찬가지다. 서산 시내 인문계 학교가 그렇고 공주나 온양 같은 소도시가 100프로 동일한 시스템이다. 대도시는 야간자습에 덜 시달린다지만 내내 학원수강에 의탁하므로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다. 이제 교사는 아이들과 눈동자 맞추기보다는 체크와 관리 모드가 더 중요해졌다.
아이들은 그 와중에도 전광석화 웃음을 터트린다. 야간자습에 묶인 표정은 애처롭지만 이들 질풍노도들은 틈새 돌풍을 일으키며 우쑥불쑥 성장한다. 시시각각 기차화통이나 싸이렌을 터트리지만 통학버스에 오르자마자 다시 스마트폰 액정에 집중하는 변화무쌍 하굣길이다. 일순 적막하다가 하차하자마자 말굽소리로 장난을 친다. 고요와 소요가 시계추처럼 넘나드는 그들이 나의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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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식 메뉴는 잡곡 혼합밥에 쇠고기 미역국, 깍두기, 마늘쫑 볶음 그리고 도넛과 애플 쥬스가 특식으로 나온다. 그런데 어렵쇼, 창수가 식기 비우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또 배식줄에 서 있는 것이다. 장난도 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무언가 꿍꿍이가 숨은 게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식기를 받자마자 밥은 잔반통에 버리고 도넛과 애플 쥬스만 달랑 들고 나오는 게 수상하다. ‘우히히 두 번 받았다’ 좋아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덜미 잡히는 순간 스승의 판단에 따라 죄인 여부가 결정된다. 예전 같으면 식기를 머리에 이고 ‘양심불량’ ‘오리 꽥꽥’을 시켰을 것이나 요즘은 훈방조치나 벌점 부과로 처리한다. 어쨌든 그 정도는 봐줄 만하다.
아침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들이 성냥개비 빠져나오듯 오그르르 등굣길을 서두른다. 이 꿈나무들은 미래의 등불과 부채덩어리로 혼재된다. 그러다가 불쑥.
“선생님이 가장 나이가 많으시다매, 교장 선생님이 안 되나요?”
네온사인 위로 떨어지는 봄 햇살마다 꽃 잔치가 하늘하늘 열리는 중이다. 일단 묵묵부답으로 때우는데.
“얌마, 안 되는 거냐? 못 되는 거지. 너는 화법 시간에 배운 ‘안 부정문과 못 부정문의 차이’를 벌써 까먹었냐? 골드 미스 그 아줌마는 시집을 안 간 거냐? 못 간 거냐?”
객쩍은 소리조차 대구법 문장을 구사하는 게 인문계 꿈나무들의 언어 능력이다.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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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끝물 고3들의 학창시절도 눈부시고 눈물겹다.
사내아이 계집아이 이맛살 맞대고 책장 넘기는 풍경도 어디선가 그려봤던 그림이다. 사내 아이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눈을 감는 소녀의 모습도 뽀얗게 애처롭다. 윗도리 덮어주고 옆 반까지 가서 여학생의 학습지를 빌려와 이어폰을 한 짝씩 끼우고 함께 음악을 듣기도 한다. 내가 소시적에 이런 고등학교를 다녔으면 ‘이성에 대한 공복의 사춘기’로 시달리진 않았으리라. 그 시절 나는 여학생들과 담을 쌓은 만큼 외로웠고, 그래서일까, 그 결벽증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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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의 나는 순결본색주의자였다. 젊은 남자들끼리 부곡하와이로 놀러갔던 첫 발령지 총각선생 시절이다. 해물잡탕으로 저녁을 때리고 2차 호프집을 거쳐 우르르 나이트로 진출했나 보다. ‘쿵짝쿵짝’ 계단을 내려가면서 스무 살 고고장도 떠올라 초장에는 감회도 새로웠다. 그런데 장식품을 주렁주렁 매단 무희가 등장하면서 호흡이 막히는 성고문의 시간으로 변신했다. 불안하다. 여자가 옷을 벗기 시작하면서 껍데기 두 종류만 남을 즈음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으니, 솔직히 술기운 탓도 있긴 했다.
“형, 이건 아냐.”
침을 짝짝 말리고 있던 채선배가 어리둥절 바라본다.
“저 모습이 형의 어머니고 누이이며 여동생이야.”
“…… 지금 우리는 놀러온 거고 이건 하나의 유흥문화일 뿐이야. 네 순수함은 인정하지만 제발 판을 깨지는 마라. 마음이 불편하면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거야. 취향이 다르다고 모두 나쁜 무리로 치부하다니.”
잠시 후 웨이터를 붙잡고 당장 쇼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소리친 게, 돌이켜 보면 미안하다.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미안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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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의 상전벽해는 신작로 안쪽일 뿐 산맥과 벌판은 아직 그대로다.
인간은 개발에 미쳐있지만 대자연 앞에서는 ‘부처님 손바닥 꼬집기 정도의 위력만 발휘할 뿐이다’ 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무섭다. 빙하가 허물어지고 방사능 소낙비가 쏟아지는 게 우리들이 뿌린 죄의 씨앗이 아니라고 고개 흔들며 푸른 산으로 눈길 돌린다. 큰 산 아래 작은 산이다.
소나무 둥치 걷어차며 오르던 유년의 그 산이다. 누군가 똥 누고 간 자리에 개똥참외줄기가 뻗었던 기억도 아슴아슴하다. 소나무 사이로 억새풀들이 대궁을 치고 오르는 중이었고 고사리나 취나물이 그늘 아래 박혀있었다. 그 맞은편 언덕에 여우 무덤이 있다고 했다. 어디서나 보이는 흔해빠진 낮은 능선이었으므로 그냥 무심했다.
관심의 초점은 망일산 꼭대기의 레이더 기지였다. 꼭 수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기지국은 아랫녘에서 보면 세 개로 보였고 서산 쪽에서 보면 두 개로 줄어들었다. 그 레이더 너머 푸른 하늘 뭉게구름이 슬로비디오로 움직이기도 했다.
‘레이더 기지에 올라가볼 거야’
아홉 살 소년은 무지개 잡으려는 나폴레옹 흉내로 망일산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기도 했다. 누군가 초록빛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게 틀림없던 그 신록의 계절이다. 저 초록들을 뭉턱뭉턱 수제비국에 넣으면 매생이 맛일까, 시금치 맛일까. 소년은 매듭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막대기로 소나무 아랫도리를 치곤 했다.
쥐똥나무 숲에서 석고처럼 멈췄다. 철조망이다. 숨이 멈춘 수풀에서 콘크리트의 적막이 ‘쿵’하고 목을 죄었다. 군인들의 손에 들린 무시무시한 총구도 불을 뿜을 듯 위압적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년 혼자 조바심할 뿐 숲속의 모든 물상들은 초록의 잔치판에 빠져있었다. 참새와 때까치도 포릉포릉 날갯짓했고 민들레 홀씨까지 철조망과 어우러져 너울너울 춤을 추는데, 정작 한반도 백성인 소년 혼자 옴짝달짝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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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낮은 능선에 5층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방울꽃과 벌 나비 어우러지던 여우 무덤 그 자리로, 언제부터였나, 포클레인이 언덕을 허물고 콘크리트 골재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골재가 고등학교 건물로 변신한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같은 가설극장이 들어오던 그 옛날 숲속의 공터에, 지금은 야간자습 불빛이 끔먹거린다. 아침이 되면 예술미 갖춘 건물로 화사하게 변모하면서.
6층 옥상까지 엘리베이터를 타면 운동장과 강당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스팔트에서 올려보면 푸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기숙사 맞은편 그 자리다. 차임벨이 울리면 또 터진 자루에서 쌀톨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등 탈출 쌀알 부대가 눈썹 휘날리며 급식실 출구에 도착한 채 ‘아싸’ 엉덩이 흔든다. 곧바로 기차행렬처럼 쪼르르 나래비 선 아이들은 뒷줄을 쳐다보며 ‘아찔하군’ 하며 흐뭇해한다. 스승들 역시 슬리퍼 굽 치듯 계단을 뛰어오르며 그렇게 인생의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고교 시절, 삼길포 주막에서 따뜻한 점심 밥상을 받기도 했다. 술 배달 트럭 조수석에 앉아 가로림만을 돌아다니며 가끔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어달라며 막국수도 얻어먹었다. 이번에는 빨랫줄이 목련꽃처럼 하얗게 매달리던 툇마루에서의 시골밥상이다. 시금치, 콩나물, 깍두기와 무나물 같은 식물원 밥상에 밴댕이 한 종지가 육류의 존재감을 나타내었었다. 숭늉 한 대접 마시다가 고개 들면 문설주 너머 시퍼런 바다가 펼쳐 있었다.
장마철에는 그 바닷가 주막으로 트럭 운행이 정지되었다. 신작로 황토흙이 무너져 삼길포는 물론 대죽리, 대로리, 독곶까지 싸그리 통행 불능이 되었다. 그때마다 산지사방 주막집 전화통이 불을 뿜었다. 수동식 전화기로 쏟아지는 주모들의 따발총 질타가 소년의 볼을 벌겋게 만들었으나 아무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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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후, 그 삼길포까지 점심 원정 칼국수를 먹기도 했으니.
그건 5교시 수업이 빈 노장 교사들 패거리에 끼었던 봄날의 점심 나들이다. 사실은 40년만의 방문길이다. 그때도 벚꽃 단장이 스티로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저 흰 꽃 부스러기가 바다에 날아가 그대로 거친 파도의 흰이빨로 변신하리라.
문득 아랫집 곁방살이였던 정다운 핏줄들이 떠오른다.
동호형의 동생 효순이는 70년대에 태안여상을 1년 늦게 입학하였다. 졸업 이후 대산 농협에 다니다가 삼길포 횟집을 차려 이십 년의 신사고초 이후 마침내 6층 빌딩을 올렸다고 했다. 그미도 이제 초로에 접어들었으니 재상봉하기 두려운 나이다. 어쨌든 동행인과의 점심 타임에서 혼자 빠질 수도 없으므로 삼길포 6층 건물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저 집이구나’하며 다음 방문을 꼽아본다.
저녁마다 큰며느리 작은며느리 함께 모인 둥근 식탁이 허공에 둥두렷이 떠올랐다. 아들 하나는 1층 마트 사장님이고 둘째 아들은 주방장 출신 횟집 대표리라, 멋대로 상상의 밑그림을 펼쳐본다. 사내는 자갈치 트럭을 몰고 아낙은 횟칼을 갈며 돈을 모았으리라. 사내가 던지는 활어 꾸러미에서 비린내가 쏟아지면 아낙은 풋것 골라 수족관에 넣고 시든 생선은 저녁 밥상에 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죽순처럼 쑥쑥 성장할 때 어른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으리라.
총각 선생 시절 유도혁 선배가 월간지 ‘여고시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여 어른들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가더라도 크게 우려할 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라는 문장 중에서 ‘크게 우려할 사안이 아님을 믿는다’에 밑줄을 그었고, 나 혼자 ‘믿는다’라는 서술어 앞에 ‘감히’라는 부사어를 새롭게 붙여놓고 흐뭇했었다. 실제로 논산 쌘뽈여고 청정소녀들의 일탈이란 게 그런 수준이었다. 자율학습시간에 실내화 바람으로 빵을 사먹으러 가거나 교회 남학생들과 분식집에서 ‘하하호호’하는 사소함이니 안도할 만하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교단 경력 30여년, 여덟 학교를 거치면서 ‘차마 옮길 수 없는 험악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기리라’ 주술처럼 외우던 문장을 꺼이꺼이 지우기도 했다. 누에고치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기도 했고, 물속에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던 제자를 떠올리며 절망의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오토바이로 하늘을 날거나 망루에서 떨어지는 새파란 몸들을 체득하면서 조심조심, 살얼음판 깨질세라 소심증과 조급증이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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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곶→대산’ 통근길은 대도시의 출근길처럼 차량 통행이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시무시한 대형트럭과 통근 버스 사이사이에 승용차가 끼어있다는 점이다. 작은 승용차 바로 뒤를 쫓아가는 덤프트럭의 모습은 ‘병아리를 쪼으러 쫓아가는 어미 닭’처럼 조마조마하다. 더러는 ‘어린 아이를 때리려고 후두두 쫓아가는 주정뱅이 아비의 모습’처럼 아슬아슬하다. 그런 유년의 기억이 있었다.
아랫집 익구네 장마철이었던가. 가로림만으로 흐르는 새천의 오두막집 가족이다. 그 오두막에는 아비와 아들만이 단 둘이 살았다. 일곱 살 아들이 새로 산 검정고무신을 물살에 떠내려보낸 게 문제다. 익구네 아저씨가 고무신을 찾아오라며 당장 작대기 들고 쫓아갔다. 술 취한 아비는 쫓아다니고 쬐끄만 아이는 사타구니에 방울소리 나게 도망치는 풍경을 보다가, 나는 빗물 장판에 주저앉아버렸다.
익구가 장마철 급류에 발을 담갔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끝에 걸린 고무신을 꺼내기 위해 이미 배꼽이 찰 정도로 깊이 들어갔다. 위험하다. 아저씨는 작대기를 내밀어 아들을 꺼내 올렸으니, 두들겨 패려던 몽둥이가 구명줄로 변신한 것이다. 익구는 울고 아비 혼자 풍년초 피면서 한숨을 빨았던 그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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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늙었다. 밤 두 시, 슈퍼 문짝 두들기며 소주를 꺼내오던 내 청춘은 이제 갔다. 최루탄 가루 털어내며 닭다리 뜯다가 맥주병을 이빨로 따던 그 젊음도 갔다. 이제는 아스팔트에서 캔맥주 마시며 꽁초를 주울 수도 없으며, 지하도 노숙에서 구두를 베개 삼아도 로망이 아니며, 신새벽 부뚜막에서 동치미 국물을 들이키면 품격이 떨어질 연륜이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를 삼가라’는 율곡의 경구를 아직 지키지는 못한다.
4월 쑥떡으로 아침을 때우기도 하고 컵라면에 물을 붓거나 햇반을 데워서 새벽 곱창을 채운다. 초로의 자취생은 전자렌지가 없으므로, 밥통에 보온을 찍고 냉동고의 찬밥을 넣은 다음 온기를 기다린다. 가장 편한 건 빵인데 설탕이 너무 많아 당뇨가 걸린다. 요새는 교무실 탁자나 상점 진열대에서 공짜 먹거리를 만나면 슬그머니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도넛이나 꽈배기, 방울토마토나 싸우나 오징어를 푸대 자루에 꽉 채워놓고 야금야금 꺼내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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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입 이후 처음으로 전교조 서명을 받았다.
언제부터였나, 비장감이 잦아지면서 서명조차 잡무처럼 진부해졌다. 80년대 신군부 시국처럼 목숨 거는 결단이 아니라 그냥 이름자를 올렸다가 상황이 생기면 공동대처하는 것뿐이다. 깨어있는 교사의 신앙이었던 전교조는 이제 깨어있던 스승들이 ‘유리 항아리 안고 바위산 오르듯’ 조심조심 보듬는다. 그 기본권 행사조차 몸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젊은 교사에게 서명용지를 주면서 읽고 판정을 내릴 때까지 기웃대며 책상 옆에 서 있는 초로의 몸이 불편한 것이다.
이번에는 쿨 메신저를 사용해서 단순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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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께 교원노조법 개정 청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지난 2월인가요, 해직교사를 전교조에서 제외시키지 않으면 법외노조로 만들겠다는 방침에 대한 반대 청원입니다.‘교단을 쫓겨났으니 이제부터 교사가 아니므로 노조에서 탈퇴시켜야 한다’는 고용부 논리는 참으로 생뚱하고 비정합니다. 15년간의 합법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뜻인가요. 현재 ILO(국제노동기구)에서도 우리 정부에 시정권고를 내린 상태입니다.
전교조 조원합원이 아니라도 우리는 한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동반자입니다. 서명용지를 받으신 선생님께서는 옆 선생님께 돌려주시고 맨 나중 선생님께서 강병철에게 돌려주세요.
4.19 혁명의 아침 강병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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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장을 복사하여 부서별 교무실에 따로따로 돌렸다. 3교시 수업 후 자리에 돌아오니 넉 장의 용지가 내 자리에 쌓여 있어서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었다. 그렇게 교직원 모두의 서명을 받아 전교조 충남지부에 팩스로 보냈더니 지금은 일단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봄날의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