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간 지도 꽤 오래됐다(사실 낼 간다). 어언 신림동 생활 10개월 째 짜증과 싫증은 물론이요 지겹다 못해 삶의 회의까지 느껴진다. 내가 하는 공부의 의미를 모르겠다. 특히 헌법, 법이라고는 국보법과 집시법, 화염병사용등에 관한 처벌법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나에게는 '세상에 이런 법이 우리나라에 있었나'할 정도로 내용이 쌈빡(!)하며 화려(!)하고 성인공자부처님예수님 말씀 다 모아논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이 이미 법따로 사람따로 있는 놈 따로 없는 놈 따로 굴러간다는 것을 아는 나같은 놈에겐 "딴엔 민주국가라고 헌법은 쌈빡하구만...... 쒸벌눔덜"하는 한숨과 욕설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이랑 영 격리되어 있는 이곳 신림동에서도 불합리와 부조리는 눈에 보인다.
요새 난 책을 읽는다. 원래도 책읽기를 좋아하고 여기 와서는 자의반 타의반(!) 하루에도 1,200페이지를 보게 되었다.다 책 좋아한 업보인가 보다(물론 그 책들은 법 아니면 딴나라 말, 그것도 아니면 세상 제멋대로 해석하는 행정학이니 하느 과목들이다). 그런데 또 책다운 책을 읽은 기억이 영 드물다. 하나같이 딱딱하기는 차돌같고, 난해하기는 엉켜있는 실타래보다 더하며 주석이랍시고 달아놓은 의견들은 제멋대로인 것이 조선일보보다 더하다. 책이랍시고 읽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뿐이다. 물론 이런 책을 공부라고 읽는 나도 같잖고 한심하다.
그래도 몇권 괜찮은 책을 읽기는 했다. 책 읽던 가락도 있고 아무래도 난 좋아하는 분야가 따로 있어 그런 모양이다. 먼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참으로 근래 들어 보기 드문 소설이다. 나 대학 처음 들어왔을 때 한참 유행한 소위 '후일담 문학'들, 80년대 운동권을 자처하며 '그땐 그랬지'내지는 '조또...... 운동10년에 강산은 그대로구마'하는 푸념들이나 넋두리를 모은 소설들, 그 한계를 넘어선 소설이 바로 오래된 정원이다. 황석영 특유의 술술 넘어가는, 거기에다 서정적이기까지한 문체로 장식된 80년대의 그 격렬한 삶들, 극과 극을 이만큼 조화시킨 작가는 90년대 이후 보기 힘들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뭔가 가슴찡한 소설을 읽고 싶다는 분들, 이 소설을 권한다. 고등학교 때 한때 유행하는 고교생 대상 싸구려 로맨스 소설보다 더욱 감동적이며 진정 자신의 삶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황석영은 또 우리학교 출신이다. 졸업은 못했는데 철학과 2학년까지 다녔다).
그러고는 영 읽은 책이 없다. 널려 있는 책대여점이라는 것이 책대여점인지 만화대여점인지 모를 지경이다. 21세기 문화강국이라는 것이 만화에서만 나오는지 대여점 공간 2/3가 만화이다.
그래도 몇 권 건지기는 했다. 특히 '베르세르크'! 일본만화 특유의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 까지는 아니고 하여튼 그런 분위기로 무장한, 그러면서도 팔다리가 날아가고 피가 튀기는 완전 폭력물보다는 조금 생각이 있는 작품인 듯 싶다. 자기 삶을 조금 치열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권해드릴 만하다. 아마 80년대말이나 90년대 초반에 나왔더라면 운동권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만한 작품인데 조금 아쉽다.
그러고는 뭐........ 아항! 전쟁소설 '데프콘'이 있구만.한중전쟁,한일전쟁,급기야는 한미전쟁(!)으로 이어지는 14권짜리 소설인데 내가 민족주의자라 읽은 건 아니고 군사무기 분야에 관심이 상당하던 터라 읽어 본 것이다. 톰 클랜시(영화 '긴급명령', '패트리어트 게임', '붉은 10월호'저자이다. 이전에 다 읽었던 작품이다. 잘 모르시나?...... 그럼 게임 '레인보우 식스'아시는가? 그 게임 스토리 작가다)아시는 분들은 읽으면 재미있을 듯 하다. 중간중간 언뜻 보이는 극우 민족주의 냄새만 피하고 군사무기 분야만 추려내 읽으시면 좋을 듯하다. 더구나 한반도는 항상 전쟁과 가까이 있는 관계로 '통일 이후 한반도의 위상', '통일되면 일본이랑 한판 붙나?' 뭐 이런 거 궁금하신 분들 함 읽어보시라. 소설 구성이 철저하게 스타크 류의 전자오락 롤플레잉 게임 형식으로 되어있어 지루하지는 않다(하룻밤에 4권 읽은 적도 있다).
그리고는 전혀 읽은 책이 없다가 요새 다시 읽는다. 91년판 한겨레신문사의 '발굴한국현대사인물1권'이랑 85년판(!)송건호 선생 저 '한국현대인물사론' 두 권이다.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책인데 상당히 감동받았던 책들이다. 고시서적 구하려고 헌책방 전전하다 먼지 뒤집어 쓴 것을 무려(?) 5500원에 구입했는데 한 번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두 책의 성격은 거의 비슷하다. 그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서태석('암태도 소작쟁의 주도'), 이극로(조선민족혁명당 당수, 반일투사), 김교신(성서조선 사건으로 구속된 기독교반일민족주의자), 차금봉(공장노동자출신의 제4차 조선공산당 당수, 옥중 사망) 이런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들의 치열한 삶들을 다룬 책들이다(이 글 읽는 사과연 분들도 잘 모르는 분들일 것이다). 그분들의 삶을 읽을 때마다 왠지 모를 분노와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 처지가 때로 한심스러운 기분이 든다. 나의 과거를 다잡아 주면서도 나의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듯해 귀중하고도 소중한 마음이 드는 책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송건호 선생의 책이 조금 더 낫다. 두 책 모두 저자는 신문기자들(송건호 선생은 동아일보 주간 출신이고 한겨레 신문사 책은 기자들이 각각 1명씩 맡아 쓴 책이다)인데도 연륜이 느껴진달까, 아님 '이론의 80년대'보다 '의리의 70년대'에 살아 그런 것일까 송건호 선생 책이 더 애착이 간다.
며칠 전에는 김영환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다 읽었다. 80년대 중후반 자신의 단편소설을 모아 낸 단편소설집인데 황석영보다는 조금 딱딱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더욱 철저한 모습이 보기가 좋다. 때로는 80년대의 무서운 현실을 온몸으로 고발하면서도 저자 자신이 겪은 50년대 반공시절의 뼈아픈 과거에 대해서는 따뜻한 손길과 상생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의 공력이 놀라울 뿐이다. 요새는 활동이 뜸한데 빨리 신간을 냈음 좋겠다.
독서 외에도 조금 달라졌다. 나는 매일 달린다. 신림동에서 서울대까지........ 하루 공부를 12시 이전에 끝내고 바로 독서실에서 서울대 정문 앞의 학교 지도판까지 달린다. 거기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달려서 학생회관 앞, 거기서 걸려있는 대자보와 현수막들을 한번 음미하고 다시 대운동장으로 뛰어서 대운동장을 대여섯 바퀴, 처음에는 어렵더니 이제는 뛸 만하다. 고등학교 때고 군대 시절이고 뛰는 것은 아주 쥐약이었는데 내가 스스로 뛰고 싶어 뛰니까 또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뛰면서 보는 하늘,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고 어제는 보기 힘든 유성도 보았다.
뛰다 보면 갖은 생각이 난다. 욕망, 번뇌, 후회, 분노, 한심함....... 이런 것들을 잊으려 한다. 딴 사람들은 뛰면서 그런 것들 다 잊는다는데 난 그것이 잘 안된다. 하긴 뭐 사람이 다 같으랴. 그래도 뛸 때만큼은 참 행복하다. 내 몸이, 육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드물 것이다.
뛰다 보면 자꾸 떠오르는 생각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남의 강요가 아닌 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것, 그 욕망이 제일 강하다. 특히 내가 지금껏 공부한 사회과학, 다시 공부하고 싶다. 1학년때는 '뭘 알아야 운동권하지' 생각으로, 고학번이 되어서는 '후배들한테서 쪽을 당해서야......'생각으로 공부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하다. 경제학, 철학, 사회학 모두 한번 아우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 내가 1학년이라면.....'하는 가정도 자주 해 본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은 노릇이랴마는...........
그러나 어쩌랴...... 세상이 만만치 않음은 진즉에 알고 있는 터이다. 맑스가 얘기했듯 노동이 권리가 아니라 '의무'가 되어버린 사회, 노동자에게 보장된 것은 '굶어죽을 자유'뿐 이라는 그런 사회에 내가 포섭되어 있음을 내가 어찌 모르랴.......
우리는 언제쯤에야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공부하고 살아가는 사회에서 한번 살아보나...... 국가와 사회라는 거대한 덫 속에서 이름없는 개인이 움치고 달싹거릴 공간이 이다지도 부족한가...... 섭섭하고 슬플 뿐이다.
오늘은 공부를 일찍 제꼈다. 간만에 나도 '자체휴강' 한번 했다. 좀 있다가 저녁 먹고 또 뛰러 가야지.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