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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인권을 짓밟는 정권에게는 굽힐 수 없어.
증언자: 임호상(남)
생년월일: 1962. 9. 4(당시 나이 18세)
직 업: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8. 11
개 요
당시 숭일고 3학년이었던 임호상씨는 항쟁기간중에 덕림사에서 친구들과 모여 대민 홍보용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가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덕림사와 친구들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소설이나 시를 읽고 운동을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도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책을 읽는다거나 등산가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 7-8명은 자체적으로 모여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고, 독후감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주로 서정적이고 쉬운 문학작품을 애호하는 편이었다.
당시에 광주시내 각 고등학생들이 모여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초롱회'라는 서클이 있었다. 우리 친구들은 그 모임에 나가면서 항상 건전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느라고 학교 공부에는 그다지 취미를 못 붙였지만 그래도 나는 법관이 되는 꿈을 꾸었다. 깨끗한 사회, 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나는 숭일고 3학년이었다. 입시준비에 한창 바쁠 시기였지만 나는 입시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기보다는 1980년 들어 달라져가는 사회분위기에 관심을 두고 대학생 형들이 시내에서 데모할 때는 쫓아다녔다. 나는 데모를 하는 이유를 대학생들이 도로에 뿌린 유인물을 보고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유인물 내용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재의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이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 한다. 전두환이 계엄을 확대실시하여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려고 한다."는 등의 말을 듣고 그런가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치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었지만,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고등학생으로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는 무리가 나쁜 것이란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5월 16일 대학생들이 도청 앞 광장에 모여 대중집회를 하고 횃불시위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정말 그 대열에 참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온 친구들이 있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사귄 친구들인데, 학교는 달랐지만 고등학생이 되어도 늘 만나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월산동) 근처에 있는 덕림사에서 일요일마다 만나 독서토론을 하는 등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방림동에서 월산동까지 걸어갔다. 방림동에서 광주천을 따라 월산동으로 꺾어 들어가는데, 광남로 쪽에서 공수부대와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수부대들이 최루탄을 쏘면 학생들은 순식간에 최루탄을 피해 흩어졌다. 이때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공수부대에게 잡힌 학생들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맞고 질질 끌려갔다.
이것을 본 나는 겁이 나서 광남로를 가로질러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골목골목으로 해서 덕림사로 갔다. 친구들에게 내가 목격한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했지만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데 평소와는 달리 발걸음이 무거웠다.
5월 19일 월요일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있었다. 잠시 쉬는 동안 생각해 보니 대학생들은 두들겨맞고 끌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공부만 해야 하는가 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학교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우리는 학생이기 이전에 광주시민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무자비하게 광주시민을 짓밟는 공수부대를 몰아냅시다."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대안도 계획도 없었기에 터질 것만 같은 격앙된 심정을 담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멍하니 운동장에서 뛰노는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체육복을 입은 상태로 책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왔다. 선생님께 간다는 말도 않고 친구들에게만 집에 볼일이 있어 먼저 간다고 말해 놓고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먼저 월산동에 있는 덕림사로 갔다. 다른 친구들도 와 있었다. 우리는 우선 밖으로 나가 보자고 한 뒤 광남로 쪽으로 가려는데 공수부대원들이 광주공원에서 백운동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엉거주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겁에 질렸는지 모두 도망가기에 바빴다. 전경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게 되니 나는 온몸에 피가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전경이었는지 공수부대원이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그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집어삼킬 듯한 모습으로 달려왔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우리는 보도블록을 깨어 그들에게 던졌다. 시민들은 멀찌감치 서서 우리들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20여 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상대로 돌을 던지는 우리는 고양이 앞에 쥐같았다. 한참 투석을 하다가 우리는 주춤주춤 도망쳐 월산동 골목길로 갔다. 군인들은 양동에 있는 한방병원까지 쫓아오더니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덕림사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3시경, 어머니께서 덕림사로 나를 찾아오셨다. 평소에 내가 덕림사를 잘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나를 찾아오신 것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저녁을 먹은 후 나더러 다락에 들어가 숨어 있으라고 했다. 밤중에 먹을 것과 요강을 넣어주셨다.
다음날(20일) 다락에 웅크리고 있자니 전날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이며 쫓기던 모습과 친구들 생각이 나서 기어이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치를 보니 어머니께서 안 계신 것 같았다. 나는 다락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해 지붕으로 나가 집을 빠져나왔다.
덕림사로 가면 또 어머니가 그곳으로 찾아오실 것 같아 나는 친구 강일이 집으로 갔다. 강일이는 전날, 내가 없는 가운데 유인물을 작성하기로 한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등학생으로서 대규모적인 시위를 주도하기는 어렵고, 전경들과 맞서서 싸우기도 아직 어리니까,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작성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유인물을 찍어낼 방법은 이미 마련되어 있으니 21일 아침에 친구 홍재 집으로 오라고 했다.
유인물 작성, 배포
21일 월산동 변전소 근처에서 자취하는 홍재 집으로 갔다. 이미 조강일, 박규상 등 7명의 친구들이 모여 미리 써온 유인물 내용에 관하여 서로 교환하여 살펴보고 있었다. 나도 미리 생각해 둔 내용을 급히 8절지에 써 내려갔다. 광주시민이 총단결하여 계엄군을 물리치자는 내용이었다. 각기 나름대로 썼기 대문에 내용은 똑같지 않았지만 거의 비슷비슷했고 논리정연한 문구이기보다는 격분에 못 이겨 호소하는 것이었다. 유인물은 다섯 종류의 문건으로 작성되었다. 홍재 누나가 다니던 덕림교회에서 등사기를 구했다.
먼저 유인물의 문건을 철필로 작성하고, 등사기로 각 2백부씩 밀었다. 우리가 작성한 유인물을 2-3명씩 조를 나누어 월산동 주변에 뿌렸다. 이때 시민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차량을 타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월산동 로터리로 나온 나는 친구와 함께 시민들이 타고 있던 미니버스를 탔다. 차 안에는 대학생들과 청년, 중학생도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유인물을 나누어줬다. 버스는 월산동을 지나 양동, 화정동으로 갔다. 우리는 도로변에 사람이 있으면 유인물을 뿌렸다. 또 버스가 시민들을 태우려고 정거하면 한 장씩 시민들에게 줬다. 차가 다시 백운동 로터리로 가자 친구들과 월산동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있는 친구 4명을 만났다. 그때가 오후 4시경이었다.
우리는 마침 그곳을 지나던 군용트럭을 세워서 모두 올라탔다. 2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시내로 가는 줄 알고 차를 탔더니 나주로 무기를 탈취하러 간다고 했다. 얼떨결에 차를 탔는데 그 말을 들으니 조바심이 생겼다. 어떻게 할 여유도 없이 차는 이미 나주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나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금천에 이르렀을 때 미니버스 한 대가 반대편에서 왔다. 그 차에는 무기가 실려 있었다. 그들이 우리 차를 세워 무기를 나눠 주면서 나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총을 분배받았다. 나와 친구들도 카빈 4자루와 실탄 20발 정도를 지급받았다. 총과 실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총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총을 받고 광주로 오는데 송암동 포도밭 쪽에 군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실탄을 장전하고 차를 달렸으나 아무런 공격도 없었고, 우리들은 총을 쏘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월산동에서 내려 덕림사로 갔다. 그곳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총은 한쪽에 세워놓고 현재의 광주상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과연 우리가 광주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을 고민했지만 뚜렷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덕림사에서 저녁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백운동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대성국민학교 쪽으로 가보니 골목골목에 시민들이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거리는 물론이고 집집마다 불을 꺼버려서 캄캄했다. 시민군들이 대창주유소에서 총소리가 난 곳을 향해 총을 쏘았다. 우리는 그 총소리를 들으며 어둑어둑한 도로를 더듬어 대창주유소 건물내로 들어갔다. 갑자기 암호를 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암호를 몰랐던 우리는 몹시 당황했다. "우리는 시민군이다. 총소리를 듣고 왔다." 그때 지프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한 사람이 차에서 뛰어내려 사무실로 달려왔다. 그는 '계엄군이 남평에 있다고 하니 혹시라도 이상이 있으면 총을 쏘라'고 했다. 그 말을 하고 그는 급히 떠났다. 주유소 건물에 있던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우리에게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총을 빼앗지는 않았다. 덕림사로 돌아온 우리는 무서워서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날 밤을 흙바닥에서 지냈다.
다음날인 22일 아침, 강일이 아버지께서 오셔서 우리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총을 빼앗아갔다. 나의 어머니도 찾아오셨다. 우리들은 헤어지면서 몸조심하라고 서로 격려했다. 그날 이후 나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28일까지 조용히 집에 있었다.
보안대로 끌려가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맞아
5월 27, 28일경 친구 홍재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어머니가 듣고 나를 끌고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한테 가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여수에서 은행에 근무하고 계셨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화순으로 걸어갔다. 방림동을 지나 지원동 종점에서 너릿재로 올라가는 길목 양쪽에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약 40구 정도였는데 하얀 천으로 덮여져 있기도 하였고, 그냥 내버려진 시체도 있었다. 얼굴이나 온 몸이 일그러져 차마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시체들이 있었다.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것도 대부분 피가 묻어 삐져나온 것이 더 많았다. 시체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화순읍에 도착하여 여수행 버스를 탔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보다 여수 입구 쪽에 있는 석창의 아는 집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개학하기 하루 전까지 석창 아저씨 집에서 지내다가 학교가 개학한다는 말을 듣고 광주로 올라왔다.
개학하는 날, 아버지께서 학교에 가는 나에게, "잡혀가더라도 별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여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잡혀가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부모님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나간 지 이틀이 지나자 보안대에서 형사가 나왔다. 담임선생님이, "책가방은 놔두고 운동화만 가져와라."고 했다. 나는 먼저 교장선생님 방으로 갔다. 보안대 형사가 나를 보더니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나와 친구들이 작성한 유인물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는 나의 두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대기해 놓은 지프차에 실었다. 형사는 지프 차 안에서 나에게 반말도 하지 않았고 순순히 대해 주었다.
통합병원 뒤에 있는 보안대로 데리고 가더니 형사가, "임호상을 체포하였습니다."고 보고를 하였다. 그러자 나이가 서른 대여섯이 넘을까말까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발로 차고 온몸을 짓밟았다. 그 뒤로 무릎을 꿇고 있는데 서너 명의 형사가 조사실로 왔다갔다 하면서 이유 없이 나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다. 형사가, "유인물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었다. 나는 나 혼자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을 한다고 형사가 몽둥이로 두들겨팼다. "이미 홍재가 불었으니 잔말 말고 대답해." 하며 눈을 부라렸다. 다시 질문을 하면서 서류를 넘기는 것을 보니 조강일, 이홍재, 박규상 그리고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친구들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친구들만은 어쩔 수 없이 말해야겠다 생각하고 그들 이름만 말했다. 그랬더니 바로 상무대로 옮겨져갔다. 상무대에서는 보안대에서보다 더 가혹한 매를 맞았다.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때렸고 어깨, 엉덩이, 허벅지도 사정없이 때렸으며 한 번 두들겨 맞고 나면 아예 서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심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왜 유인물을 만들었으냐? 주동이 누구냐? 누구에게 지시를 받았느냐?"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랬더니 곡괭이 자루로 또 다시 가혹하게 두들겨팼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차라리 죽여라!"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더욱 더 혹독한 몰매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시 묻기 시작한 형사는, "김대중이가 사주하였느냐? 어떤 단체에서 시켰느냐? 누가 유인물을 주어서 베낀 것은 아니냐?" 등을 반복하여 물었다. 나는 끝까지 내가 주동자라고 했지만 형사는 믿지 않았다. 나는 우리 넷이서 다 선동하였다고 하였다.
내가 그 고초를 당하며 취조를 받고 있는데 옆에서는 형사란 놈들이 양담배를 물고 트럼프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담배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을 주우라고 시키고, 주우려고 몸을 굽히면 구둣발로 나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그러면 나는 정신을 잃곤 했다. 그런 나를 운전병이 세면장으로 데리고 가서 세수를 시켰다. 도저히 걸을 수도 몸을 지탱할 수도 없었다. 운전병이 부축을 하고 다시 심문을 받으러 갔다. 형사는 때리는 것도 지쳤는지 '원산폭격'을 시켰다. 다리를 벽에 대고 팔은 땅을 짚게 하여 다리 사이에 곡괭이를 끼우고 있으면 다리가 떨려 도저히 버틸 힘이 없었다. 사나이로 태어나 눈물 한 방울을 흘린 적이 없었던 나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내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곡괭이가 떨어지면 그들은 또 다시 곤죽이 되도록 때렸다. 온몸이 한 마디로 녹초가 되고 말았다. 운전병에게 다시 씻겨서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보안대 직원이 나를 향하여 '특A급'이라고 말을 하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상무대 교회당 쪽으로 끌고 가더니 교회당 밖에 잠시 앉아 있으라고 했다. 잠시 앉아 있자니 군인복을 입은 키 큰 사람이 나를 보고서 교복의 명찰을 북 뜯어버리고 구둣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곤죽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 마디 항의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상무대 교회당에는 'C급'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교회당으로 들어가 밥을 먹으라고 보안대 직원이 일러주었다. 교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통곡을 하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는 분노가 일었다. 민주주의 나라라는 데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용기가 솟아났다.
"이 씨벌놈들이 우리가 뭔 잘못을 했다고 우리를 죽여." 하고 소리를 치며 나는 교회당이 쩡쩡 울리도록 꺽꺽 울어댔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모두 울어버렸다. 어떤 젊은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 앉게 하더니 밥을 먹으라고 권유하였다. 닭고기를 넣은 미역국에 보리밥이 있었다. 허리도 아프고 손을 전혀 쓸 수 없어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고등학생인 듯한 사람이 울면서 내 입에 밥을 떠 넣어주었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C급 받았다." 하고 간단하게 대답할 뿐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상무대 영창, 개인적 호의에도 역겨움 느껴
밥 먹는 시간이 끝나고 나자 지프차에 싣고서 영창으로 데리고 갔다. 보안대 직원은 나를 영창에 넣기 전에 군인 교도관에게, "요놈은 볼 만큼 봤으니 그냥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영창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지품 일체와 양말, 신발을 모두 내놓았다. 호주머니에서 부적과 동전 몇 개가 나왔다. 부적은 어머니께서 내가 잡혀가지 말라고 석창에 내려가 있을 때 해준 것이었다. 몸에 착용한 것은 모조리 풀어놓았다. 영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2호 감방에서 친구 홍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서로 마주보며 이름을 부르는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얼굴 보는 것도 잠시뿐 나는 5호 감방에 넣어졌다.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말할 수 없는 힘이 솟았다. 5호 감방에는 숭일고 후배가 두 명이나 있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후배들은 시내에 돌아다니다가 계엄군에게 잡혔다고 하였다.
영창에 갇힌 2주일 정도는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였고 나흘 동안 밥도 먹지 못 하였다. 몸도 불편한 이유도 있었지만 형편없이 나오는 음식을 먹기가 어려웠다. 겨우 목숨을 유지할 정도로 깍두기 한두 개와 밥 두어 숟갈이 나왔다. 나중에는 아침을 먹고 한 시간도 채 되기도 전에 점심이 기다려졌다. 식사량이 너무 부족해 배가 고팠다. 무등산 빵이 간식으로 배급되곤 하였는데 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5시가 되면 저녁을 먹고, 7시가 되면 취침을 하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생각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영창 안은 가지각색의 사람이 있었다. 평소 내가 깡패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5월 민중항쟁을 떳떳하고 자신감 있게 생각하는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심지어는 할아버지까지도 있었다. 멋모르고 계엄군에게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직업이나 성격, 출신과 상관없이 이 모든 사람들이 군인들의 만행에 분개를 하여 싸우다가 잡혀온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그들에 대하여 뜨거운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 영창에 있는 27일 동안 심문을 한 번 하였는데 보안대보다 혹독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누가 주동이고 다른 친구들은 없었느냐의 질문 정도에 그쳤다. 내가 조사받는 동안 특수절도를 한 학생들 4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광주민중항쟁 동안에 파출소에서 실탄을 넣어둔 가방을 주워가지고 다니다가 잡혀왔다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소장실에서 나를 찾는다고 하였다. 교도관은 나에게 들어가서 허튼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러대며 소장실로 들여보냈다. 소장실에는 우리 아버지를 안다는 어떤 분이 나를 보더니 고생하다고 위로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고 물어왔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특별히 나를 불러내어 염려해 주는 성의에 추호도 고마움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아버지와 친분관계란 이유 하나로 위로가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불려가서 그러한 소 리를 듣는다는 것이 역겨웠다.
상무대에서 나오기 이틀 전, 목욕도 시켜주고 체조시간이라 하여 운동장을 뛰게 하였다. 고등학생은 전원 석방시켜 준다고 하였다. 어떤 행동을 하였던간에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석방되었던 것 같다.
상무대에서 나오자마자 교육위원회에서 나온 교육감이 석방된 학생들을 데리고 교육청으로 갔다. 훈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고생하였다고 하면서 공부하는 학생이 시위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형식적인 말을 하였다. 정말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고문을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도 않고 마냥 순진하고 말 잘 듣는 학생이 되라고 타이르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으나 교육감이 훈화한 내용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뜻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석방된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갔다. 담임선생님과 윤리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김동호 선생님께서 고생하였다며다 표현하지 못한 동정어린 시선으로 머리만 쓰다듬어 주시며 학업에 열중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학우들은 나를 보더니 용감한 투사라고 반겨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어리기만 하고 철없던 껍질을 벗겨내고 학교에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송원실업전문대학교에 들어가 건축과를 전공한 뒤 군대에도 다녀왔고,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발돋음하고 있다. 아직 취직을 못 했지만 곧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5·18을 통해서 얻은 것은 언제 어디서든 국민들을 무참히 학대하는 정치권력 앞에서는 결코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비록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몰매를 당하여 비가 오면 신경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는 국민의 이익과 안정에 해가 되는 일에는 한 치도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5·18의 주범인 전두환과 그 일당이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있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휘두르도록 내버려둔 것부터 각성해야 한다. 전두환 일당은 광주시민의 원한을 씻어내리기 위해서라도 꼭 처단되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