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부산고전영화마당
 
 
 
카페 게시글
우리 한민족의 역사 스크랩 한국역사 연대표
팔방미인 추천 0 조회 135 13.02.12 1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연표)  v ? d ? e 
선사 (유적)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환인
환웅 (신시)









|


|


|


  고조선 - 단군
진국
삼한

 



 
 
 


 
 
 


   

   



고려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국의 역사(韓國의 歷史)는 구석기 시대 이후의 주로 한반도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1]

선사 시대 [편집]

기원전 4000년 경 빗살무늬 토기, 서울 암사동 선사 유적지 출토

한국의 선사시대구석기 시대 후기로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편집]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70만 년 전에서 약 1만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약 70만년전 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약 4만 년 전에 현생인류가 출현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은, 원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다른 부족들이 유입되었다는 주장, 원주민이 이동 없이 진화하였다는 주장, 원주민과 유입된 주민들이 혼합되었다는 주장 등의 이론이 있다.

중석기 시대 [편집]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2][3][4]

신석기 시대 [편집]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후 후기 신석기시대(기원전 약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사람들의 군집 생활의 유적지가 여러 곳에서 발굴되고 있어 씨족을 중심으로 생활하였고 점차 다른 씨족이나 먼 지역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족사회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가'에 해당되는 특징적인 유적이 없어 국가 형태는 이 시기까지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한국의 첫 국가인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상고 시대 [편집]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청동기 시대 [편집]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단군 왕검에 의해 이른바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이후 한민족의 역사가 첫 장을 열었으며 이 시대를 흔히 고조선 시대라고 부른다.[5]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고조선 [편집]

백두산한민족의 영산으로 자주 언급되며, 고조선의 건국과도 연관되어 설명된다.

고조선(古朝鮮)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성읍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대동강 유역에서 요하 유역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건국 연도 [편집]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 건국 연도가 요임금 즉위 25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임금의 실존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 중에서는 그 때에는 아직 신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들어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7~8세기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기자조선에 관한 논란 [편집]

조선 시대 이전에는 은나라에서 건너온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정식 역사로서 인정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점차 부인되어 현재에는 대한민국북조선의 역사학계 모두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요서 지방에서 발굴되는 이 시기의 유물과 관련하여 기자조선의 성격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있다.

철기 시대 [편집]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6]

기원전 4세기경 한국에 철기가 보급되었고, 특히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 [편집]

위만조선(衛滿朝鮮)은 (燕)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예(濊)나 진국(辰國) 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漢)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를 달래려 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에 분노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했고, 결국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한군현은 고구려 미천왕낙랑군(樂浪郡)과 이후에 설치된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여러나라의 성장 [편집]

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서의 원시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각 나라들은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독특한 사회 풍습을 유지하였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맥(濊貊)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夫餘, 扶餘)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로 구분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라 불리는 부족 사회가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현후 밑에 삼로(三老)가 하호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웃인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가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이 지역에는 진국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 군현 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 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그 결과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마한·진한·변한 등 세 무리의 부족 사회가 생겨, 기원후 3세기경에는 대방군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직접 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국(目支國)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伯濟)가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가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고대 [편집]

한국의 고대는 1세기 - 9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삼국시대 [편집]

황금으로 만든 삼국시대 왕의 허리띠 장식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여러 소국들 중 기원전 1세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세워지면서부터 7세기에 신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각국의 전성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7] 또는 열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삼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토대로 한 전제 왕권 또는 귀족 정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여 태조왕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에서 발전하여 3세기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는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화 되었으며, 귀족회의는 각각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이다. 경제적으로는 물품 경제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분제 경제 체제가 성립되었다.

고구려 [편집]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백제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 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태종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백제 [편집]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8]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과 중국의 요서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일본 규슈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편집]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가야 [편집]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남북국시대 [편집]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통일신라 [편집]

676년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9세기에 들어서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워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중앙 정부에 봉기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삼국 통일로 전쟁이 줄어들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 문화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발해 [편집]

발해의 석판

 

발해(渤海)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696년 영주(榮州)에서 거란(契丹)족의 반란이 일어나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졌다. 옛 고구려의 장수인 대중상(大仲象 혹은 乞乞仲象)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은 이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제2대 무왕(武王)은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정하고,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에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제3대 문왕(文王)은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하였다. 문왕은 영토 확장보다는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문왕은 발해의 수도를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순으로 옮기며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다. 그러나 신라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제10대 선왕(宣王)은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발해 역사상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선왕대에 이르러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大??)에 치세에 멸망하였다. 10세기에 들어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와 당의 문화를 수용한 문화국가였다.

후삼국시대 [편집]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는 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9세기 말)에 들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기에 이르렀고,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 [편집]

고려의 청자칠보투각향로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궁예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70여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다. 한국사에서는 이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9]

전기 [편집]

고려는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자 하였다.

 

거란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하였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고려 사회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가 향상 되어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났으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는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기 [편집]

 

12세기 중반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후로는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한편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결국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10]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새로이 등장한 권문 세족은 불법 행위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과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 기반 마련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고려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왜구와 홍건적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의 이성계정도전을 위시한 신흥 사대부들과 결합하였고,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권문 세족을 압박하는 개혁을 확대하여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조선 [편집]

조선(朝鮮)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11]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중기·후기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전기 [편집]

세종대왕 동상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년, 1400년)이 발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세조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 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중기 [편집]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은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후기 [편집]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의 강력한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이 강화되고 붕당정치의 힘은 약화되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12]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이와 전후하여 서양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었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이 창시되었으나 모두 박해를 당하였다.

말기 [편집]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884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13]

 

일본은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종은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근대 [편집]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로 분류된다.

대한제국 [편집]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1904년 한반도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軍隊害刪)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

일제강점기 [편집]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는 일본 제국(이하 일제)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제1기인 무단 통치 시기, 제2기인 문화 통치 시기, 제3기인 민족 말살 통치 시기로 나뉜다.

1910년대 [편집]

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한편 한일합병으로 국내에서 민족 해방 운동이 어렵게 되자 민족 해방 운동가들은 해외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0년대 [편집]

3·1운동 기념비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그리고 일제는 무단통치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해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의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노동력 양성을 위한 산학과 같은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운동도 탄압하였다.

 

즉, 일제는 조선인을 기만하고 식민통치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다. 결국,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자가 등장하여, 일제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한편 해외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은 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족의 해방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중국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내부의 분열과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 운동은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압록강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국내에서도 노동쟁의·소작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일련의 항일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6·10 만세 사건(1926년)과 광주학생운동(1929년)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신간회를 비롯한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국내외에서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가는 의열단 투쟁도 활발하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 [편집]

김구의 동상.

 

19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경제를 선택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진주만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침체되었던 임시정부의 독립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다시 활발해졌고, 자유시 참변으로 사실상 중단된 무장 독립 투쟁 노선도 1930년대 초반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준비 중에 일본이 항복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현대 [편집]

한국의 영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한반도 이남의 대한민국(남한)과 한반도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으로 나뉘게 되었다.

대한민국 [편집]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복구하고 1960년대 이후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북조선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였다. 광복 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4?19 혁명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었으며,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 졌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같이 보기 [편집]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