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께서 임진왜란 당시
병신년(1596년) 9월 육로로 현재의 무안에서 출발하여
영광, 광주를 거처 화순, 능성, 이양, 보성, 순천으로 순시하셨다.
정조 19년(1795년)에 〈이충무공전서〉 를 편찬하면서,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지금까지도 그리 불리어 지고 있다.
따라서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친필 초고와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일기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많은데,
이것은 초고를 정자로 베껴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했기 때문이다.
일기에는 엄격한 진중생활, 국정에 대한 솔직한 느낌,
전투 후의 기록, 수군 통제전술, 부하들에 대한 상벌,
가족, 친지, 부하, 내외 요인들의 내왕과 편지글 등이 실려 있습니다.
더불어 일기라면 으레 기록하게 되는 신변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번민 같은 것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부인을 생각하며
자식을 걱정한 것도 여러 번 나타나 있다.
이러한 7년의 기록 중에서 지금의 무안지역을
바다가 아닌 육로로 이동 하셨던 병신년(1596년) 9월의 기록이다.
初一日甲午。
灑雨。曉。行望闕禮。早發到石梯院。午後。到靈巖。
宿于鄕社堂。○曺正郞彭年來見。崔淑男亦來見。
9월1일
[갑오/10월21일]
비가 뿌렸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일직 떠나 석제원(강진군 성전면 성전리)에 이르렀다.
오후에는 영암에 이르러 향사당(鄕社堂)에서 잤다.
정랑 조팽년(曺彭年)이 와서 봤다.
최숙남(崔淑男)도 와서 봤다.
初二日乙未。晴。留靈巖。
9월2일[을미/10월22일]
맑다. 영암에서 머물렀다.
初三日丙申。晴。朝發到羅州新院。判官招話。暮到羅州。
9월3일
[병신/10월23일]
맑다. 아침에 떠나 나주의 신원(新院)에 이르렀다.
나주판관을 불러 이야기했다.
저물 무렵에 나주에 이르렀다.
初四日丁酉。晴。留羅州。與體相謁聖
9월4일
[정유/10월24일]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체찰사와 함께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에 절했다.
初五日戊戌。晴。留羅州。
9월 5일(양력10월 25일) <무술>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初六日己亥。晴。
先往務安事。告體相。登途到古基院。羅州監牧官羅德駿。追到相見。
言語之間。多有慷慨。與之久話。暮到務安。
9월 6일 [양력 10월 26일]<기해> 맑다.
먼저 무안의 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무안으로 떠났다.
고기원(古莫院:현 나주시 다시면 고막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나주감목관 나덕준(羅德駿)이 뒤쫓아 와서 서로 만났다.
이야기 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랬동안 이야기하다가 저물어서야 무안에 이르러 잤다.
初七日庚子。晴。
與羅牧官及縣監。論民弊移時。鄭大淸入來云。故請之坐話。
○晩發到多慶浦。與靈光倅話
9월 7일 [양력 10월 27일]<경자> 맑다.
나주감목관 나덕준(羅駿)과 무안현감(남언상)과 함께 민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한참 있다가 정대청(鄭大淸)이 들어 왔다고 했다.
그래 서 그를 청하여 앉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무안을 떠나 다경포(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이르러,
영광군수와 함께 이야기했다.
初八日辛丑。晴。
早飯用肉。而以國忌不食。朝食後。到東山院秣馬。
促馬到臨淄鎭。則李公獻女息八歲兒與其四寸之女,奴水卿。
同到入謁。思想公獻。不勝慘然也。水卿。乃李琰家遺棄得養者也。
9월 8일 [양력 10월 28일]<신축> 맑다.
나라제삿날(世祖의 祭祀)인데도, 조반(早飯)에 고기를 올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동산원(東山院:무안군 현경면 봉오재 옹산원;瓮山院) 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李公獻)의 딸 여덟 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水卿)이 같이 와서 알현했다.
이공헌(李公獻)을 곰곰히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수경(水卿)은 곧 이염(李琰)의 집에서 내다 버렸는데,
(이공헌이) 얻어다가 기른 아이이다.
初九日壬寅。晴。
招僉使洪堅。問防備策。朝食後。上後城。審見形勢。還到東山院。
午後。到咸平縣。路逢韓汝璟。馬上難見。故諭以入來。
縣監以敬差官延去云。金億昌亦同到。
9월 9일 [양력 10월 29일]<임인> 맑다.
임치첨사 홍견(洪堅)을 불러 방비책을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뒷성(後城: 무안 해제 봉대산성)으로 올라가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고 동산원(현재의 봉오재)으로 다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함평현에 이르렀다.
도중에 한여경(韓汝璟)을 만났으나,
말위에서는 만나 보기가 어려우므로 타일러서 함평으로 들어갔다.
함평현감은 경차관을 마중하러 나갔다고 했다.
김억창(金億昌,광산김씨로 해제 매곡마을의 경모재에 배향)도 같이 함평에 왔다.
初十日癸卯。晴。
留宿咸平。食前。務安鄭大淸來。與之話。
縣儒生多有入陳弊瘼。夕。都事入來。與之談話。
9월 10일 [양력 10월 30일]<계묘> 맑다.
함평에서 머물러 잤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무안의 정대청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고을 유생들도 많이 들어와 폐단된 일을 이야기했다.
저녁에 도사(都事)가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十一日甲辰。晴。
朝食。往靈光。路逢辛景德暫話。到靈光。
則主倅敎書肅拜後。入來同話。
9월 11일 [양력 10월 31일]<갑진>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辛慶德)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十二日乙巳。風雨大作。晩出登途。十里許川邊。
李光輔與韓汝璟佩酒來待。故下馬同話。安世熙亦到。暮到茂長。
9월12일
[을사/11월1일]
바람 불고 비가 많이 오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같이 이야기했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에 이르렀다.
十三日丙午。晴。李仲翼及李光輔亦來同話。
仲翼多言艱窘。故脫衣給之。終日話。
9월13일
[병오/11월2일]
맑다. 이중익(李仲翼) 및 이광보(李光輔)도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고 종일 이야기했다.
十四日丁未。晴。又留。
9월14일
[정미/11월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十五日戊申。晴。體相到縣。入拜議策。
9월15일
[무신/11월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十六日己酉。晴。體相發行。自高敞到長城。
9월16일
[기유/11월5일]
맑다. 체찰사가 떠나가서 고창에서부터 장성에 이르렀다.
十七日庚戌。晴。體相與副使往笠巖山城。吾獨到珍原縣。
與主倅同話。從事官亦到。暮到衙中。兩姪女出坐叙久。
還出小亭。與主倅及諸姪。向夜同話。
9월17일[경술/11월6일]
맑다. 체찰사와 부찰사는 입암산성(장성군 북상면 성내리)으로 가고,
나는 혼자 진원현(장성군 진원면)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함께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저물어서 관청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함께 이야기했다.
十八日辛亥。小雨。食後。到光州。與主倅話。
9
월18일[신해/11월7일]
비가 조금 오다. 식사를 한 뒤에 광주에 이르러 광주목사(최철견)와 이야기했다.
十九日壬子。風雨大作。從事官簡及尹侃,荄問簡亦到。
○是朝。光牧來。同朝飯。○午。綾城入來。封庫光牧。體相罷黜云。
9월19일
[임자/11월8일]
바람불고 비가 많이 오다.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 조카 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날 아침 광주목사가 와서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오후에 능성현령이 들어와서, “곳간을 봉사하고 광주목사를 제찰사가 파면시켰다”고 한다
二十日癸丑。雨勢大作。見牧伯登程之際。唐人二名邀話。
故饋之以酒。終日雨下。未能遠行。到和順宿。
9월20일
[계축/11월9일]
비가 많이 오다.
광주목사를 보고 길을 떠나려 할 즈음에 명나라 사람 두 명이
이야기하자고 청하므로 술을 먹였다.
종일 비가 내려 멀리 갈 수가 없어 화순에 이르러 잤다.
二十一日甲寅。或晴或雨。早到綾城。上最景樓。望見連珠山。
9월21일
[갑인/11월10일]
개다가 비오다가 했다.
일찍 능성(화순군 능주면)에 이르러 최경루(最景樓)에 올라가 연주산(連珠山)을 바라보았다.
二十二日乙卯。晴。晩出到李楊院。則海運判官先到。
見我行。欲爲邀話。故與之話。暮到寶城郡宿。
9월22일
[을묘/11월11일]
저녁 나절에 나가 이양원(화순군 이양면 이양리)에 이르니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먼저 와 있었다.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청하므로 그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물어서 보성군에 이르러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