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오늘 이 본문 말씀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소금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는 소재를 사용하여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앞서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9장 30절 이하 전체 맥락에서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여행을 하는 도중에 갈릴리를 지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잡혀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며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날 것을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메시야라고 신앙 고백을 했지만, 아직 그들의 신앙은 여물지 못했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참 도리를 깊이 새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주님의 교훈을 배워야 했습니다.
1.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릴리를 지나 가버나움에 이르러 한 집에 들어가자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물으시기를 “너희가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서로간에 누가 더 서열이 높으냐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세속적인 자기 성취, 자기 영광, 자기 권위를 얻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요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참된 제자 됨의 의미를 모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이르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행하신 일, 십자가에 죽으신 일도 다 낮아져서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존귀하게 높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섬기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짠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삶입니다.
2.관용과 아량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 묻기를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사도의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 믿음을 담대하게 활용했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과 제자들은 그 사람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자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말을 듣자 단호하게 명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를 경계한 말씀입니다. 교파주의, 파벌주의를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비록 같은 소속에 있지 않는다 해도 반대하지 않으면 위하는 자라고 관용과 아량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고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심으로써, 교파와 소속이 달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오늘날 옹졸하게 자기만 옳다는 자만과 편견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를 최고로 여기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된 모습은 소금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비록 교파와 소속이 좀 다르지만 서로 아량과 관용으로 용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며 대접하는 짠 맛을 내는 소금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자기의 죄를 단호하게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보다 자기가 더 잘났다고 주장하거나 자기 소속 외에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배타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이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데 엄격하고 추상같이 행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향하여 철저하고 단도하게 청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이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손과 발과 눈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들이 죄를 범하는 통로가 되거든 단호하게 그것들을 찍어버리고 빼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단호하게 자기의 죄를 끊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눈 없이, 한 손 없이, 한 발 없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의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죄야말로 주님의 제자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 방해꺼리가 없습니다. 죄를 청산하지 않은 채 주님을 따라가는 소금의 삶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르시기를 지옥에서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지옥의 불은 죄에 대한 주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불로 소금치듯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를 피할 길은 지상에서 성도들이 주님의 제자답게 거룩함의 짠 맛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죄를 단호하게 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성도다운 짠 맛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불로써 소금치듯함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소금은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길을 가리킵니다. 섬김의 삶의 짠 맛, 관용과 아량의 짠 맛, 자기 안의 죄를 단호하게 척결하여 거룩함을 지켜가는 짠 맛입니다. 이 짠 맛을 가진 소금을 가져야 합니다. 이 짠 맛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참된 성도 간에 화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섬기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옹졸한 교파주의를 버리고 품으십시오. 형제 안에 티를 빼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 안에 들보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단호하게 찍어내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는 짠 맛을 잃지 않을 것이요 참된 화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여기 저기서 내가 더 크냐고 다툼의 소리가 높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날선 정죄의 심판을 내리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자기의 안에 들보가 있는데도 남의 티를 빼내려 덤벼들곤 합니다. 이러다가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길가에 버려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소금의 짠 맛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짠 맛을 묽게 만드는 우리 안에 더러운 찌기들을 씻어내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피와 성령으로 순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점점 성숙해지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