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 시대의 추락
류 근 만
지난 연말에 지인들과 송년 모임이 있었다. 모두 은퇴 후에 만난 사람들이다. 분기별로 만나는 사이니 언제나 모이면 할 말이 많다. 살아온 길이 각기 다르지만, 호흡이 잘 맞는 사이다. 대기업에서 근무한 사람도 있고, 연구원, 공무원, 농업종사자 등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언뜻 보아서는 이질적이지만 이심전심 통하는 데가 있다.우선 터놓고 얘기하기 편한 나이들이다.
우리 일행은 식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홀이 제법 넓고 식사 손님도 많다.그러나 대부분은 계모임으로 온 여성들이다. 남자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우리 옆자리에 여섯 명의 부인네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잠시 후 음식을 주문했다. 우리는 음식의 질(質)보다 양(量)을 택했다. 술안주가 푸짐하고 식사는 반반이다. 소담스럽게 차려진 반찬이 식탁을 가득 메웠다. 질보다 양을 선택했으니 옆 사람들 눈치가 보인다.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도 된다. 그러나 바로 옆자리 여성 식탁을 보니 우리와 반대다. 적은 양에 깔끔한 다이어트식이다.양보다 질을 택한 것 같다. 음료수도 소주가 아닌 포도주다.가격은 개의치 않고 있으니 품격이 있어 보인다.
그때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문득 억울함을 호소한다.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평생을 몸 바쳐 일한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참담하다고 한다. 일할 수명 다했다고 직장에서 나왔는데 집에서 대접받지 못하면 어쩌란 말이냐면서 분개한다. 그 말에 우리 일행은 모두 귀를 기울인다. 집안에서 아내의 지청구를 한 번쯤은 받아 본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이다.
물론 아내들이 투덜대는 말도 일리는 있다. 하숙생 같은 남편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밥해주고 뒷바라지하느라 일생을 고생했다. 자식 키우면서 쥐꼬리 월급에 생활하느라 곱던 얼굴에 주름진 것도 알고 있다.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날로 변해가는 현상에 적응하기가 두렵다고 넋두리하는 것이다. 모두 성실하게 살아온 건 확실하지만 평생 외길만 걷다 보니 은퇴 후 변화된 생활에 적응하기가 너무 낯설다는 표정들이다.나 역시도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색하다. 마땅히 나갈 곳도 없으니 답답
한 것이다. 이제는 나이 들어 돈도 못 버는 백수라고 무시당하는 기분이고, 집에 있는 것조차 눈치가 보이고 가시방석이란다. 나도 스스로 돌아보면서 씁쓰름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신세 한탄을 들으면서도 어느새 생태탕은 바닥이 나고, 빈 소주병만 널브러져 있다. 옆자리에서는 연신 남편들 흉을 보는지 빈 접시가 덜그럭거린다. 그녀들은 삐쭉거리고 히죽거리는 자세가 마치 우리에게 많이 거슬려 보였다.
요즈음 나이든 은퇴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나오는 신세타령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여성의 힘이 세지는 현실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면에서 여성의 힘이 세지고 있다. 그 중심으로 파고들면서부터 남성들이 못 따라가는 것이 많아졌다.
대학교에서도, 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여성의 성적이 앞선다고 한다. 공무원시험에서도 대기업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각급 사회활동도 여성의 리더가 약진하는 추세다. 올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 소설집을 구할 수 있었는데 남성이6명인데 비해 여성은 20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남성의 기세는 추락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현실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남성 중심 문화가 추락하는 중이다.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상위시대가 오는 것이다. 경제 활동 면에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한다. 남성들이 손과 발을 움직여 힘으로 하는 시대는 점차 시들해진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감성 시대가 여성으로 쏠리는 것이다.
요즘 남성들은 세상이 여인 천하로 바뀌었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에 더해 한 친구가 <남자의 종말>을 아느냐고 묻는다. 가부장적인 남성 시대는 끝나고 여성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내용이다. 직장에서 여성 상사를 모시고 집안에서 아내가 가장 노릇을 하는 것은 보편화 된 일상이라고 한다.
옆자리 여성들은 우리 남정네들 넋두리를 흘깃흘깃 곁눈질하고 있다. 그녀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볼썽사나운 꼴이 괜스레 여성들 입방아에 양념이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바닥이 드러난 냄비에 애꿎은 육수만 추가시킨다. 썰렁하게 식은 밥그릇에 우리는 육수를 부어 배를 채웠다. 그동안 남성들이 호의호식했다면 운 좋게 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도 우리 세대는 아내 덕분에 더운밥 얻어먹고 잘 산 세대다. 지금 젊은 사람들, 자식 세대에 비하면 대우받으면서 잘 살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새해의 힘찬 출발을 소망하는 ‘송년 모임’에서 우리 일행은 검은 토끼의 해를 맞아 ’힘차게 달려보자‘ 는 덕담과 함께 마지막 잔을 들고 “중 꺽 마”를 외치고 헤어졌다.
오늘따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매년 맞이하는 연말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다.사람 사는 도시가 활력이 없고, 길거리에는 젊은이보다 노인들이 더 많아 보인다.몇 년째 계속되는 코로나와 경기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지금까지 운 좋게 살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세상 흘러가는 대로 아내의 소중함을 알고,시대의 흐름에 순응해야겠다.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커피도 내가 끓여 같이 마셔야 하겠다.몸에 익숙지 않아 서툴지만 배우면서 잘하자고 다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