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전투를 마치고 방어전에 들어갔다. 그때만 하여도 선선한 일기에 말단병들은 그냥 식사당번 근무만을 주야로 겄다. 그러던 중에 어떤때는 나무 위에 올라 보초를 서다가 그만 잠이 들어서 그높은 데서 떨어져 본적도 한두번이 아니며, 정찰수색 등을 하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당하기도 하고, 한번은 우리 분대가 그들의 벙커를 파괴하라는 명을 받아 한길이나 되는 강원도 산골의 찬물을 건너올라가다 죽은 듯 고요하여 다 자고 있나하여 약 50m쯤 떨어져 수류탄을 던지려는 찰라, 이놈들은 (우리가) 가까이 오길 기다리다가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가랑이 밑으로, 귀를 스치고, 머리위로 황내를 내며 스쳐가는 실탄에 대원들은 모두 부상을 입고 나만이 무사고로 돌아오면서, 또한 산골 물이 불어서 건너는 도중 떠내려 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건너왔다. 그러나 다행이 다치긴 했지만 죽은 전우들은 없었다.
이리하여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고 또한번은 야간기습을 나가다가 아군지뢰를 모 대원이 밟아서 일개 분대가 전부 쓰러져 “아이고 아이고‘ 신음을 했는데, 나도 얼결에 쓰려졌으나 아픈데가 없어 괜찮은가 보다 하고 일어나니 분대장 이하 8명이 부상을 입고 나를 포함하여 2명이 무사고였다. 이리하여 운명이란 그리 물렁물렁 한 것이 아니라고 깨닫았다. 나는 우선 분대장을 업고 올라오려니 깍은 듯한 절벽에 눈이싸여서 빙판이되어 몇 번이고 분대장을 업은채 나동그라지며 간신히 올라오니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분대장은 등에 파편을 맞고 당시 대원들이 전부 후송되어 쓸쓸하게도 둘이 남았다. 이리하여 신병 해병 10기생이 들어와서 우리 분대에 3명의 보충병이 왔다. 그러나 근무하면서 몰골은 형편없었다. 몇일에 한번 세면을 할똥 말똥했고 옷은 몇일에 한번 벗어서 갈아 입을 정도였다. 신발은 보통 15일에서 20일씩 벗지 못하며 살다보니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를 보고 선임하사관이 불쌍하였던지 마침 인민군이 우리 후방에 넘어왔다는 말을 듣고 우리소대에선 나를 보내어 5중대에서 5명이 후방 대대본부 일을 하게 되었다. 그곳은 사회생활과 같았다.
그곳의 노무자아저씨들하고 부락에 나다니며 집집이 수색이나 하며 식량과 여러가지 부식등을 구해다 먹었다. 아저씨들이 기술이 좋아 술을 해놓는다, 두부를 한다. 떡을 한다 하여 저녁마다 술, 떡, 두부등 여러 가지 반찬을 먹으며 30일동안 있으니 나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간 강냉이 팥, 밤같은 것은 분대장이나 선임하사관에게 올려다 주어 여러 전우들도 역시 잘 먹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다시 복귀하여 올라가니 누군지 구별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살이 많이 찐탓일 것이다.
이렇게 근무중 어느 하루 보초망에서 근무는 서는데 눈비가 마구 떨어져 물이 무릎까지 고였다. 이곳에서 무릎까지 고인 물이 얼는 중 모르고 나는 잠을 잤던 것이다. 이후 몇시간이 경과하였는지 꽁공 얼어붙어서 발을 뺄수가 없었다. 아침에 다른 전우들이 와서 얼음을 깨고 겨우 꺼내주었다. 이런 뒤 분대장에게 매도 많이 맞았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잠을 잔 것은 근무태만이라는 것이었다.
이후 2일이지나자 발 전체에 심한동상이 걸렸다. 결국 미국병원으로 후송을 가게 되었다. 한국병원에서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병원에서는 다행히 절단하지 않고 치료를 하게되었다. 이때부터 최전방을 떠나 연대본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병이 완치되어 본부중대로 와서 연료창고를 맡아 근무중 4253년(1952년) 해병대가 서부전선으로 오게되어 연대본부에 근무하였다.
이리하여 전선에 생활을 마치고 후방을 저멀리 진해까지 오게 되었다.
참고) 해병대 8기 고 류성한 선배님의 아들이신 류길용님이 보내 주신 메일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