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한라산(漢拏山) 등정(登頂)
제주도 지도 / 한라산 백록담 / 제주 한라산 전경 / 울릉도 도동항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이니 1969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여행을 좋아하던 나는 혼자 배낭 하나 달랑 짊어지고 무작정 제주도로 향하였는데 처음 타보는 여객선이 낯설고 신기했다.
뱃머리 앞을 달려가는 돌고래 떼를 보며 신기해하던 무렵 제주도가 보인다는 환호성에 눈을 돌려보니 아득히 한라산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홀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너무나 기분 좋았다.
제주항에 내려서 성판악(城板嶽)으로 오르는 시내버스 정류장 가장 가까운 여인숙에 짐을 풀었다.
저녁으로 먹으려고 마루 밑에서 라면을 끓이며 보니 주인이 열심히 바둑책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두십니까? 심심한데 저하고 한 수 하실까요?’ ‘잘 두지 못하는데... 손님은 몇 급 정도 두십니까?’
‘예..., 한 3급 정도...’ ‘저도 바둑을 좋아하긴 합니다만 제 실력으로는 안되겠고... 저녁 드시고 저랑 같이 가시면 좋은 바둑친구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라면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주인을 따라 어둑한 골목길을 더듬어 갔다. 한참 가다가 보니 골목이 넓고 훤해지는데 커다란 한옥의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넓은 대청마루와 높다란 사랑방에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열댓 명 남짓 있었는데 바둑판이 세 판이나 벌어져 있고 열심히 바둑을 두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데리고 간 여인숙 주인이 그중 깨끗한 모시 한복으로 차려입은 점잖아 보이는 50대 어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우리 집에 손님으로 묵는 분인데 서울에서 3급을 두신다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나도 덩달아 주인에게 꾸벅 인사를 올리자 주인은,
‘아, 그러시면 저 사람과 한 번 두어 보시지요. 호선(互先/맞수)으로 흑을 잡고 두시면 될 겁니다.’
사람들은 두던 바둑을 대충 치우고 빙 둘러앉아 우리 바둑을 관전하는데 40대 초반의 상대방은 바둑이 상당히 깐깐하였다. 기차와 배를 타고 긴 시간 여행을 한 탓인지 머리가 어찔거리고 수도 잘 보이지 않는다. 종반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십여 집 모자란다. ‘졌습니다. 저보다는 훨씬 위로 보이는데요....’
주인은 나를 건너다보며, ‘예, 손님은 제주도 칫수로 한 4급 두시면 되겠습니다. 제주도 바둑이 좀 세지요.’
이튿날 새벽 첫차로 성판악에 내리니 아직 너무 이른 탓으로 부근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이 부스스 눈을 비비며 텐트에서 나오기도 하고 쌀을 씻는 사람들도 보인다. 안내판을 보니 정상까지 4시간이란다.
걷는 데는 자신이 있으니 3시간이면 되겠지...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찬 이슬을 털어내며 혼자 산을 오르는데 수풀 속에서 커다란 말 두 마리가 나를 넘겨다보다가 푸르르 콧소리를 내며 덤불 뒤로 사라진다. 구상나무밭 근처에서 등산객을 만났다.
제주도 토박이들인 모양인데 그중 한 아가씨가 말을 건넨다. ‘뭍에서 왔쉬까?’ 나중에 곱씹어보니 이런 말인데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예? 뭐라고요??’ 되물으니 얼굴이 빨개지며 육지에서 오셨냐고....
그 사람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는데 쉬지도 않고 계속 빠른 걸음을 한 탓인가 힘이 빠지고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시계를 보니 꼭 세 시간을 걸었는데 어디쯤 왔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길옆 풀 위에 앉아 참외를 하나 깎아 먹으며 쉬는데 졸음이 몰려와 눈을 뜰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쓰러져 눈을 감았는데 잠이 들었나 보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웅얼거림이 들리는데 일어날 수가 없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뜨니 눈앞에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고산이라 위로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눕듯이 자란 관목들 위로 구름인지 안개인지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다가는 다시 햇살이 나면 아득히 펼쳐 보이는 수많은 오름들, 그리고 바다와 제주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더니 곧바로 정상의 분화구 백록담이니 정상 바로 밑에서 잠들었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꼭 네 시간...
백록담 분화구로 내려가니 작은 초막을 지어놓고 빵이며 과자 나부랭이를 판다. 시중보다 세배쯤 비싼가 보다. 크림빵 두 개를 사서 요기를 하고는 곧바로 서귀포 쪽을 향하여 무작정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을 몰라 다른 팀에 어울려 내려왔는데 그중 한 20대 초반의 남자는 혼자 온 모양인데 등산복 차림이 아니어서 물어보았더니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하는 중으로 제주에 자전거를 맡겨놓고 한라산을 올랐다고 한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다.
서귀포에서 1박하고 다음 날 저녁, 배를 타려고 바로 제주항으로 왔는데 승선하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무심코 배에 오르는데 누가 내 어깨를 턱 잡기에 힐끗 돌아다보았더니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이 내 허리띠를 잡고 풀어 놓으란다. 당시는 군용 허리띠(단검을 꽂을 수 있고 탄통도 찰 수 있는... X-반도라고 함)가 유행이라 나도 동대문시장에서 하나 구했었는데 군용(軍用)이라고 압수란다.
말도 없이 풀어주고 돌아서면서 보니 다른 사람들은 한 번 만 봐 달라고 사정하고.... 난리다.
그 후 한 10년쯤 지난 후 우연히 형님이 운영하는 회사의 산악팀과 설악산 등산의 기회가 생겼다.
아침에 버스로 내설악 용대리까지 가서 수렴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오르는 코스인데 무척 긴 코스이다. 오후에 도착하여 오르기 시작했는데 입산통제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때가 가까웠는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웬일인가 살펴봤더니 늦어서 입산이 허락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르게 해 달라고 사정도 하고, 인근에서 자고 아침에 올라가려고 텐트를 치는 팀도 있는데 우리는 한국산악회 소속이라 회원증을 보여주었더니 입산을 해도 좋다고 한다.
다른 팀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우리가 통제소를 통과하는데 갑자기 30대 중반의 한 여자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일행인 듯 행동하며 눈감아 달라고 눈을 끔적인다. 결국, 우리와 같이 입산을 했는데 이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이 어려운 코스를 택하다니 등산에 미친 여자인가보다.
한참 오르다가 내 옆에 다가오더니 한 10년 전에 제주도를 다녀온 적이 없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했더니 나를 알아보겠단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제주항에서 배를 탈 때 헌병이 군용품을 압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정도 하고, 뺏기는 것이 아쉬워 어쩔 줄 모르는데 나는 X-반도를 선선히 풀어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란다. 뭐 저런 사람도 다 있나... 하면서 뇌리에 남았다나...
별 걸 다 연관 지어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기억나는 것이겠지(^^)...
그 여자는 그렇게 산과 결혼하고 전국 산을 오르며 혼자 산단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그렇게 산과 함께 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