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도산서원 이황 왕버들
퇴계 이황을 뵈러 경상북도 안동의 도산서원을 찾는다. 강원도 태백 황지연못을 나온 낙동강이 경상북도로 들어와 봉화군 청량산을 지나면 곧 안동시 도산면이다. 낙동강이 여기서 잠시 안동호라는 이름으로 쉬어가니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물길이 강이라기보다는 호수이다.
다행히 서원은 수몰되지 않았으나 ‘시사단(試士壇)’은 처음 자리에서 10m쯤 뜀뛰어 올랐다. 거꾸로 6백여 살 왕버들 두 그루는 본의 아니게 아랫도리에 흙 옷을 입고 키가 10m쯤 줄어들었다.
1792년 3월이다.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도산별과로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라고 했다. 1796년 영의정 채제공이 그 특별과거를 치른 자리에 기념 글과 함께 세운 비석이 바로 ‘시사단’이다. 당시 급제 2명 등 14명을 선발했고, 현재의 비는 순조 24년인 1824년 비각을 새로 짓고 글도 다시 새긴 것이다.
이 시사단을 바라보는 도산서원 앞마당의 두 그루 신비로운 6백여 살 왕버들이 있다. 이황의 생애가 1501부터 1570년이니, 주인은 물론 서원을 드나든 인물들을 지켜본 나무이다.
조선조는 송나라 유학인 성리학을 받아들여 억불숭유 정책을 폈다. 이때의 유학자 중 건국 공신을 훈구파라 한다면, 이들에 밀려 향토에서 실력을 기른 학자들이 사림파이다. 이들이 성리학의 ‘이기론’을 연구하였는데 ‘이’는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이고, ‘기’는 그 원리가 현실에 나타나는 방식과 구체적인 모습이다.
중종 때의 학자 서경덕은 ‘이’와 ‘기’는 하나이며, 현실에 드러나는 것은 ‘기’뿐이라고 했다. 현실은 기의 움직임이며 기에 따라 현실도 변한다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이황은 ‘이’는 하늘의 뜻이고 본성이라 했다. 또 본성이 아닌 사악함은 ‘기’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가 나와야만 기도 작용한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이다.
이이는 ‘이’는 모든 사물의 근원이고 ‘기’는 그 그릇이라 했다. 둥근 그릇, 모난 그릇의 물 모양이 달라도 그 속성은 같다. 그리고 ‘이기’는 한 몸이나 또 각기 존재한다. 따라서 현실인 ‘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했다. ‘이기이원론’의 ‘개혁론’인 것이다.
조선시대 붕당의 동인은 궁궐 동쪽에 사는 김효원, 서인은 궁궐 서쪽에 사는 심의겸이 당수이다. 나중에 서인은 노론과 소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데, 김효원은 이황에게 배웠고 심의겸은 이이와 성혼에게 배웠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의 학파가 붕당 때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이황은 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망했고 이이는 붕당을 막기 위해 가장 노력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황은 조선의 사상을 확립한 위대한 스승이었고, 오늘에도 그의 가르침은 유효하다. 특히 우리의 현실은 자본주의를 넘어 자유시장 경제가 새로운 사회 계급이 되어 중세 봉건 노예제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되었다. 빈익빈 부익부, 갈등과 분열의 현상이 심화되었다. 공정과 부정, 불의와 정의가 구별되지 않는 모순의 세태는 희망 대신 절망과 고통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우선이 아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궤변의 ‘이’는 법과 원칙이란 사악함이 되어 걸핏하면 압수수색, 구속영장이란 억압과 공포의 ‘기’가 되었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훈계는 그만두더라도 이러한 때에 이황, 이이, 서경덕 등의 스승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올해도 이황이 좋아한 매화가 도산서원에 가득 피어 봄을 맞고, 모란에게 여름을 이어준다. 도산서원을 나오며 큰 스승 이황에게 바람에 휘날리는 왕버들보다 더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