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龍門寺)
20230919
용문사(龍門寺)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신라(新羅) 신덕왕(神德王) 2년(913)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며 일설(一說)에는 경순왕(敬順王(927~935 재위)이 친히 행차(行次)하여 창사(創寺)하였다고 한다. 고려(高麗) 우왕(禑王) 4년(1378) 지천대사(智泉大師)가 개풍(開豊) 경천사(敬天寺)의 대장경(大藏經)을 옮겨 봉안(奉安)하였고 조선(朝鮮) 태조(太祖) 4년(1395) 조안화상(祖眼和尙)이 중창(重創)하였다. 세종(世宗) 29년(1447)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母后)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위하여 보전(寶殿)을 다시 지었고 세조(世祖) 3년(1457) 왕명(王命)으로 중수(重修)하였다. 성종(成宗) 11년(1480) 처안(處安)스님이 중수(重修)한 뒤 고종(高宗) 30년(1893) 봉성대사(鳳城大師)가 중창(重創)하였으나 순종(純宗) 원년(元年)(1907) 의병(義兵)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日本軍)들이 불태웠다.(放火). 1909년 취운(翠雲)스님이 큰방을 중건(重建)하였으며, 1938년 태욱(泰旭)스님이 대웅전(大雄殿), 어실각(御室閣), 노전(爐殿), 칠성각(七星閣), 기념각(紀念閣), 요사(寮舍), 일주문(一柱門)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팁(佛舍利塔), 미륵불(彌勒佛)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權近)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기국사(正智國師) 부도(浮屠) 및 비(碑)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龍門寺 銀杏나무)
천연기념물
용문사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1,199살 이상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42m이고, 뿌리 부분의 둘에는 약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래되었다. 나무줄기 아래쪽에 혹처럼 큰 돌기가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이가 많은 나무 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약 350㎏ 정도의 열매를 맺는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오래 된 만큼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었다고 하며, 시나의 마지막 태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한다. 나라에 재앙이 있으면 용문사 은행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다고 전한다. 조선 고종이 세강을 떠났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정미의병 때(1907)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으나 용문사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아 용문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 불린다.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龍門寺 金銅觀音菩薩 坐像)
보물
양평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 좌상은 14세기 제작된. 앉아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관음보살상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베풀며 고통을 없애 주는 보살로,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보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 좌상은 볼에 살이 있는 네모난 얼굴,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가슴과 양 무릎 위에 표현한 구슬 장식(영락) 등 고려후기에 크게 유행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금동 보살상의 전형적인 요소를 보여 준다. 특히 왼쪽 가슴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긴 삼각형 모양의 내의 장식은 이 보살상의 특징으로 꼽힌다.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 좌상은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신체와 정교한 세부 표현이 돋보여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의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