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아주 머리가 둔한 아이가 있었는데 ‘천지현황’을 삼년 동안 꾸준히 익혔단다. 그래서 나중에 문장을 지었는데,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삼년독(三年讀)하니 언재호야(焉哉乎也)를 하시독(何時讀)고.’라고 했단다. 너도 그러면 된다. 책 덮고 나가 놀아라.” 김성동 작가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김성동천자문』에 적은 내용이다. 김성동 작가가 전하는 얘기처럼 옛날 서당에서는 노력해도 발전이 없는 사람을 나무랄 때 ‘언재호야를 언제나 읽을 것인가[焉哉乎也何時讀]’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 사례가 『홍재전서』에도 보이는데, 정조는 활쏘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주서 이홍달(李弘達)을 질책하며 『천자문』의 마지막 구절인 '언재호야(焉哉乎也)'를 인용하였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사자성어 250구로 된 『천자문』은 ‘천지현황’을 시작으로 ‘언제호야(焉哉乎也)’에서 끝이 난다. ‘천지현황’은 『주역』 건괘 문언에서 따온 것이다. 이와 대를 이루는 ‘우주홍황’은 『시경』과 『법언』의 어휘를 빌려 왔다. 이렇듯 『천자문』의 글귀는 옛 문헌에서 차용한 게 많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은 ‘언재호야’는 특별한 의미도, 출처도 따로 없다. 그저 뜻 없는 허사 4개를 나열한 데 불과하다. 『천자문』의 1000개의 글자 가운데 두 번 쓰인 것은 하나도 없다. 네 자의 성어로 대구(對句)를 이루는 문장을 만들면서 모두 새로운 글자를 사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죽했으면 『천자문』을 다 짓고 난 뒤 주흥사(周興嗣)의 머리가 하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올까. 그래서 마지막 구절은 뜻글자를 찾지 못해 뜻이 없는 어조사 4개로 마무리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마무리를 장식하는 구절이라고 해서 중국의 서화가들은 낙관에 쓰는 인장에 ‘언재호야’를 새긴다고 한다. 그러나 ‘언재호야’와 같은 어조사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쓸모없는 글자일 수는 없다. 영재 이건창, 매천 황현과 함께 한말 3대시인으로 꼽히는 창강 김택영은 어조사를 제대로 쓸 때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말한다. 창강은 “지극히 묘한 신비한 이치가 어조사에 있다”며 『상서』나 『주역』보다 『사기』의 문장이 뛰어난 것은 사마천이 다양한 어조사를 적재적소에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 어조사는 실사와 함께 문장을 이루는 양대 축이다. 창강의 말처럼 한문이 후대로 전해오면서 어조사의 쓰임새는 더욱 풍부해졌다. 청나라의 학자이자 외교가였던 마건충(馬建忠)은 『마씨문통(馬氏文通)』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장을 짓는 법도는 허사와 실사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실사는 문장의 뼈대이고 허사는 그 성정이다.[構文之道,不外虛實兩字. 實字其體骨,虛字其性情也.]” 또 청나라 어문학자로 『조자변략(助字辨略)』을 쓴 유기(劉淇)는 한문의 미묘한 의미는 어조사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는 허사의 기능은 결코 허(虛)하지 않다며 허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문과 중국어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인 한문 교육은 암송에 크게 기댄 나머지, 문법이나 문장의 구조 등에는 등한시해 왔다. 어조사는 ‘토씨’, ‘이끼’라고 부르며 문장의 흐름을 조절하거나 암송하기에 편리하도록 붙이는 뜻 없는 글자로 치부해 왔다. 그러나 창강 김택영이 말했듯이 언, 재, 호, 야의 글자를 어조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말해서는 안 된다. 어조사의 각각의 글자에는 ‘지극히 묘한 진리’가 들어있다. 이를테면 ‘언(焉)’은 조사 뿐 아니라 대사(代詞), 전치사, 접속사의 용법으로 쓰이고, ‘재(哉)’는 감탄, 반문, 의문, 추측의 뜻을 나타내는 어조사이다. 또 ‘호(乎)’는 의문, 감탄을 표시할 때 주로 쓰이고, ‘야(也)’는 문장 말미에서 진술과 종결을 표시할 때 자주 사용된다. 『천자문』은 문장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기실 한자를 익히는 초학서이다. 주흥사가 언, 재, 호, 야 네 글자를 『천자문』의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한자를 익힌 다음에는 한문으로 나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어조사는 한자 학습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글자일지 몰라도, 한문이나 중국어 문장을 익히기 위해서는 정확히 알아야 할 글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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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읽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