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토요동인회에 관여했던 분들은 서울이 수복되고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는 등 전쟁이 끝날 무렵 모두 제 자리로 돌아 갔습니다.정연길시인.진이수시인과 음악을 전공한 김순세등이 서울과 인천등 제 자리로 복귀하고 일부는 남아서 터잡고 살게도 됐습니다만
군산에선 일자리가 많지 못해 문예방면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그 때 군산여고 교장 권오동.전북상대 교수 고 헌.군산전매서장 이기원.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던 한전지점장 김병석.개정병원 약국장 이 주완,호남제분에 종사하던 유상은,사범학교 국어교사 김기경.군산여상 국어교사 김봉렬,이향아.황자금등이 참여하는 유지운동으로 당초의 회원이던 정윤봉, 김순근,이병훈,원용봉,김신웅등이 맥을 이어 갔던 것입니다. 앞에 참여했던 원형갑은 문학평론으로 당대 평론계의 거목인 조연현의 추천으로 평론가가 되어 서울로 떠났고 김동빈(김철화)도 서울로 올라가 금호동에 가구공장을 하며 한국초유의 "호마이카"가구를 만들었는데 주문가구만 만들만큼 유명했습니다.그 전에 고 은은 이미 항만에서의 투신자살에 실패하고 출가하여 효봉스님의 산방에서 선문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기도 했습니다.시화전이거나 음악감상을 겸한 시낭송모임이 전부이던 때 고등학생복을 입고 참관하러 다니던 채규판(신춘문예를거쳐 원광대 교수로 은퇴),박춘휘(대전,서울을 거치며 사업에 종사하고 월간 <문예사조 주간을 지냄>.이만철(지방언론계에 종사하다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지낸 것으로 알고 있음),이원철(한전은퇴,분당거주),김종천(국민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에서 사업하며 한국문인협회 간사,그 뒤 포스트모던 발행인)김봉렬(은퇴후 서울거주)가 있고 옥구출신으로 문효치(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한국문협 이사장)이 있습니다.비둘기 다방이 주로 모임을 갖는 곳이었지만 다른 행사와 겹치게 되면 중앙로 시청 앞에 있던 전원다방에서 시화전등을 열었는데 주인 내외가 피아노를 내어다 놓고 이른바 생음악?을 들려 주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뒤의 군산에서의 문단 인맥은 당초 선배들이 다리?를 놓지 못해(토요동인들 거의가 추천제도를 일본의 잔재라고 거부하는 상태였음:미술계에서는 국전 반대운동을 펴기도 했음)) 위축되어 가는 듯 하다가 세속?을 따른 추천 및 등단 형식을 통해 군산사범 문예부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양금,출가했다 시인으로 환속한 이복웅(전 문화원장)등과 외항개발에 따른 산업화로 외지에서 유입된 문학인들이 군산의 문화예술을 지켜가며 발전시켜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