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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도행전 16 : 6 - 10
제목: 성령행전
일시: 2010. 4. 2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지난 주에는 이슬람선교정책세미나를 했다. 세계 각 대륙 나라의 대표적인 24명의 시니어선교사가 참석했다. 교우들의 협력과 기도로 모든 것을 다 잘 마치고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아이슬랜드 화산이 터진 것이다. 그 화산으로 유럽의 공항이 마비되고 예정된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소위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머물렀다. 화산 하나 터진 것으로 세계가 올스톱 되어버리고 모두들 전화나 메일로 계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기에 바빴다. 하나님께서 화산을 뿜어 먼지를 일으키시니 우리의 수많은 계획이 하루 아침에 변경될 수 밖에 없었다.
강사로 온 이현모교수님은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주례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할까를 생각 중이었다. 왜냐하면 화산재로 인해 비행기가 뜨려면 몇 일이 걸릴 수도 있지만, 어떤 방송에서는 심하면 몇 개월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견도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민도 몇 일! 그 결혼주례를 해 주어야 할 형제에 대한 비보를 들었다. 그 형제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원래 아픈데도 없이 건강했다는데! 아이슬랜드의 화산재로 결혼식 주례를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신랑될 형제가 갑자기 죽어서 결혼식을 못하게 되었으니 이런 황당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는가? 그 신부될 사람은 이미 웨딩드레스도 다 맞추어 놓았을텐데... 이미 결혼식 청접장도 돌리지 않았을까? 신혼여행 계획은 어떻게 하고 그들이 얻어 놓은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살아생전에 아들을 결혼시키고자 서둔 결혼인데... 더구나 이 아들은 카이스트에서 로봇박사이니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드는가! 우리의 계획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허무한가?
II. 애를 쓰는 것은 대화의 방법이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가 된 다음에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하는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도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애를 썼다. 그래서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를 지나 비두니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자 했다. 성령께서 그 길을 막자 마케도냐로 떠나기로 힘을 썼다. 사도바울의 삶과 사역은 최선의 삶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핍박하던 시절이나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하는 때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사도바울은 사역 말년에 꼭 방문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로마의 교인들이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본인이 직접 개척한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교인들을 꼭 보고 싶어 했다. 그가 전했던 복음을 듣고 이리 저리 흩어진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 당시 세계의 중심인 하우프트스타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몹시 보고 싶었다. 로마서 1장 11절에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면서 그들을 보고 격려하고 서로 믿음의 교제를 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를 방문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히 길이 막혔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롬1:13)
바울이 이전부터 늘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가기를 꿈꾸어 오던 선교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바나, 즉 스페인이었다. 그는 서바나로 전도여행을 하고자 이미 여러해 전부터 원했고 계획 했다. 서바나는 당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는 지구의 끝 땅끝이라고 생각했다.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사도바울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대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여러해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나름대로 멋진 계획을 세웠다. 서바나를 최종목적지로 하고 그 가는 길에 로마교인들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통해 만족함을 얻은 후 그들의 후원을 통해서 서바나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획을 세우라. 세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애를 써라. 뭔가 시도를 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맡긴다고 할 때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대책 없이 맡겨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 감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생길 때가 많다. 우리는 계획해야 한다. 우리의 계획이 계획된 대로 진행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도바울의 아시아 선교가 막히고 로마 방문계획이 막혔던 것처럼 말이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애를 쓰는 것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방법이었다. 우리는 애를 쓰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애를 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힘이 다 빠져버리고 더 이상 저로서는 나갈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라는 한계에 도달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애를 쓰면서 성령이 허락하지 않음을 알았다. 아시아선교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III. 하나님이 풀리게 하시면 풀리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첫 선교사이다. 선교하면 정책, 전략, 여러 기술 등을 가질 수 있지만, 바울의 선교전략은 성령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바울의 선교전략을 말하지만, 그는 선교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선교학 박사인 D.Miss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직 성령에 따라 움직였다. 7절을 보라. 그가 아시아에서 선교하고자 하나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심을 깨닫는다. 9절을 보라. 마케도냐 환상을 본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는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것을 인정했다. 사도바울은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이른다. 거기서 기도처가 없을까 하여 알아보던 차에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부터 빌립보교회가 생기게 된다. 성령께서 허락하여 풀어주시면 그렇게 풀려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희안한 방법으로 풀어나가신다. 그렇게 로마 교인들을 보기 원했던 사도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 방문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바울은 자유인의 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몸으로 가게 된다. 그것도 계획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원치는 않았고 사도바울의 계획에 들어있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에서 체포되는 것은 로마로 가는 이체에를 타는 것이었다. 그는 배표를 사지 않아도 되었다. 그를 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있었지만 오히려 군인들이 보호를 한다. 로마에 가서 호텔에 머물 필요가 없다. 요즈음 로마에 가면 민박이 많은데, 그는 정부에서 주는 호텔에 머문다.
죄수로 가는 것 역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큰 기회였다. 사도바울은 굳이 자기가 찾아가지 않아도 정치인이나 종교계의 지도자들을 다 대면할 수 있었다. 바울은 유대제사장들과 온 공회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벨릭스총독 앞에서도 서게 되고 이후에 가이사에게 서게 된다. 그냥 로마에 갔으면 어찌 왕 앞에 설 수 있었겠는가? 그가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사기꾼 같은 파렴치범으로 황제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소동하게 한 그 복음을 인하여 섰으니 그가 말하는 것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복음으로 인한 죄수가 됨으로 아주 사람들을 전도하게끔 불러 모은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아닌가!
그리고 사도바울은 로마 옥에 있으면서 서신을 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빌립보서이다. 그것을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결국 로마에서 순교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애를 썼지만, 자신의 노력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그것은 성령과 나누는 대화였을 뿐이다. 그는 그의 최선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할 때는 멈추어 섰다. 환상이 보이고 성령의 감동이 올 때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였다. 그는 성령이 막으면 멈추어 서고 성령이 허락하면 나아갔다. 서라하시면 서고 가라하시면 가는 성령전략이었다.
IV.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실, 학자들은 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가지 아니하고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면 유럽으로 복음이 흘러가기 전에 소아시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극동아시아로 와서 일본 미 대륙을 통해 복음이 거꾸로 돌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 면에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아니했다고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바울의 계획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지만 철저히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였기에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뒤틀린 것이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계획이다. 우리는 완벽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계획한 일이나 생각했던 것이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속상해 한다. 하지만, 성령과 함께 계획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언제나 그분과 함께 계획한다. 계획을 세웠지만 우리의 계획이 뒤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막힐 때 하나님 당신의 계획은 뭐이지요라고 물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계획을 세울만한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이슬랜드 화산재가 올라와도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변경되어야 한다. 그 형제의 결혼이 화산재로 연기되는 줄 알았는데 당사자가 없음으로 결혼이 무산되는 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계획을 하실 수 있다. 우리의 계획은 허술하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나의 꿈은 더 값지게 이루어진다. 우리의 꿈은 남는 게 없는 깨어야 할 환상이지만,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상충하게 될 때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라. 그분 안에서는 계획이 뒤틀린 것이란 없다. 주님 안에서는 실패란 없다. 결국 최선의 삶을 허락하신다.
예)The tales of three trees 조엘 오스틴의 Your best life now(긍정의 힘)에서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올리브나무와 떡갈나무, 소나무의 원대한 꿈을 이야기 하고 있는 동화이다. 이들 나무는 각자 특별한 존재가 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있었다. 올리브나무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되어 그 안에 온갖 보물을 담는 꿈을 꾸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숲의 수많은 나무 중에서 그 올리브 나무를 선택하여 베었다. 올리브나무는 아름다운 보석상자가 될 기대에 부풀었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꿈이 산산조각 났다. 자신은 가치가 없고 천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떡갈나무도 위대한 왕을 싣고 바다를 건널 거대한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나무꾼이 자신을 베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무꾼이 자신으로 조그만 낚싯배를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떡갈나무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 사는 소나무의 유일한 꿈은 언제까지나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섭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번개가 치더니 소나무를 쓰러뜨리면서 그 꿈을 빼앗아 버렸다. 얼마 후에 나무꾼이 쓰러진 소나무를 가져다가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렸다.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다. 세 나무의 꿈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리아와 요셉이 아이를 낳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마굿간을 발견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구유에 누였다. 이 구유는 바로 그 올리브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올리브나무는 귀중한 보석을 담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셨다. 올리브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셨다. 어느 날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크고 멋진 배가 아닌, 작고 초라한 낛싯배를 선택하셨다. 이 낛시배는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떡갈나무는 위대한 왕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이 있으셨다. 이제 떡갈나무는 만왕의 왕을 태우게 되었다. 또 몇 년이 흘렀다. 몇몇 로마 병사들이 그 소나무가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다. 이에 소나무는 곧 땔감 신세가 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병사들은 소나무를 작은 두 조각으로 쪼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소나무에 예수님이 매달리시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계획이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이 안될 때 좌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더욱 놀라운 곳에 있다. 그 나무들은 예수님이 태어난 구유가 되었고 다른 나무는 예수님을 태운 조각배가 되었고 다른 나무는 예수님의 구속의 십자가가 되었다.
V.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의 임재를 인정하라.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이라는 제목보다 성령행전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일리가 있다. 우리의 인생은 오늘날에도 끝나지 않는 성령의 행전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허락지 않으면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한다. 아시아가 아니라, 마게도냐로 건너간 바울과 같이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계획한다. 그러나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 실패가 아니다. 실패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실패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실패작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 계획을 해 나간다면 나의 계획이 어긋나도 그것은 잘 된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실수하면 그것은 멋진 실수이다. 하나님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가장 선한 것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그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라. 일을 경영을 우리가 할찌라도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언 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