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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쉰에서 택시로 후저우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남쪽 땅 진화 金华(금화) 에 가다!
2023년 10월 31일 10대 강남수향 중에, 쑤저우시 동남쪽에 자리한 난쉰구전 (南浔古镇
남심고진) 의 호텔에서 새벽에 일어나 창 너머로 일출을 구경하고는 식은밥을
물에 말아 먹은후 배낭을 챙겨 메고 리셉션으로 내려와 체크아웃을 하니 7시 35분입니다.
멀리 남쪽 땅 저장성(절강성) 의 진화 金华(금화) 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 하는지라
호텔 직원에게 후저우(湖州 호주) 역으로 가는 방법을 물으니..... 버스가
있기는 한데 10분 가량 걸어가서 타야 하고 또 버스는 1시간 반이나 걸린다니 망설입니다.
결국 버스는 포기하고 택시를 불러 달라고 말하니 어제 직원은 한류 탓인지 한국어를 조금
하는게 기특했는데.... 오늘 직원은 전혀 못하는 듯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는
휴대폰을 오랫동안 검색하더니 언제 가느냐, 둘만 가느냐, 몇시 기차냐 라고 계속 묻습니다.
여행계획서 종이를 보이고 지금 바로 간다며 우리가 타려는 기차는 9시 33분 출발이라고 말하니 비로소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데.... 요금을 물으니 후저우역까지 거리를 검색하더니
100위안이라더니.... 택시 회사에 전화를 하고는 저쪽에서 133위안을 달라고 한다기에 승낙을 합니다.
10여분 걸린다기에 호텔 밖으로 나오니 호텔 입구 간이 주차장에는 유독 오토바이들이 많이 주차해 있는데,
여기 10여대 오토바이는 모두 크고 번쩍거리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퀴가 3개이니 안정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8시 까지 온다던 운전기사는 좀체 나타나지 않는데..... 해서 리셉션의 직원에게
재촉을 하니 걱정 말라며 지금 차가 밀려서 그런데 5분 후에 도착한다는데
기사는 우리 기차 시간을 알고 있으니, 아마도 간단한 아침이라도 먹고 오는 것일까요?
8시 10분쯤 되어 차가 도착했는데 택시는 아니고 일반 승용차로 운전수는 30대로
보이는 여자분인데 웃으면서 인사를 하기에 먼저 후저우역
까지 133위안 요금을 확인하니..... 휴대폰에 중한 번역 앱을 실행해서 보여 줍니다.
“지금 택시비를 내도 된다”.... 그러니까 돈을 먼저 줄수 없느냐고 묻는데 호텔 직원 말이 이 여자분
이 이런 소리를 하면...... 혹시나 말이 통하지 않아 우리가 어찌 생각할까 무척 걱정했다나요?
돈을 꺼내니 잔돈은 괜찮다며 130위안만 달라고 쿨(?) 하게 말하기에 지불하는데 호텔 직원이 물 2통을
서비스라고 주기에 받아 승용차에 오르니 차는 시가지를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올리더니
130km 가 넘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에..... 안전벨트를 했는데도 오금이 저려 손잡이를 꼭 잡습니다.
난쉰구전 (南浔古镇 남심고진) 이 속한 후저우시는 저장성 쑤저우(소주) 시 산하 지급시로 난징
동남쪽 130km, 쑤저우 서남쪽 60km, 항저우 북쪽 5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며
인구 100만으로 별칭은 어미지향(魚米之鄕) 에 비단의 고장으로 중국에서 3번째로
큰 타이호 남안에 위치한 운하도시니....... 시내 곳곳에 옛 교각들이 남아 있어 운치가 있습니다.
쑤저우, 항저우, 자싱과 함께 고즈넉한 강남 운하 도시의 풍경으로 유명하며 중국 4대 비단 생산지 중 하나로
직물업이 발달하였으며 자연이 아름답고, 온천 리조트가 있어 찾는이가 많으니 장제스의 별장 남쪽의
모간산(莫干山)도 유명하며 쉬안청-항저우, 우시-항저우 간 철도가 지나며 청주시, 영암군과 자매도시 입니다.
후저우는 춘추시대에 월나라였으나 기원전 494년 오나라가 정복했고 기원전 473년 월나라가 재정복
하였다가 기원전 334년 초나라가 월을 멸하였는데..... 초고열왕 치세인 기원전 248년 춘신군
황헐의 영지로 봉해지니 성을 쌓고 일대에 부추 (菰)가 많은 것에 기인해 고성현(菰城縣) 을 두었습니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정복 후에는 우정현(烏程縣) 으로 개칭되어 회계군에 속하였고 기원전
206년 항우가 거병할시 항왕성(項王城) 을 세워 초기 거점으로 삼았으며 전한 대에도
회계군에 속했지만, 후한 대에 그 북부를 자립시킨 오군 (吳郡) 에 속하였으며
손오 지배기인 266년 오군의 서부는 '오나라의 흥성' 이란 의미인 오흥군 (吳興郡) 으로 했습니다.
수나라의 통일후 소주(쑤저우) 에 편입되었다가 602년 분리되어 호주 (湖州) 가 설치 되었고
명나라 1366년 호주부 (湖州府) 가 설치되었으며 난징 직할이었으나 1381년 절강성 휘하
로 바뀌었고 1949년 우싱시 (吳興市) 가 설립되었으며 이듬해 현 후저우시로 개칭되었습니다.
넓은 들을 달려 후저우시에 도착햇는데 바로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계속 외곽을 달리는 것이 후저우시는
우리 생각보다 큰 도시고 기차역은 반대편에 있지 싶은데 드디어 고속도로를 내려와 시내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아직 기차표를 끊지 않앗다니 여자 운전수는 주차장에 차를 댄후 우리더러 따라
오라면서 앞장을 서는데..... 쭉 걸어서 배낭을 엑스레이 기계에 통과시킨후 기차역
으로 들어가 매표소 창구로 가서는 줄을 서서 우리 차레가 되자 여권(护照 후자오)
2개와 함께 한국에서 인쇄해온 종이를 내미니 1인당 103위안이라고 모니터에 보여줍니다.
후저우(湖州) G 1503 09시 33분 출발 - 10시 51분 진화 金华(금화)
OR 후저우(湖州) G 1665 10시 16분 출발 - 11시 47분 진화 金华(금화)
OR 후저우(湖州) G 769 10시 38분 출발 - 12시 11분 진화 金华(금화)
绍兴湖州北 ⇒ 金华 10月 31日 高速动车 G1503
09 时 33分 出发 二等 2人, 沒有 一等
중국 기차 시간표는 https://www.12306.cn/index 사이트나 또는 휴대폰에서 구글에
들어가 “난쉰에서 후저우”를 치면 여러 사이트가 뜨는데 그중에 트립닷컴을
클릭해서 날짜와 출발역 및 도착역을 넣으니 많은 시간이 뜨니 그 중에서 선택합니다.
중국에서 기차표는 수피아오처 Shoupiaochu 售票处 라는 곳에서 사고 候车室 (후차실)
이라고 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작은 역은 큰 대합실 하나 뿐이지만 상하이
나 항저우등 큰 역은 여러개의 대기실이 있으니..... 자기 해당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며 대기실에 들어갈때는 짐을 엑스레이 기계에 통과시키며 몸수색도 합니다.
운전수 여자분과 잘별 인사르 하고는 대기실로 들어가 기다리는데 중국의 기차는 출발 15분
전에 개찰이 시작되고 3분 전에는 개찰구 문이 닫히는데.... 한가지
특이한게 개찰할 때 기차표를 보이는게 아니라 주민증을 기계에 대고 들어가는 시스템 입니다.
따라서 외국인은 역 직원이 서 있는 줄을 찾아 들어가면서 기차표와 여권을 보이며 “한궈런
(한국인)” 이라고 외치면 차장이 문을 열어 주는데..... 안으로 들어가다가 전시된 사진
을 몇장 찍느라 마눌더러 먼저 내려가라 이르고는 뒤따라 내려가니 마눌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아무래도 울 마눌을 찾을수가 없는데.... 선로에는 모니터가
보이니 현위치는 7번 차량이고 그보다 앞선 차량은 앞쪽으로 번호가
높은 차량은 뒤쪽이라 적혀 있으니..... 우리 차량은 11호 인지라 뒤쪽으로 가야 합니다.
혹시나 싶어 배낭을 멘채 앞쪽으로 달려가며 마눌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기로 그럼 이 여자가 제법이네?
자기 차량이 서는 자리를 잘 찾아갔나 싶어 뒷쪽으로 달려서 10~12호선 위치 까지 살펴 보아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탈 고속 기차가 들어오니.... 이거 심장 박동이 올라가는게 머리 속이 하애집니다?
여기 없으니 그럼 저 앞쪽이라? 드디어 기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앞으로 달려가면서 크게 마눌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 타니 더욱 당황하며 손발이 떨려오는데.... 이때 선로에 사람이
줄어들어 몇사람 남지 않게 되면서, 물론 내린 사람들로 인해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때 저 앞쪽에서 마눌이 달려오기로 아무 차량에나 올라타니 기차는 바로 출발 합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라 복잡하면 내 상식으로는 마눌이 계단 아래에 서서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중국 여행 열번째라 좀 익숙하다고 차량이 서는 자리를 찾아갔으니 바닥에 11 이라고 쓰인 숫자가
있어 맞다고 여겨 그냥 서 있었다는데, 이런 표시는 기차가 3가지 종류나 있으니 다른 열차의 11호선이라?
보통은 고속열차 차량 앞에는 차장이 나와서 기차표를 확인하고 차량을 안내하기도 하는데 우린 다급하게
올라탔으니 다른 차량이라... 너댓칸을 한참 통과하여 드디어 라 우리 차량에 도착해 자리를 찾아
앉으니 기차는 시내를 빠져 나가 푸른 들판을 남쪽으로 달리는데 차장이 와서 기차표와 여권을 검사합니다.
여기 들판은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넓으니 "만주벌판"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이 동아일보에 쓴 “빨치산이 가르쳐준 빨치산의 의미“ 라는 기사가 떠오르는데...
"빨치산은 아무 의병이나 독립군이 아니라 공산주의 계열 의병이나 독립군을 의미하니,
홍범도 죄는 단순히 빨치산이라는게 아니라 자유시에서 한 짓이 독립군 파탄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홍범도는 매복으로 봉오동 전투 대승리를 거둔후 재빨리 후퇴했으며, 김좌진과 청산리전투도 깊은 계곡에
매복했다가 서전을 대승리로 장식한후 일본군에 포위되기 직전 급히 후퇴하니... 일본군이 추격해 오므로
만주 벌판 끝까지 달아나서는.... 결국 흑룡강을 건너 소련땅 자유시로 찾아가니 무장해제를 요구받습니다!)
역사학회 등 51개 역사단체가 홍범도 흉상 철거에 반대하면서 “빨치산은 비정규군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
에 의병이나 독립군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고 주장했다. 빨치산은 의병이나 독립군을 지칭할
때는 대개 특정한, 다시 말해 공산주의 계열에 사용됐다. 홍범도 당시 빨치산부터 그렇다. 역사학계
가 좌파에 장악돼 전문가의 권위로 일반인을 오도하는 건 역사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홍범도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이인섭이라는 빨치산은 ‘1965년 9월 18일 김세일
동지 앞으로 보낸 편지’ 에서 대강 이렇게 썼다. “의병은 갑오농민전쟁 시기
의병, 을사조약 정미 7조약 군대 해산 시기 의병, 경술 합병 후의 의병이 있다.
독립군은 일본 식민지 통치시 중령(中領·중국)과 아령(俄嶺·러시아)으로 이전해 무장 투쟁한 부류다. 빨치산은
소련에서 국민전쟁(러시아 10월 혁명후 내전) 당시 조선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사회주의적으로 전환
되면서 등장했다. 갑오농민전쟁으로 부터 빨치산 때까지 계속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홍범도 밖에 없다”
김승빈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 출신으로 홍범도의 부하가 된 빨치산이다. 그는 ‘1970년
김세일 동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10월 혁명에 대한 보도에 접하자
원동(遠東) 의 조선 사람들도 농촌에서 소비에트 기관을 선거 조직하는 사업에 나섰다.
원동에서 공민전쟁(내전) 이 시작하는 때에 한인사회주의자동맹은 조선 사람들로 적위군 부대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내보냈으며 연해주 수청에서는 한창걸 동무를 비롯한 25명의 니콜라엡
스카야촌(村) 소비에트 위원들의 창발적 열성에 의해 빨치산 부대가 조직됐다. 이때
부터 시작된 조선인 빨치산 운동은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확대 강화됐다” 고 썼다.
홍범도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인 1919년 무렵부터 빨치산이었다고 자기 이력서에 썼다. 그러나
흉상 철거 주장의 이유가 그가 단순히 빨치산이어서가 아니라 빨치산으로서 자유시
에서 한 일 때문임은 역사가들이 더 잘 알 텐데도 빨치산의 뜻을 물고 늘어지며 논점을 흐렸다.
홍범도의 씻을 수 없는 과오는 간도에서 넘어온 어느 부대 보다 무장해제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김좌진 이범석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은 러시아령 입국 직전 돌아가
버렸다. 입국한 중심 인물은 봉오동 전투의 세 주역인 홍범도 최진동 안무다.
그러나 최진동과 안무의 부대만 해도 자유시 사변 당일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됐다가 풀려났다.
홍범도 부대(정확히는 신흥무관학교 교성대 출신 이청천 부대를 포함한 홍범도 부대)만 사변 전에 무장해제를
주도한 이르크추크파에 넘어가 그쪽 편에 섰다. 그의 부대가 사변 당일 토벌에 나섰다는 기록은 없지만
다음날 전장(戰場) 소제(掃除)를 했다는 당시 부대 지휘관 김승빈의 증언이 있다. 싸움은 어느 한편에 서서
2선에서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에 깊이 연루돼 있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변의 피해 상황은 당시 참가자들에게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한 측은
피해를 축소했고 공격당한 측은 과장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코민테른 전권위원 오홀라의 보고에
따르면 익사자 60여명을 포함해 전체 사망자는 120여명이다. 포로로 된 후 탈출 강제노동 수감 등의
과정에서 또 수십명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사실은 연해주 기반의 사할린부대를
빼고도 1,000명에 가까운 간도 독립군이 일시적 무장해제를 거쳐 결국 영구히 무장해제 됐다는 것이다.
자유시 사변 후 최진동과 안무는 다시 간도로 돌아갔다 . 홍범도와 함께 무장해제에 앞장선
이청천은 러시아 적군(赤軍) 으로 편제돼 사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던 중 노선 차이로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중국으로 건너왔다. 홍범도만 레닌의 포상도 받으면서 그곳에 남았다.
홍범도가 죽었을 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 는 이런 부고(訃告) 기사를 냈다. “홍범도 동무는
레닌 - 스탈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당의 사명을 꾸준히 실행하기에 정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시점에서 100년 전 빨치산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빨치산으로 독립군의 전력을
파탄내고 소련을 새 조국으로 삼은 사람이 대한민국 건국과 군과 육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한국 독립군은 와해되었으며 만주땅으로 건너온 독립군도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1924년 9월 안무가 연길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될때 거느린 부하래야 30명에 불과하니
소멸된 것인데... 10년후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수립하자 중국군도 일본군과 싸울
결심을 하니, 지청천이 딩차오와 만나 연합군을 결성했는데 병력은 "독립군 3천명에 중국군 25,000명"
으로 1932년 쌍성보전투, 사도하자전투, 대전자령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리품 분배 갈등에 연합은
해체되고, 1933년 8월 독립군만으로 동녕현 전투에서 일본군에 전멸당하니 한국 독립군은 소멸합니다!)
기차는 논이 많은 들판을 달려서 이우 义乌 yì wū 라는 역에 서는데 중국 최대 의류 도매시장인
이우시(义乌市) 는 저장성의 현급시로, 지급시인 진화시의 관리하에 있으며 2020년
제7차 전국인구조사에 따르면, 저장성의 현급시 중 4위였던 인구수는 10년 간
50% 넘는 상승폭으로 츠시시를 제쳐 1위가 되었고, 진화시 총 인구의 1/4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급종합개혁실험구에 포함된 현급시이자 중국에서 최고로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1인당 평균소득과 외제차 밀집도는 중국 내에서도 가장 높고 유엔과 세계은행에서도 공인한
세계 최대 규모의 소상품(잡화) 유통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무역의 중심지인 이우국제
상무성(义乌国际商贸城) 은 중국여행국으로부터 최초의 AAAA급 쇼핑관광지 타이틀을 수여받았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잡화시장답게 유행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하니 셀카봉, 스마트폰터치 장갑 등 핫
아이템이 포착됐다 하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무지막지한 물량을 찍어내어 돈을 쓸어담는
곳으로 2021년 오징어 게임 관련 상품도 대부분이 여기서 수출된 것이며 라이선스따위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으니 아이템만 제대로 맞힌다면 일확천금하는 도시라 위장 한류 회사도 생겼습니다.
돈이 흘러 넘치는 사업도시라 물가가 보통 도시와는 차원이 다르니 술값이 엄청나게 비싼데...... 다만 다른
지역 처럼 값이 싼곳이 있긴하며 무슬림을 믿는 아랍국가 출신 아랍인들도 많은지라 이들의 오일머니
파워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도 있을뿐만 아니라 이들을 위한 이우 모스크(义乌清真大寺) 도 있습니다.
그러고도 기차는 20여분을 더 달려서 10시 51분에 진화 金华(금화) 에 도착하는데 우리가 후저우(湖州) 에서
09시 33분에 출발했으니 1시간 18분을 달려왔나 봅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란시(兰溪난계) 를
거쳐 제갈공명의 후예들이 산다는 "주거바과촌" 诸葛八卦村 (諸葛八卦村 제갈팔괘촌) 으로 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