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는 아기를 낳을 때에 그 진통을 견디기 위해 나무를 꼭 붙잡거나 그 나무 위·아래를 출산자리로 여기는 습속이 있었다. 임신 때는 금기음식을 삼가고 나쁜 행동을 절제했으며, 출산 후엔 보양식을 먹고 금줄을 쳐서 병균의 출입을 막기도 했다.
여성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은 출산의 순간이란다. 진통과 함께 많은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인가보다. 때문에 옛날 여성들은 순산을 위한 전통적인 출산방법을 찾았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방법 중 나무 또는 풀꽃을 이용한 예도 다양하게 전한다. 아프리카의 반투족은 임산부가 아기를 낳을 때에 조그만 피그나무의 Y자형 자루에 가로로 막대를 질러 놓고 있다가 임산부의 손을 이 막대에 묶고 난 후에 진통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반투족은 임산부의 출산을 도울 때에 옷을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역시 맨몸으로 나올 아기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르완다에서는 난산을 겪는 산모에게 낙엽 달인 물을 마시게 했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아기가 엄마 몸에서 쉽게 빠져 나오라는 바람을 담은 처방책이었단다.
순산으로 아기가 갓 태어났을 때에 목욕을 시키는 풍속도 심심찮게 전한다. 프랑스 페이드코 지방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농도가 연한 포도주로 몸을 닦아 주었다. 중국에서는 생후 3일째 되는 날에 목욕을 시켰는데, 이때 태아의 독을 씻어내기 위해 목욕물에 향기로운 풀을 넣었단다. 그리고 아기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출생의식도 다양하다. 유럽에서는 탯줄을 정원에 묻고 그 위에 장미를 심었다.
임산부는 나무 위·아래에서 출산 고통 참아
출산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이는 임산부들에게 크나 큰 희소식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임산부의 순산을 위해 어떻게 대처했을까. 함경도에서는 임산부의 진통이 시작되면 남편은 산실 밖의 문기둥에 버티고 서서 문구멍으로 상투를 들이민다. 임산부는 남편의 상투를 쥐고 진통을 한다. 출산의 고통을 남편의 보호 속에서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풀꽃나무와 관련한 옛날의 순산방법으로 잘 알려진 것은 임산부가 아기를 낳을 때에 그 진통을 견디기 위해서 나무를 꼭 붙잡거나 그 나무 위·아래를 출산자리로 여기는 습속이다. 필자는 이 나무를 해산목(解産木)이라 이름한 바 있으며, 이는 바로 임산부가 진통하는 것을 줄이고 아기를 쉽게 낳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이용했던 나무이다.
스님 원효(617∼686)가 태어날 때에 나무 위에 옷을 걸어놓은 행위는 순산하기 위한 주술로 이해하고 있다.『삼국유사』에 실린 원효 탄생의 내용을 보면 담내내말(談乃乃末, 원효 아버지)의 집은 율곡(栗谷, 밤나무골) 서남쪽에 있었다. 유성(流星)이 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던 원효의 어머니는 만삭이 됐을 때에 밤나무 골짜기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히 산기를 느꼈다. 원효 아버지는 겉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그 가운데를 출산자리로 정한 후 그곳에서 원효를 낳았다.
그 나무는 사라수(裟羅樹, 사라 비단을 건 나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사라율(紗羅栗, 비단을 걸었던 밤나무 열매)’이라 불렀는데, 이 사라율 한 알이 한 바리때에 꽉 찰 만큼 컸단다. 현재 사라수가 구체적으로 어느 나무인지는 밝히지 못하지만 그의 아들 설총이 그 밑에서 땀을 흘리며 공부했다는 마을의 나무 부근에는 지금도 개미가 살지 못할 정도로 땅이 짜단다.
후대의 문헌에서도 나무 위에 올라가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皇甫)씨는 왕비로 책봉된 후 후사가 없었으며, 경종이 죽은 다음에는 친정에서 머물다가 태조와 신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욱(郁)과 간통해 임신하게 된다. 황보씨는 혼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때에 나무 위에 기어올라가 낳았단다. 한편 순산하기 위한 주술적 방법은 아랫목에 짚을 깔고 남편의 옷을 산모에게 덮어주거나 또는 메밀이나 수수를 삶아 마시게 하는 것 등이 있다.
임신 때는 금기음식과 나쁜 행동 절제해
임신 중의 금기음식 등이 다양하게 전한다. 음식이 사람의 몸을 구성해 가듯이 임신 중에 먹는 음식은 임산부의 몸과 태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모양이 울퉁불퉁하거나 짐승이 먹다 남은 나무열매(과실)를 먹지 않았다. 또한 완전히 익지 않았거나 제철이 지난 과실을 먹으면 난산하는 것으로 믿었다. 마늘은 태를 삭이고, 생강을 먹으면 육손이가 태어난다는 등의 다양한 속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필자는 어린 시절 제주도 시골생활 때에 임산부가 검은 참깨를 많이 먹으면 태어나는 아기의 얼굴에 기미 또는 주근깨가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태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행동도 신중해야 했다. 임산부의 행동이 선량해야 태아도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임산부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헛된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지도 않았다. 임산부의 나쁜 행동이 직접적으로 태아의 심성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전통적인 태아의 성별감정도 재미있게 전한다.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그 옛날의 태아성별은 집안 어른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는 태아성별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임산부는 어린이에게 고구마와 감자를 보여주며 이것 중 자신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때 어린이가 고구마가 들었다고 하면 아들이고, 감자가 들었다고 하면 딸로 여겼다. 또한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고 생각될 때는 남성을 상징하는 긴 무를 먹는 습속이 있었다.
아기를 낳은 산모는 쑥물로 먼저 몸을 씻은 후에 아기를 씻었다. 첫날은 위에서 아래로 씻겼고, 다음 날은 아래에서 위로 씻겼는데 그래야 발육이 고르게 된다고 믿었다. 왕실이나 양반가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목욕을 시켰는데, 목욕물은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의 뿌리와 호두나무 열매를 넣어 끓인 다음에 돼지쓸개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아기의 건강과 위생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약물들이 아기에게 흡수돼 두뇌 발달과 정서 안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출산 후 보양하고 금줄로 병균 출입 막아
출산 후에 산모가 먹는 보양식도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음식은 미역국이다. 미역은 칼슘 함량이 분유와 맞먹을 정도로 많은 알칼리성 식품이기 때문에 자궁수축과 지혈에도 도움을 주고 신경을 진정시켜 지구력을 갖게 한다. 미역에 많이 들어 있는 요오드 성분은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 데 필요하므로 응체된 혈액을 풀어주고 태아에게 빼앗긴 상당량의 갑상선 호르몬도 보충해 준다. 또한 출산 전에 산모를 위해 미리 좋은 쌀, 즉 산미(産米)를 준비했다. 산미는 한 말 가량을 새 자루에 담아 정한 곳에 두었다가 순산을 하고 나면 즉시 이 산미로 흰 쌀밥을 지어 미역국과 함께 먹도록 했다.
산모는 출산 후에 호박을 먹거나 옥수수 수염차를 마시기도 한다. 늙은 호박은 체내의 필요 없는 수분을 배설하는 작용을 하여 당뇨병이나 산후 부기가 있는 사람에게 좋다. 게다가 호박은 소화흡수율이 높은 당분이 많아 피로 회복에 좋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직후의 산모는 수분을 많이 잃은 상태이므로 이뇨 작용이 지나칠 경우 오히려 좋지 않으므로 출산 후 3주 정도 지나서 먹는 것이 산후비만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란다. 종종 보리차 대신에 옥수수 수염을 끓여 마시는데, 옥수수 수염은 신장에 별 무리를 주지 않고 이뇨 작용을 돕기 때문에 비만을 방지하는데 좋다. 특히 소변이 잘 나오지 않거나 부기가 있으면서 체중이 증가하는 비만한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
이밖에도 아기를 낳은 산모는 아기에게 먹일 젖이 많아야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흰빛의 쌀뜨물이나 계속 샘솟는 샘물 등을 마셨다. 또한 흰빛의 즙액이 많은 씀바귀, 고들빼기 등의 산나물을 먹기도 했는데, 이는 산나물의 흰 즙액과 흰 젖의 빛깔을 동일시한데서 유래하는 듯하다. 자귀나무는 부부의 금실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껍질은 알비토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임산부의 출산을 돕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한편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반드시 금줄을 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금줄에 솔잎이나 숯을 매달지만 아들을 낳았을 때는 솔잎과 숯 이외에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고추를 매달았다. 이러한 풍습은 아기와 산모의 건강을 위해 병균이 못 들어오게 하는 위생적인 목적도 지닌다. 즉 출산 금줄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을 알리고, 이에 따라 출입을 금지하며, 낳은 아기의 성별을 알리는 기호였던 것이다. 이렇듯 임산부의 순산이나 순산 후의 전통적 대처방법, 즉 풀꽃나무를 이용한 방법은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 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