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오늘도 조상님들의 발자취와 역사 공부 잘하고 가네.
판서공께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무관(武官)으로 S4 군수(軍需)분야를 담당하시면서 현의 수령을 겸직하셨네요. 한마디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목민관(牧民官)이셨습니다. 방촌유물전시관에 보관된 자료로 이렇게 문사(門史)를 조명하니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원문중에도 그간 임진왜란에 기여한 공적이 크신 분들이 많은데 개인이 소장하여 보관상태, 역사적 조명 등에 적잖히 걱정이 됩니다. 가능한 방촌유물전시관에서 관리하고 이를 토대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충만하길 원합니다. 행원문중은 행원 門中 오호(五虎)할아버지와 병조참판공(휘 문보)의 7명의 아들중 家內 오호(五虎) 할아버지를 비롯 많은 분들이 국가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르셨습니다. 이를 제대로 조명하도록 객관적인 유물의 관리가 시급하다고 사료됩니다.
■ 언양현감(彦陽縣監)
위덕화(魏德和)의 충의기록!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일 을사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경상도 병마 절도사 고언백이 올린 적정에 대한 치계
~상략
언양 현감(彦陽縣監) 위덕화(魏德和)가 치보하기를 ‘기장(機張)의 두모포(豆毛浦)에 주둔하고 있는 적병 5백여 명이 현의 석남촌(石南村)을 갑자기 포위하여 모두 분탕(焚蕩)하고 남녀 5명을 붙잡아 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원문>
且彦陽縣監魏德和馳報曰: ‘機張 豆毛浦屯賊五百餘名, 縣境石南村, 不意圍抱, 盡爲焚蕩, 男女五名擄去’ 云矣。" 啓下備邊司。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57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위득화 관련>
선조실록 선조 27년.
선조 27년 10월 선조 27년 10월 10일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0일 갑인 8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요동 도지휘사사가 왜정에 관하여 보낸 자문
중략
또 본월 21일 배신(陪臣) 경상도 방어사 김응서의 치계에는 ‘해 언양 현감(該彦陽縣監) 위득화(魏得和)가 「5월 28일 도망쳐온 군인 황필금(黃必金)이, 만력 21년339) 2월 중에 적에게 잡혀가 일본국 무응구(無應仇) 지방에 보내졌다가 본년 3월 중에 다시 낭고야(郞古耶) 지방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대상간(大上間)이라 부르는 대고사마(大告司馬)가 본도(本島)에 와 있으면서 모든 병무(兵務)를 전담하여 관리하였는데, 각추(各酋)가 평양(平壤)과 전라(全羅)에서 실패한 것을 깊이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배를 모아 식량을 운반하고 강병(强兵)을 더 조발(調發)해서 본년 7월 중으로 2기(起)로 나누어 1기는 제주(濟州)로부터 곧바로 전라도로 침범해가고, 1기는 경상도로부터 곧바로 경기도로 들어가 동서(東西)에서 분탕질하며 이내 합세하여 서쪽으로 침략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공칭하였다. 」는 내용으로비보하였다.’고 하였으며,
중략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66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명(明) / 외교-왜(倭)
조선왕조실록여기를 눌러 링크를 확인하세요sillok.history.go.kr
첨부파일1
위이환 님
이런 내용도 있나요?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네요.
碧泉 위윤기 님
네 외교문서에서 판서공 첩보가 왜정 동향으로 근거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점은 언양현감시절이었습니다.
이 일이 결정적인 충의기록으로 남아서 울산 충의사에 배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