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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의 술 이야기|전통주 명인을 찾아서·04
좁쌀술, 이정희(77) 님
삼척시 원덕읍 이천리
삼척에서 막걸리를 빚는 전통주 전수자를 찾아서 이야기를 채록하는 정연휘 시인 입니다. 이천리 이정희 할머니를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아내 강복순씨가 할머니의 막걸리 술 이야기를 듣다가 '구미떡' 이 나와 그 '구미떡' 이 무엇인지 많이 궁굼했습니다. 요즘 좁쌀막걸리를 빚는 사람들도 없고, 예전에도 보리술이나 입쌀술은 흔했지만 좁쌀술은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좁쌀막걸리를 만들던 이야기를 들으려 왔습니다. 좁쌀 막걸리는 어떻게 담궜는지? 미혼시절 아버지? 결혼하여 시아버지? 남편? 누가 막걸리를 좋아 했는지? 술에 관한 이야기와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술을 워낙 좋아해서 어릴적 열다섯 살 때부터 술을 직접 담갔사요" 이정희[77세] 할머니의 인터뷰 첫말에 놀라웠다. 열다섯 살이면 요즘 중학교 2학년 어린 학생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하고도 12년이 더 지난 시절에 열다섯 살 어린 나이로 전통주 막걸리를 직접 빚은 총명한 아이 아닌가? 이정희 할머니의 정겹고 맑은 목소리에 배어 나오는 영특함이 가슴으로 아, 이시대에 없던 반세기 전에 있던 산촌에서의 삶과 전통주 이야기를 바로 만나는구나, 뭉클한 싸인이 왔다. 어린 소녀는 어머니 술 담그는 걸 도와 드리며 술 빚는 걸 익혔다며, 술 이야기는 시작이 됐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 때부터 술을 직접 담갔사요. 아버지가 살아 게시면 뱀띠 정사생이니까, 올해 101세인지 102세인데, 그렇게 돼요, 그 시절 농촌에서 막걸리는 농사일의 힘이 됐사요. 그래가지고 우리집은 술단지를 두 개를 놓고 번갈아 가면서 5~7일에 한 단지의 술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또 다른 단지에 술을 담갔사요. 그래야 술이 떨어지지 않고 매일 드실 수 있사요.
그때 당시 우리집은 길곡리와 임원리 사이, 그러니까 옛길 관동대로 수로부인길 소공대에서 살았사요. 살기 어려우니까, 우리 가족이 소공대 거기와서 살 적에 뭐 없으니까, 걸로 그 소공대, 외딴데를 온 게요. 내가 그곳이 보고싶어 4 ~5년전에 한 번 가 보니까네, 집이 가만히 밀리지도 않고 폭 주저 앉았데요...소공대는 임원리이고 우리가 살았는데는 길곡리이예요, 거기서 살았는데, 내가 열두 살 때이고 동생이 일곱 살 때 일이야요.원래 태어난 곳은 궁촌리 서능 지나 서낭골로 다섯 살까지 살다가 마읍골 가든지로 이사가서 줄곳 살다가 소공대로 이사왔사요. 그곳은 물이 귀해 논이 없고 밭 뿐이여서 조, 보리, 감자 농사를 지었사요, 그때는 옥수수 농사는 별로 안지었사요. 그래가지고 보리쌀 보다는 좁쌀로 술을 해 먹었사요.
우리 아버지는 술이 없으면 안돼요. 일도 잘 하고 술도 좋아했사요. 우리 아버지는 못하는게 없었어요. 술도 잘잡수고, 당구도 잘 치고, 소리도 잘 하고, 뭐 오가활량이랬어요.요새말로 탈렌트 예술가 끼가 넘첬지요.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니, 술독이 두 개인데, 한독에는 거른 술이고 또 한독에는 괴는 술이 늘 있었사요. 미처 술이 안되면 술을 바래요,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해서 힘들어도 술을 담가야 했사요. 술을 많이 좋아해 아침 잡숩고 한 대접, 쉬 참에도 한 대접, 목 마르다 한 대접 즐겼사요.
좁쌀술, 좁쌀막걸리 담그는 방법은요? 좁쌀막걸리, 요즘 사람들은 힘들어서 못해요. 그래도 보리살술 보다는 좁쌀술이 쉽더라고요. 좁쌀술은 뜨거운 '구미떡'을 누룩과 썪는 치대기가 보통 일이 아니야요, 좁쌀술 담그는 과정은 좁쌀을 디딜방아에 찧어서 가루로 만들고, 그 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하여 골고루 잘 익으라고 '구미떡'을 만들어 삶아요. '구미떡'은 방언으로 '구멍떡'으로, 따발이 모양이지요. 반드기 구미떡은 삶을 때 고루고루 잘 익으라고 도넛츠 빵처럼 복판에 구멍을 둟어가지고, 그렇게 삶은 구미떡이 익으면 대나무 조리로 떠서 나무 함지박에 담아요. 시간 전쟁이야요,식으면 누룩과 섞이지 않으니 식기 전에 구미떡 한 뭉치에 미리 준비한 물에 담갔던 누룩 한 뭉치를 썪어 손으로 치대기를 했사요.
구미떡은 너무 뜨거워도 너무 차가워도 안되고, 손이 데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온도에서 식기 전에 누룩과 잘 혼합이 돼야 해요. 손바닥이 불이 날 정도로 치대기를 했사요. 그 시절에는 고무장갑이 없사요. 설 치대면 떡은 떡대로 누룩은 누룩대로여서 술이 안 싹아요. 입살떡은 누룩과 섞어서 잘 치대지 않아도 술이 잘 익어요. 입쌀은 채로 걸러서 하면 되지만 좁쌀은 작아서 가루를 내어 구미[구멍] 내서 삶는게 핵심이야요. 좁쌀술은 한 번 담글 때 이기는 것이 힘들어 많이 못하고 2~3되를 해요. 구머떡을 네댓 쪼가리를 삶아서 너무 많이하면 누룩하고 이기는 것이 힘들어 조금씩 조금씩 삶아서 이기고 치대고, 다시 조금씩 조금씩 삶아서 이기고 치댓사요. 좁쌀과 누룩의 혼합비율은 맞누룩, 맞누룩을 넣었사요. 즉 좁쌀 2되에 누룩 2되 1:1 비율로 했사요. 그 시절에는 술약이 없어 좁쌀과 누룩의 비율이 같았사요. 그래야 술이 잘 익었사요.
입쌀술은 떡과 누룩을 썪어 단지에 넣으면 술이 쉽게 되는데, 좁쌀술은 많이 치대지 않으면 술이 잘 익지 않아요. 설치대면 술을 걸러보면 떡은 떡대로 누룩은 누룩대로여서 잘 삮지 못해요. 잘 치대어 누룩과 구미떡이 썪이어 떡 덩어리가 돼어야 좋은 술이 돼요. 잘 치댄 떡 덩어리에 물을 부어 단지에 넣어 방에 놓고 정상적으로 3~5일 삭히는데, 이틀 밤이면 부글부글 괴기는 괴는데, 술이 먹도록 되자면 4~5일이 돼야해요. 4~5일만에 거르면 아주 맛 좋고 목넘김이 좋은 막걸리가 됐사요. 그 시절에는 술약이 없으니 술이 시지않으면 술이 잘 됐다 했사요. 좁쌀술은 놀놀하고 술이 강했사요. 입쌀술은 뽀얗고, 보리술은 미끄럽다고 아버지는 말 하곤 했사요. 보리술이 미끄럽다는 것은 껄찍해서 목넘김이 부드럽지 않다는 것이야요, 보리술 보다 좁쌀술이 강했으니 도수가 높다고 봐야겠지요. 술은 겨울에는 좁쌀술, 여름에는 보리쌀술을 담가 먹었사요. 그렇게 술을 담가도 곧 8순인데 아직 난 술을 못먹어요, 참 웃기지요?
누룩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누룩은 밀농사를 지어서 밀을 빻아 가지고 가루는 국수해서 먹고, 무거리 가지고 누룩을 만드잖아요. 무거리 가지고 요새 메주장처럼 동그랗게 만들어가지고, 띠워 가지고, 방아에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물을 부어서 부실부실하게 해가 지고, 구미떡과 으깨어 잘 혼합하기위해 많이 치대기하는 거야요.
인생 되돌아보면 궁촌리가 고향이고, 마읍리에서 살다가 열두 살 때 길곡리 옛 관동대로 소공대재 바로 아래로 이사와 어린 나이 열두 살 때부터 어머니 술 담그는 일을 도와 드렸사요. 열다섯 살부터 직접 술을 담가서 부모님을 즐겁게 했사요. 5년 동안 좁쌀술 때로는 보리쌀술을 담그며 부모님 농사일 거들었어요.
집 앞 길, 큰길 재를 넘는데 소공대 길에는 우물이 없어서 길 가는 사람들이 목이 말라했사요. 우물이 없어 우리 집 옆 소공대쪽으로 100미터 이상 돌아가면 방안 만한 큰 우물과 작은 우물이 있어, 하루에도 몇 번 물을 이고와 재를 넘는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한 일이 엊그제처럼 생생해요. 점심 먹고 한 동이 퍼다 놓으면 물이 근방 없어 젔사요. 길손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왕래했사요. 임원 사람들이 호산 장 보려 그길을 다녔사요.
소공대, 옛길 관동대로 길 옆에 살았으니, 옛날의 큰길이니 많은 사람들이 오갔겠네요? 옛길 그곳을 지나는 장사꾼들도 많았겠네요?
소공비 그 너머에 가면 우물이 있어요.우리집에서 1백미터 좀 넘지요. 거기가 우리집 우물인데 그 우물에 댕기며 그 물 먹고 살았사요. 임원 사람이 장보러 올 때 그 길로 올라와요. 임원 사람들도 그 소공대 길로 호산으로다녔네요? 임원 사람들 그 길로 댕겼고, 저 아래 임원초등학교가 있는 거기서부터 그 재로 올라가지고 우물을 지나 댕겼고, 바닷가에 있는 사람은 그 아래로 댕겼지, 다 그 재, 소공대재로 댕겼죠. 사람들 말도 못해 하루도 수십명 소장사들은 소를 막 줄 줄이 이어 가지고 열마리 씩 줄줄이 한 사람 두세 사람이가 소를 막 20마리씩 줄을 이어 가지고 다닌적도 있었어요.
그때는 60여년 전에는 소도 짚신을 신었네요? 소가 짚신 신는 다는 거 처음 듣네요, 나도 옛날 사람이네, 그러니까 소들이 이동거리가 멀어 오래도록 많이 걸으니까 짚신을 신겼구나. 소공대 옛길에서 줄줄이 소를 몰고가는 쇠장수들의 영상이 상상으로 보이네요.
앞발에 힘을 더 많이 쓰니까 앞발은 신을 신기고, 또 소장수 할배들 또 짚신을 등에 짊어지고, 열컬레 걸머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랬사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으고요, 진짜 사진에서도 볼 수 있을까 말까하는 소중한 얘기입니다.
그래 난 그 소공대에서 한 5~6년 인가, 한 7~8년간 살았나? 12살 먹고 와가 지고 한 20살까지 살었으니 물을 날으는 일, 물 말도 못해요. 특히 그 시절 작년 같은 가뭄에는 다 목 말라 가지고 난리도 물이 모자라는 물난리, 난리 중에 난리지요. 목마른 사람들에게 목을 축여주는 물 보시는 생명 보시이니, 다 어르신한테는 그런 보시의 공덕이 복이 돼가지고 건강하시고, 자녀들도 잘 사시는가봐요. 하하하
스무 살 때 소공대에서 조금 내려가면 성황당 제사도 차렸사요. 소공비에서 조금 내려서면 마을에 서낭당 있어요, 당상목 큰 소나무가 있잖요. 서낭제사 때 우리 집에서 제사를 많이 차렸어요. 20살 때 시집 오기전에 그 제사를 내가 많이 차렸사요.
스무 살 때 이천골이 깊은지 높은지도 모르고 시집왔사요. 우리 아저씨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마음씨도 그만인 27살 남용덕과 중매로 결혼하여 줄곳 이천리에서 살았사요. 3남 3녀 자식들 우리집에서 호산까지 이십리[8km],왕복 사십리[16km]를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어린것들이 걸어서 통학한 애로는 말씀이 아녜요. 고등학교는 강릉으로 유학 3년 동안 애들 뒷바라지 하며 시장에서 풀빵도팔고 고기장사도 하면서 뒷바라지 했어요. 마을에서는 농사 안짖고 애들에게 미처서 3년이나 집을 비워서 왕따 당한일... 그렇게 악착같이 전력투구 해서 가난한 산촌 농가에서 아이들 모다를 훌륭히 키운 것은 후회없는 보람이여서 좋았사요.
소공대재에서 이천리로 시집와서도 남편이 술을 좋아 해서 술은 계속 담갔사요. 옛 방식이 아닌 현대방식으로 술을 빚어 그건 천상 쉬웠사요. 뒷집 아저씨와 앞집 우리집 아저씨가 동갑내기인데,우리집에 술이 없으면 뒷집에서 주고, 뒷집에 술이 없으면 우리집에서 주고, 그렇게 주고 받고 살다가 71세 때에 뒷집 아저씨는 5월에, 앞집 우리 아저씨는 10월에 상사 났아요, 같은 해, 13년 전에 돌아갔사요, 참 묘했지요, 술 안 빚은 지 이제 13년이 됐사요.
그러면 어르신네 자녀들은 학교 갈 때는 여기서 다녔나요? 다른 데로 유학 갔었나요? 여기서 호산 학교를 걸어 당겼어요, 책가방 지고, 호산학교까지 거리가 얼마예요? 여기서 8키로라고 그랩디다. 8키로, 20리라 그래요.놀라워라~ 8키로? 20리요, 왕복 16키로 가는 데 8키로 잖아 오는 데 40리지요. 나도 초등학교 6년을 그래 다녔는데요, 여삼리에 살았거든요, 노곡 여삼리는 장뇌삼을 많이 하는 데, 여삼리에서 태어 나가지고 초등학교에 8키로를 걸어갔다가 8키로 걸어왔어요, 내 초등학교 시절처럼 자녀들도 그랬네요. 참기특하고 대단하지요, 요새 갔으면 말도 안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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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머슴아들 셋하고, 큰 딸하고는 호산에 중고등학교를 다 댕겼고, 둘째하고 막내는 중학교만, 고등학교는 강고로 나왔거든요, 그래 내 아이들 강고 공부 시키느라 이집을 떠나서 돌아 댕겼거든요, 우리 아저씨도 고생 무지무지하게 많이 했지요. 그러면 자녀들이 6남매인데, 몇 남 몇 녀예요?
3남 3녀예요, 그런데 우리 큰 딸하고 큰 아들 하고 원덕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했는데, 머슴아들은 자전거도 타고 댕기는 데 큰딸아는 여기서 6년을 책가방들고 댕겼지요, 손가락이 파이고 요롭게 굽어지더라고요. 남자 아들은 가방을 메고 다녔는데, 여자 아들은 선생님 가방처럼 들고 다녔사요. 우리 큰 딸아가, 요새 나이가 57세인데 자꾸 아프다고 그래요, 공부 하다가 너무 많이 걸어다셔서 그렇구나 하지요. 그 시절 입을 게 변변하나요, 없이사니까 교복만 입고 가니까요, 겨울에 얼마나 얼마나 추워서 떠는 지, 학교도 난로도 없지 여기서는 눈 비 맞고 그냥 내려갔지, 그렇게 겨울을 이겼는데, 근데 그 아가 열심히 댕겼는지 6년을 다니면서 개근상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 졸업 하면서 여자가 실장으로 졸업하는 거 야가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둘째 아들하고 망냉이하고는 강고 들어 가고, 큰아들이 광운대를 갔어요,
말도 못하게 고생했지요, 그래도 시어머니가 있는 데 밥을 못해줬어요, 나이 90 넘으니까네, 아저씨가 밥을 몇 년 했지요, 그러니까 아들 뒷바라지 못나가라고 난리가 났지요. 내가 결국에 그런 말까지 했는데요, "남은 여자가 죽고도 사는 데, 왜 못사냐 죽었다 하고 살자고요" 그렇게 나아서 자식 공부를 시켰어요. 아 참으로 대단 하셨습니다. 어머니 자식 공부 열정이 대단하셨어요.
그래가지고 강릉 나가서 장사 조금 조금 하면서 과일 장사도 하고, 봄에 뭐 나오는거 동네에서 조금 조금 받아 가지고 중앙시장 뒤에 앉아서 팔면 그곳 경비들이 물건을 툭툭 차면서 밟아요, 그럼 중앙시장에서 쫓겨가서 중앙통인데 신흥국장 있는 데 가서 물건 팔다가 경비원이 지나가면 그 자리에 앉아서 팔고, 그래서 그 둘째 머슴아가 강고를 졸업 하면서 집에 왔어요.
3년 거기 강릉 살다가 졸업 하면서 막냉이는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2학년인가 거기 하숙 시켜 놓고 나와 가지고 이천에서 임원을 드나들며 장사를 했지요, 고기 장사도 하고, 풀빵 장사도 하고, 그랬는데 아침으로 아침 밥은 해 먹고 나가서 집에 오면 9밤 시나 어떤 날에는 와 보면 걸어 와 보면 밤에 와보면 안됐어요 그래 이시간 임원서부터 걸어와 임원에서는 호산까지 차로 와 거기서부터 걸어 온다고 옥원에 와가 지고, 20원 넣고 공중전화로 전화 해서 아저씨가 내려오면 같이 올라하고 그랬어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하다가 힘이 든데 내려오라고 하기도 그렇고요 그때 그렇게 살았았사요.
그래, 나이 잡순 시어머니 놔두고, 신랑 놔두고, 막냉이 중학교 댕기는 거 놔두고.... 욕 안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래 쉽게 말하면 저년이 돌았나 이 정도로 욕을 하지요, 그러면서 애들 공부시키는 욕심으로 그랬사요.
아, 할머니 선각 정신이 있었기에 그런 생각 그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애들이 잘 사는 거죠. 헌테두리에서 새로운 테두리로 도전하는 것, 맨손으로 유리창을 깨는 것은 손에 피흘림을 각오하듯이 참으로 열심이 사셨음에 존경을 올림니다.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좀 열심히 산다고 살았아요. 잘 하셨어요 참 잘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