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 최초 원수 추대 논란[편집]
6.25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백선엽을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로 추대하자는 이야기는 성우회, 재향군인회 등의 예비역 단체들에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2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 사령관이던 김종태 중장은 예비역 장군들의 이러한 의견을 수렴하여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김종태 사령관은 추대 이유로 "명예원수 추대는 오성(五星) 장군에 준하는 장군 임명 건이기 때문에 이번에 추대를 하면 백선엽 장군이 개인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6·25전쟁 참전자들의 자긍심도 올라가고, 국민들의 안보의식도 높아질 것" 등을 꼽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청와대에서 직접 나서는 것보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나서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의견을 추가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국방부는 법률 검토에 착수하였다.#
시기상으로도 2010년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민관 합동의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한승수 당시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공동위원장)를 발족시켰고, 대한민국 국방부도 자체적으로 '6·25전쟁 60주년사업단'을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백선엽의 원수 추대 및 회고록 발간도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가 기획한 사업안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법률검토 결과 정식 원수로 추대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당시 원수 계급에 대해 규정하고 있던 군인사법(軍人事法) 제27조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여기서 1항의 대장은 현역 대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예비역 대장인 백선엽은 해당이 안 된다. 또한 군인에게 있어 현저한 공적이란 당연히 전공(戰功)을 의미하므로, 이 조항의 취지를 따져보면 원수 진급은 전시에만 가능하다. 결국 이는 부담스러운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김태영 국방장관은 부담이 덜한 명예원수 계급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하지만 이 역시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진급을 규정한 군인사법 제24조와 '예비역의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이들 조문을 살펴보면 예비역은 대령까지만 진급이 가능했다.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해도 법적 근거가 없던 것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국방부는 입법부 차원에서의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군 출신 국회의원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김장수 의원(전직 제40대 국방장관), 황진하 의원(전직 유엔 키프로스 평화유지군 사령관, 하나회 출신) 등이 나서서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제도 정비를 역설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적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 소식이 알려지자, 군 원로들 가운데서도 백선엽의 원수 추대를 극력 반대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터져나왔다. 예컨대 역시 6.25 전쟁 영웅이자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89] 장군이 그러했다.
이 증언을 채록한 박경석[90] 예비역 준장도 격렬한 반대자였다. 박경석은 본인의 홈페이지에 '백선엽이 일본국 괴뢰정부인 만주국 간도특설대의 육군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소탕작전을 지휘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는 점, 낙동강 전선에서 활약이 과장 평가되었다는 점, 북한이 남한에 대해 건군 과정을 헐뜯는 내용이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한 건군인데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가 된다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점'을 담은 성명서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름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은 많은 군 원로들도 대한민국 국방부와 청와대에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단독]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이들은 다른 장교들도 백선엽 못지 않게 많은 고생을 하며 전공을 세웠는데, 유독 백선엽만이 영웅시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91]
특히 다부동 전투 이전 개전 초기에는 경험 부족으로 상당한 실책도 연발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모 장군은 "백선엽 장군은 간도특설대 출신인데 대장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92]"면서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 장군(작고·예비역 대장)은 잘 싸웠기 때문에 서울 진격을 지연시켰지만,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개성을 무방비 상태로 점령당하고, 봉일천에서 사단사령부가 기습당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무슨 영웅이고 원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일부 창군 원로는 청와대 안보특보실에 자필 편지를 보내 "비열했던 백 장군의 과거까지 까겠다"고 극언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군 원로들의 반발,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광복회의 반발 등이 겹쳐지자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명예원수 추대 사업에 대한 의지를 꺾게 된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에서도 백선엽 회고록 출간 정도로 관련 사업을 축소하여 진행한다. 이어 전쟁 발발 6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기가 지나고 그해(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이어지며 명예원수 추대 사업은 완전히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첫댓글 내가 가지고있는 자료와 별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