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집회와 시위를 할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는 건 그게 자유가 유리된 이들을 발견하는 사회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는 자유를 향한 원초적인 몸부림에 대해 자유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늘 환영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실천하는 이들은 시끄럽다,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떼만 쓰면 다 되는 줄 안다 등등의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고 살아가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자유만 뱉으며 실제 그 자유의 결핍을 상징하는 불평등에 대해서는
둔감한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너희들이 누리는 자유를 내게도 달라’는 장애인의 지하철 시위는 쉽사리 ‘내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비문명적 시위로 포장된다. 그 자유, 그러니까 지하철을 이용하여 제때 이동하는 일상이 출근시간에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불평등을 전제로 만들어졌음은 한순간에 휘발된다. 보편적 자유를 위해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괴상한 사회는 그렇게 흘러간다. 자유라는 말이 빈번하면, 오용된다. 노키즈존을 운영할 자유, 난민을 배제할
자유, 특수학교를 반대할 자유, 임대아파트 주민을 무시할 자유, 부동산 투기할 자유, 제재 없이 기업 활동을 할 자유, 여성은
돌봄 노동에 적합하다고 여길 자유 등등은 자유가 오용된 대표적인 반지성주의 사례다.
[나]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 본인에게는 모를까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따라서 그 억압이 그저 사적으로 한정된 침해일 뿐이라
할지라도, 그런 억압을 받는 사람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에게까지 -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러한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해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함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다음 장에 계속>
[3-2]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라]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게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 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 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 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마]
‘인생은 한번 뿐’이란 생각을 가진 욜로족들이 실제로는 충동적인 소비보다 할인, 쿠폰, 중고 매매 등을 활용하는 ‘짠테크’(짠돌이+재테크) 소비 패턴을 보인다는 분석이 나왔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욜테크’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는
분야는 여행이다. 여행 분야에선 소비자가 숙박ㆍ항공ㆍ교통ㆍ맛집 등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절약정보를 탐색해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숙박은 무조건 저렴한 가격의 낙후된 시설만을 선택하지 않고, 합리적 가격의
프리미엄급 숙소를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욜로족은 숙박ㆍ항공권 구매에 앞서 다양한 가격비교 사이트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할인코드, 특가 혜택, 포인트 전환 기회를 수시로 확인하고 환율에 따른 비용 절감을 노리는 등
합리적인 프리미엄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였다”며 “맛집 탐색은 해외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앱을 통해 할인과 예약 정보 등을
확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수진 이노션 디지털 커맨드 센터장은 “충동적 탕진 개념의 욜로를 넘어 합리적
소비와 효율적 가치실현을 위한 욜테크 트렌드는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바]
유기농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만큼 이제는 득실을 잘 따져봐야 할 때가 됐다. 득(得)은 우리 식탁에서
농약·화학비료·식품첨가물 등 각종 화학물질의 잔류 걱정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비타민·미네랄·필수 아미노산 등 각종
영양소도 일반 식품보다 유기농 식품에 더 많이 함유돼 있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둘의 영양상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독일 영양협회도 유기농 식품이 영양가 면에서 일반 식품보다 더 낫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실(失)은 유기농업의 생산성(수확량)이 비료·농약을 사용하는 통상적인 농업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늘어나는 세계 인구를 유기농업으로 먹여 살릴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수확이 떨어지면 가격은 올라가고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사람들은 적어진다. 또한 유기농 농산물은 수확량이 적어 넓은 경작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단위 작물 당
탄소 배출량이 더 많아 지구온난화를 촉진한다는 연구도 있다. 최근 부각되는 유기농 식품의 문제점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곰팡이 독소 등의 오염 가능성이 일반 식품보다 더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기농업에선 퇴비·농업용수
관리가 엄격하므로 식중독균 오염 가능성이 특별히 높을 까닭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유기농 식품의 식중독균 오염 가능성에
<끝>
[3-3]
대해 양론이 존재하나 적어도 유기농 식품이 각종 식중독균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유기농
식품=안전 식품’이란 근거 없는 믿음은 소비자에게 방심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
우리가 쇼핑을 하면서 물건을 하나씩 구매할 때마다 우리는 투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동착취’를 통해 만들어진
값싼 옷을 사는 것은 노동자들의 착취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며, 연료 소비가 많은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은 기후 변화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소량일지라도, 커피, 차, 아침에 먹는 시리얼, 빵과 야채등 생활필수품을 구매하는 행위는 의사표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유기농 생산물을 선택하는 것은 환경적인 지속가능성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것이며, 공정무역은
인권을 위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쇼핑을 할 때 윤리적인 이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이러한 영향을
고려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지갑 안에 의견을 표명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식품 회사와
대형 유통업체들이 유전자조작식품(genetically modified food)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세요. 이 때문에 고객이
줄어든다고 위협을 느끼게 되면 회사 정책도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