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작구 3코스(한강 나들길) 걷기
◇ 효사정(孝思亭): 동작구 흑석동 141번지 2호
-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盧閈)의 별서
효사정은 조선 초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盧閈 : 1376∼1443)의 별서(別墅)이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자 3년 동안 무덤을 지킨 뒤 움막을 헐고 정자를 지어 기거하면서 개성에 있는 부모를 추모하며 일생을 지내자, 이 정자는 효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서인 당시 호조 참판 강석덕(姜碩德 : 1395∼1459)이 이 정자를 효사정이라고 명명하였고, 그의 아들 강희맹은 「노사정기」를 저술하였다.
이 정자는 1993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노한은 호가 효사당(孝思堂)이므로 이 정자 이름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노한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민제(閔霽)의 사위로서 태종과는 동서(同壻) 간이 된다. 16세에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경기도 관찰사 등을 거쳐 1408년(태종 8)에는 한성부의 책임자인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 이듬해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종친을 이간(離間)하고 불충한 언동을 했다는 탄핵을 받았을 때 노한도 이에 연좌되어 파직당했으므로 양주(楊州) 별장에서 14년간 은거하였다. 주지하다시피 4년 뒤에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태종에게 사사(賜死)되었다.
1422년(세종 4)에 상왕(上王)으로 있던 태종이 “노한이 민씨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고신(告身)까지 거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 급히 불러들여라.”라는 전교(傳敎)를 내렸으므로 그는 복관(復官)되어 한성부윤으로 재임명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찬성사·대사헌·우의정을 지냈다.
효사정이 세워진 곳은 6·25전쟁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한강에서 벌어진 ‘에어쇼’를 관람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당시 매년 10월 1일은 공군의 날이었으므로 이날 공군은 에어쇼와 한강 백사장에서 비행 묘기와 모형물에 대한 대지공격(對地攻擊) 훈련을 하였으므로 이 대통령을 위시하여 수많은 서울 시민이 한강 남쪽과 북쪽 제방에서 이를 관람하였다.
◇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동작구 본동 10번지 30호(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6호)
- 정조(正祖)가 수원 현륭원(후에 隆陵)에 참배하러 다닐 때 쉬어 가기 위해 세웠던 행궁
용양봉저정은 이름 그대로 용(龍)이 뛰놀고, 봉(鳳)이 높이 날은 다는 정자이니 이는 곧 국왕 행차의 위용이 성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일명 용봉정(龍鳳亭)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는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를 수원 현륭원(후에 隆陵)에 모시고 참배하러 다닐 때 노들나루를 건넌 다음 잠시 쉬고 가기 위해 세웠던 행궁(行宮)이다. 이 행궁은 한낮에 쉬어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일명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
이 당시 노들나루에는 배다리(舟橋)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가설하는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아를 이곳에 두고, 주교대장(舟橋大將)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주교사는 어가(御駕)의 안전을 위해 배다리를 가설하는 관아로 1789년(정조 13)에 설치되어 1882년에 폐지하였다.
이 건물은 1791년(정조 15)에 지은 정면 6간, 측면 2간 팔작지붕의 초익공계(初翼工系) 양식의 건평 30㎡ 되는 규모로 처음 지을 때는 이곳에 정문과 주교사로 쓰였던 누각도 있었다.
건물 모습을 살펴보면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툇간(退間)이 있으며 사방에는 띠 살 분합(分閤)이 달린 오량(五樑) 구조의 겹처마 건물이다. 따라서 매우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특수 기능의 건물로 드물게 보는 형식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용양봉저정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의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건물이 많이 훼손되어 전일의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정자는 매우 크고 화려하여 여기서 굽어보면 한강 언덕의 푸른 수풀 아래로 맑은 물이 내려다보이고, 강 저쪽으로 눈을 돌리면 남산, 북악산 사이로 서울 장안의 풍경이 그림 같이 펼쳐져 있어서 전망이 매우 좋다.
◇ 노들나루 공원 : 동작구 노량진로 247길
- 노량진 배수지공원’이 ‘노들나루 공원'으로 명칭이 바뀐 근린공원
‘노량진 배수지공원’이 2013년에 ‘노들나루 공원'으로 명칭이 바뀐 동작구의 대표적인 근린공원이다.
이 공원은 한강 변과 가까워 산책, 운동, 가족 나들이에 적합한 넓은 공간과 바닥분수, 풋살장, 족구장, 축구장 등 다양한 체육·휴게 시설을 갖추고 있다.
6·25전쟁 한강 방어선 전투 전사자명비 등 역사적 의미도 더해져 지역 주민뿐 아니라 방문객에게도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지하철 9호선 노들역과 가까워 접근성이 뛰어나며, 여의도 불꽃축제 명소로도 유명하다.
◇ 사육신역사공원(死六臣歷史公園) : 동작구 노량진동 182번지 2호(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8호)
-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거사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여섯 충신의 묘
조선 초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서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거사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뒤 끝까지 세조에게 굴복하지 않고 처형된 성삼문·유성원·이 개·하위지·박팽년·유응부의 여섯 신하를 사육신으로 꼽았기 때문에 이들은 오랫동안 알려진 조선시대 충신의 대명사였다.
한강 변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자리를 잡은 사육신묘를 찾으면 성역화(聖域化)된 2,700㎡ 묘역에 홍살문[紅箭門]이 세워져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띈다. 이 문을 지나면 그 안에 좌우로 1782년(정조 6)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비각 안에 있고, 1955년에 세운 여섯 모의 사육신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다시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사당인 의절사(義節祠)가 있다. 1955년에 세운 사육신 묘비는 서울시에서 육각비(六角碑)를 세우면서 각 면마다 사육신의 시나 시조를 써서 새겨 놓았다.
의절사 뒤에는 현재 7개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는 1978년에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경북 선산(善山)에 있던 하위지의 묘를 이장해 오고, 유성원의 묘를 새로 꾸미면서, 병조판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를 추가로 조성하였다. 따라서 의절사에는 사육신의 여섯 분이 아닌 일곱 분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광복 직후까지는 이곳에 ‘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 쓴 두 개의 묘소와 박씨지묘(朴氏之墓)·이씨지묘(李氏之墓)·유씨지묘(兪氏之墓) 등 5 묘소 밖에 모셔져 있지 않았다. 이곳의 ‘성씨지묘’ 두 개는 성삼문과 그의 부친 성승(成勝)의 묘소로 전해 왔다. 사육신 중의 하위지는 고향인 선산에 모셔져 있었고, 유성원의 묘는 모셔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광복 후 어느 때인가 사육신묘 서쪽에 성승의 묘소를 없애 버렸으므로, 1978년에는 사육신 중 네 분의 묘소만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
정조 때 세워진 신도비는 원래 사육신 묘소 아래 큰길가에 위치하였다. 이 비를 1978년에 현재 자리에 옮겨 놓았는데 비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성삼문 등 여섯 충신이 사형을 받을 당시 서울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혼란하였으므로 이들의 시신을 매장할 겨를조차 없었던 중에 다행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승려의 차림으로 남몰래 이 산에 시신을 묻었다. 그러하니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어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라는 구절이 있으니, 사육신의 묘소가 조성된 내력의 일부를 알 수 있다.
사육신의 충절은 남효온의 <<육신전(六臣傳)>>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숨겨져 왔다. 사육신이 처형되고 나서 200여 년 뒤인 1682년(숙종 8)에야 동작진(銅雀津)에 사육신을 위한 육충사(六忠祠)를 세웠다.
1691년(숙종 17) 9월에는 왕이 친히 노량진 한강을 건너서 사육신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어서 그해 12월에는 숙종이 여섯 충신의 관작(官爵)을 복위하고, 시호(諡號)도 내리는 동시에 서원을 묘소 산마루에 이전한 후 ‘민절서원(愍節書院)’이라는 이름을 써서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