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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2.16:30 나름으로 해석하고, 여러 서책의 기록을 인용하여 한글화 한것으로 다시 올리다.
2024.01.13.14:49 추익한 서적 한문 원문에서 판각기문에는 있으나 본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부분이 발견되어 판각기문을 다시 검토 누락부분을 원문에 추가로 기록하였고, 추익한 사적 문장을 원문과 해역을 추가로 병기하여 한글파일과 함께 등록하였다.
永慕殿由來記 附 秋益漢事蹟
영모전 유래기에 추익한 사적을 붙이다
莊陵史略 附記板華 李揆眞編輯(장릉사략 부기판화 이규진편집)
간략하게 기술한 장릉역사는 이규진(李揆眞)이 수집한 자료를 엮어 판화에 기록하였다.
永慕殿 在 寧越郡衙(영모전 재 영월군아) 영모전은 영월군 관아(官衙)에서
正北五町(정북오정) 정북 쪽으로 오정(五町) 거리에 있다.
邑之主龍鉢峯(읍지 주룡발봉) 읍의 주산(主山) 줄기는 발봉(鉢峯 鉢山)이고,
南麓古松(남록고송) 남쪽 기슭에 오래된 소나무와
老栢圍列之間(노백위렬지간)잣나무가 나란히 에워싸고 있는
有一宇古殿其(유일우고전기) 유일한 집은 옛날의 궁전(宮殿)같기도 하다.
中央正堂 重說 層段壁閤(중앙정당 중설 층단벽합) 본채의 층단과 쪽문이 있는 중심에
奉安一位 御像着(봉안일위 어상착) 임금의 형상을 봉안하였다고 거듭 말했다.
袞衣 儼然 南面 踞坐於龍床之(곤의 엄연 남면 거좌어용상지) 용상은 남쪽을 향하여 걸터앉아 계시듯 하였고,
上郡之古 老相傳是(상군지고 노상전시) 군내의 원로들이 이를 단종대왕의 어상이라고 전하여 왔다.
端宗大王 御像據其由來(단종대왕 어상거기유래) ‘단종대왕의 어상’이다 는 유래의 근거는
則 往昔大王臨御是郡不意遭變(즉 왕석대왕임어시군불의조변)
옛날에 대왕이 영월군에 계셨는데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변을 당하시니 영월의 백성들은 추모함을 감당할 수 없어
郡民不勝追慕 深切因設殿宇 誠敬信仰(군민불승추모 심절인설전우 성경신앙)
영월의 백성은 추모함을 감당할 수 없어 깊은 절실함에 전당(殿堂)을 세우고 신앙처럼 정성을 다하여 공경함은
王猶如在所以(왕유여재소이) 왕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 같이 여겨
遠近士女 無不敬慕(원근사녀 무불경모) 원근에서 존경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惟久惟深是殿之 當時建設(유구유심시전지 당시건설) 옛일을 헤아려 생각하니 당시에 전각을 지었는데
雖非典禮公式(수비전례공식) 비록 제도와 제례의 공식은 아닐지라도
旣自四百餘年前(기자사백여년전) 이미 400여 년 전부터
崇奉信仰如是(숭봉신앙여시) 신앙처럼 숭배하여 받들었다.
尊敬舊蹟不可歸諸荒廢(존경구적불가귀제황폐) 존경스러운 유적을 황폐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
丁卯春(정묘춘) 정묘(1927)년 봄에
彰節書院 院任相議 出謨修補(창절서원 원임상의 출모수보) 창절서원의 임원(任員)과 의논하여 보수하고
殿宇奉額 永慕殿(전우봉액 영모전) 전각에 현판을 받들어 걸었는데 ‘영모전(永慕殿)’이라 하였다.
參照 참조
陰崖記曰(음애기왈) 음애기(陰崖日記)에 이르기를
邑人至今哀痛 設祭物以祭之(읍인지금애통 설제물이제지)
“고을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애통해 하고 제물을 차려 제사지내며,
至於吉凶禍福 亦皆就祀云云(지어길흉화복 역개취사운운)
심지어 길흉(吉凶)이나 화복(禍福)을 당해서도 모두 여기 나가서 제사지낸다.”고 했는데,
李耔 成宗朝文臣(이자 성종조 문신) 이자(李耔)는 성종 때의 문신이다.
奉安御像年久 毁損隨壞修補(봉안어상년구 훼손수괴수보)
받들어 모신 임금의 형상(御像)이 오래되어 훼손된 것을 보수하였지만
殆無原形(태무원형) 원래의 형상이 거의 없어
庚午春 描御幀奉安(경오춘 묘어정봉안) 경오(1930)년 봄에 임금의 영정(影幀)을 그려 봉안했는데
邑人唯加崇奉(읍인유가숭봉) 읍내(邑內)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 우러러 공경하며 받들었다.
秋益漢 事蹟 추익한사적
世祖元年丙子端廟遜位(세조원년병자단묘손위) 세조원년 병자에 단종께서 임금의 자리를 양위하시고
駐蹕本郡淸泠浦未幾移御于觀風樓或咏子規祠以送 (주필본군청령포미기이어우관풍루혹영자규사이송)
영월 청령포로 오시는 도중 잠시 머무르니 오래되지 않아 관풍헌으로 어가를 옮기시니 때로는 자규시를 읊어
愁寂或於淸晨龍袍踞榻召見村民伊時(수적혹어청신용포거탑소견촌민이시)
시름과 쓸쓸함을 잊으시고 혹은 맑은 새벽에 임금의 예복 그대로 석탑에 걸터앉아 시골 백성을 만나 보실 때
益漢以草蓬微民(익한이초봉미민) 익한이 오막살이 보잘것없는 서민으로서
自拔忠義(자발충의) 스스로 충의에 분발하여
梅摘山薁(매적산먹) 매양 산머루를 따서
封筐進獻則(봉광진헌칙) 대광주리에 담아 올려드린 즉
端廟必觧顔嘗味(단묘필연해안상미) 단종대왕께서 과연 활짝 웃음으로 맛보시고
而嘉尙其忱隱然有君臣之義(이가상기침은연유군신지의)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시자 은연히 군신의 의가 있으셨다.
翌年丁丑霜薁方 甘將復(익년정축상욱방감장복) 그 이듬해 정축년에 서리 맞은 머루가 달고 잘 익어 다시
封獻路當蓮溪忽瞻(봉헌로당연계홀첨) 다시 머루를 올리려 할 새 연계로 가는 길에서 만나서
端廟乘白馬騰蹋向東(단묘승백마등답향동) 단종대왕이 백마를 타시고 동쪽을 향하여 달리시는지라
益漢 惶恐恐伏(익한 황공공복) 익한이 황공하여
於馬首獻薁則(어마수헌욱칙) 말머리에 의지하여 머루를 올린 즉
下敎曰(하교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不復嚼此果(불복작차과) ‘이 과일을 먹을 수 없으니
往置我舊所而(왕치아구소이) 가서 내가 있던 그 전 장소에 두고
卽隨我我(즉수아아) 즉시 나를 따르라.
今向太白山矣(금향태백산의) 나는 지금 태백산으로 향한다.’고 하시거늘
益漢惶憾罔措(익한황감망조) 익한이 황공하고 불안하여 갈팡질팡하면서
卽入郡探視則(즉입군탐시칙) 즉시 영월부에 들어가 염탐하여 본즉
端廟已遇變(단묘이우변) 단종대왕께서 이미 변을 당하시고
矣峯只有風籟(의봉지유풍뢰) 다만 산봉우리에는 쓸쓸한 바람 소리만 있고
蕭瑟聲容莫攀(소슬성용막반) 음성과 모습을 가늠할 수 없어
益切蒼梧之感因(익절창오지감인)
창오지감(倉梧之感:순임금을 창오산에 장사지낸 느낌)보다 더 애절할 정도였다.
經數宿而夢見端廟(경수숙이몽견) 그 후 두어 밤을 지나 꿈에 단종대왕을 뵈올 때에
莞爾而下命曰(완이이하명왈) 미소를 지으시며 하령하시기를
吾已安矣汝其還矣 自玆還歸(오이안의여기환의 자자환귀)
‘나는 이미 편안하니 너는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無日不東向痛哭(무일부동향통곡) 그 후부터 날마다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杜門終身云(두문종신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일생을 마감하였다 한다.
嗚呼(오호) 아! 슬프다.
馬上隨我之命(마상수아지명) 마상에서 나를 따르라던 명령과
夢中汝還之敎的是(몽중여환지교적시) 꿈속에서 너는 돌아가라는 가르침은 확실히
端廟之精靈有不隨形而(단묘지정령유부수형이)
단종대왕의 정결하신 신령이시니 형체를 따르지 않고 흩어질 수 있으랴?
散者歟抑益漢(산자여억익한) 익한의 정성이
之芹蔡黴忱洞(지근채미침동) 천지에 환히 통해져서
徹天壤而無間(철천양이무간) 저승과 이승이 서로 가까워 틈이 없이 되었다.
於幽明者歟如益漢 眞可謂 千古孤忠(어유명자여여익한 진가위천고고충)
익한과 같은 이는 참으로 천고에 뛰어난 충성이라 이를만하니
其遺蹟不泯(기유적부민) 그 남긴 자취가
於秋氏之家(어추씨지가) 추씨가문에 간직되어 있는 것과
藏及邑民之相傳(장급읍민지상전) 읍민이 서로 전하여 왔건만
而惜其 未及褒著於世也右(이석기 미급포저어세야우).
세상의 현저한 초상이 미치지 못한 것이 애석하도다.
庚午三月十五日 경오(1930년) 3월 25일
依原文 板刊謹揭(의원문 판간근게) 원문에 따라 널빤지에 새겨 공손히 걸다.
彰節書院長 嚴夏鉉 창절서원장 엄하현
御幀奉安時(어정봉안시) 임금 영정을 봉안할 때
自秋公後裔門中 特捐七拾圓(자추공후예문중 특연칠십원) 스스로 추공의 후예 문중에서 70원을 특별히 기부하다
金以助修補之用(금이조수보지용) 이 돈으로 허름한 곳을 고치고 갖추지 못한 데를 기우는데 사용하였기에
謹記于玆以表其誠焉(근기우자이표기성언) 정중히 기록하여 그 정성을 마땅히 밝힌다.
【출처. 참고. 인용】
『영모전 게첨 판각기문>, 『창절서원지』사단법인 영월창절서원 201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한국고전번역원』, 『한자사전』. 『영월의 현판』 2021.12.10. 영월문화원발행 171쪽.
註(주) : 秋益漢事蹟(추익한사적)은 홍직필(洪直弼) 의 <상동민전 경진(上東民傳 庚辰)> 의 내용에서
“산과일(머루)과 백마를 타신 임금의 혼령을 만났다”는 부분이 동일하다.
【용어 설명】
1. 이규진(李揆眞), 1930년대 영월군수.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이 원적지이자 출신지.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년도인 1909년 11월에 강원도 춘천부 주사에 임명되어 관계에 입문.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병합으로 조선총독부 체제출범. 총독부 소속 관리 1912년부터 강원도 홍천군에서 군서기. 이후 강원도 내무부와 이천군 근무. 이천군 서무주임으로 재직하던 1922년에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양양군, 김화군, 영월군, 이천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 이후 다시 김화군 군수에 임명, 홍천군수를 마지막으로 1935년에 퇴관. 홍천군수이던 1934년을 기준으로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천황 즉위를 기념하는 쇼와대례기념장도 받은 바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고 문헌]이규진(李揆眞) - 국사편찬위원회
2. 정 町 거리의 단위. 1정은 1간(間)의 60배로 약 109미터. 땅 넓이의 단위. 1정은 1단(段)의 10배, 곧 3,000평 약 9,917.4㎡.
3. 이자(李耔) : 1480년(성종 11)~1533년(중종 28). 조선전기 한성판윤,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 연산군 난정에 환멸을 느껴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교리.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 이듬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 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이자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이자(李耔)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이자(李耔)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홍직필(洪直弼) 1776년(영조 52) ~ 1852년(철종 3) 조선후기 『매산집』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서울 출신.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 때 동궁(東宮)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1838년(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극력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주리파(主理派)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5. 上東民傳 庚辰(상동민전 경진) : 1820년에 홍직필(洪直弼)이 찬술한 <영월지방의 위쪽 동녁에 살고 있는 어느 사람의 이야기(傳)>이다. 원문은 梅山先生文集卷之五十一(매산선생문집 51권) / 傳(전)에 실려 있다. 요약하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거니와 성씨조차 분명치 않다. 다만 영월부 상동면에 살았으므로 ‘상동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고을로 향하고 있었는데 탄부곡炭釜谷[혹자의 말에 의하면 금강錦江 가에서 상왕을 만났기 때문에 그곳을 성조포聖遭浦 라 명명했다고 한다]에 이르렀을 때 단종께서 백마를 타고 치달리듯 올라 오셨다. 깜짝 놀란 그는 괴이하게 여기며 길가에 엎드린 채 “전하께서 장차 어디로 행차하시기에 이쪽 길로 가십니까?” 라 물었다. 단종께서는 그를 돌아보며 “나는 태백산太白山으로 가는 길이다.” 라 대답하셨다. 그가 보따리를 풀어 산과일을 바치자, “지금은 먹을 수 없구나.”라 말씀 하셨다. 단종께 공손히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덕포德浦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단종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목이 메도록 애끓게 통곡하였다. 10여 리를 걷는 동안 입에서 곡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는데 목소리와 기운이 모두 소진되자 곧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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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慕殿由來記 附 秋益漢 事蹟
莊陵史略 附記 板華 李揆眞 編輯
永慕殿 在寧越郡衙正北五町 邑之主龍鉢峯南麓古松老栢圍列之間 有一宇古殿其中央正堂重說層段壁閤
奉安一位御像着袞衣儼然南面踞坐於 龍床之上郡之古老相傳是
端宗大王御像據其由來則往昔 大王臨御是郡不意遭變郡民不勝追慕深 切因設殿宇誠敬信仰
王猶如在所以 遠近士女無不敬慕惟久惟深是殿之當時建設雖非典禮公式旣自四百餘年前
崇奉信仰如是尊敬舊蹟不可歸諸荒廢 丁卯春彰節書院院任相議出謨修補殿
宇奉額永慕殿
參照
陰崖記曰 邑人至今哀痛設祭物以祭之至於吉凶禍福亦皆就祀云云 李耔成宗朝文臣
奉安御像年久毁損隨壞修補殆無原形 庚午春描御幀奉安邑人唯加崇奉
秋益漢 事蹟
世祖元年丙子 端廟遜位 駐蹕本郡淸泠浦未幾移御于觀風樓或咏子規祠以送
愁寂或於淸晨龍袍踞榻召見村民伊時 益漢以草蓬微民 自拔忠義 梅摘山薁
封獻路 當蓮 溪忽 瞻端廟乘白馬騰 蹋向東 益漢 惶恐恐伏 於馬首獻薁則 下敎曰 不復嚼此果 往置我舊所而 卽 隨我我 今向 太白山矣 益漢惶憾罔措 卽入郡探視 則端廟已遇變 矣峯只有風籟 蕭瑟聲容莫攀 益切 蒼梧之感因 經數宿而夢見 端廟莞爾而下命曰 吾已安矣汝其還矣 自玆還歸 無日不東向 痛哭 杜門 終身 云 嗚呼 馬上隨我之命 夢中汝還之敎的是 端廟之精靈有不隨形而 散者歟抑益漢 之芹蔡黴忱洞 徹天壤而無間 於幽明者歟如益漢 眞可謂 千古孤忠 其 遺蹟不泯 於秋氏之家 藏及邑民 之相傳 而惜其 未及褒著 於世也右
庚午三月十五日 依原文 板刊謹揭
彰節書院長 嚴夏鉉
御幀奉安時 自秋公 後裔門中 特捐七拾圓
金以助修補之用 謹記 于玆以表其 誠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