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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유형문화재 제7호( 1975년 3월 12일 지정. 성읍리가 1984년 6월 12일 우리나라 국가민속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으므로 제주도 문화재에서는 2012년 5월 해제되었다)
위치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09-1번지
시대 ; 조선 초기
유형 ; 관방유적
조선시대 현(縣)의 규모를 살펴보면, 현감(縣監, 從6品), 지방민을 대표하여 수령을 보좌하는 유향소(留鄕所=鄕所廳=鄕廳, 座首 1인, 別監 2인), 현사(縣司), 훈도(訓導=敎官), 향교 유학생도(儒學生徒) 30인, 관둔전(官屯田) 12결(結), 늠전(廩田)으로 아록전(衙祿田) 40결과 공수전(公須田) 15결, 외아전(外衙前)에 書員 18인과 일수(日守) 28인, 관노비 100명, 향교노비 10명 등으로 정해져 있었다. 실제로는 읍세의 융성과 쇠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또한 관아의 소재지인 읍치(邑治)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주위는 성곽으로 둘려있고, 그 안에는 수령의 관아를 비롯하여 각종 관사(官舍), 누정(樓亭), 창고, 옥사(獄司, 刑獄) 향청(鄕廳), 무학청(武學廳), 진무청(鎭撫廳), 가솔청(假率廳), 작청(作廳), 현사(縣司), 사창(司倉), 서별창(西別倉),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평역고(平役庫), 남성루(南城樓), 의두정(倚斗亭), 한동루(漢東樓), 동·서·남대문 등 지방 통치에 필요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지방 관아의 중심이 되는 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客舍),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 등이었다.
정의현을 설치하게 된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태종16년(1416년 5월 6일) 제주 도안무사(都按撫使) 오식과 전 판관 장합 등이 이 지방의 사의(事宜)를 올렸다. 아뢰기를 〈제주에 군(郡)을 설치하던 초기에는 한라산의 사면에 모두 17현이 있었습니다. 북면의 대촌현(大村縣)에 성을 쌓아서 본읍으로 삼고 동서도(東潟)에 정해진(靜海鎭)을 두어 군마를 모아 연변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서도의 도사수(都司守)는 각각 부근의 군마를 고찰하고 겸하여 목장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땅이 크고 백성은 조밀하여 소송이 번다합니다. 동서도의 산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목사가 있는 본읍을 왕래하는 데 단지 걷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농사 때는 갔다왔다 하기에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또 정해진의 군마와 목장을 겸임한 많은 직원이 무지배(無知輩)들을 거느리고 군마를 고찰한다 핑계하고 백성을 침해하여 폐단을 일으킵니다. 혹은 아무 때나 사냥하면서 약한 백성들을 어수선하게 만들지만 목사와 판관이 또한 그 연고를 알지 못하니 어찌 고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해를 거듭하여 커다란 폐단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동서도에 각각 판관을 두되 문무의 재주를 겸하고 공렴정직한 자를 보내어 목장을 겸임하게 하십시오. 이로 하여금 동서 정해진의 군마를 고찰하고 고수(固守)하게 하며, 또 맡은 목장에서 마필 번식의 많고적음과 직원과 목자들이 목양(牧養)을 잘 하였는지 못하였는지를 살피게 하십시오.
판관을 안무사도(安撫使道)의 수령관(首領官)으로 겸차(兼差)하여 안무사는 수령관을 대동하고 타도의 감사(監司) 예에 따라 순행하여 수령들의 근면과 태만을 고찰하고 포폄(褒貶)을 시행하여 이조(吏曹)로 보고한다면 이것이 장치구안(長治久安)의 정책입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 본읍에는 東道의 신촌현, 함덕현, 김녕현과 潟의 귀일현, 고내현, 애월현, 곽지현, 귀덕현, 명월현을 소속시키십시오. 동도의 현감은 정의현으로 본읍을 삼고 토산현, 狐兒현, 烘爐현 3현을 소속시키며, 서도현감은 대정현으로 본읍을 삼아 예래현, 차귀현 2현을 소속시키십시오. 그리고 두 곳의 현감이 만약 감히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공사가 있으면 안무사로서의 의견(議見)을 보내어 결정한 후에 사연(辭緣)을 보고하게 하여 출척(黜陟)의 빙거(憑據)로 삼으십시오. 만약 진상할 마필을 쇄출(刷出)하는 일과 연례의 마적(馬籍) 등의 일은 현감이 소관하는 마필의 이빨·털색깔을 보고하면 안무사가 순행하여 몸소 감독·고찰·시행하게 하십시오. 소관 군관(軍官)과 군인 가운데 천호·백호는 차정(差定)한 연월의 오래고 오래지 않음으로 차등을 두어 현감이 분간하여 보고하고 안무사가 상고(相考)하여 그 전대로 차하(差下)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음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이에 육조와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이조에서 의정부 및 여러 조(曹)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제주에 동서도 현감을 신설하고 목장을 겸임하는 일, 신설되는 현에 각 현을 합속시키는 일, 마필을 번식시키고 순행·고찰하는 일, 천호·백호를 차정하는 일 등은 계본(啓本)에 의하여 시행하십시오. 그 신설한 현감이 정적전최(政積殿最, 다스린 일에 대한 평가)는 도안무사가 다른 영내, 관례(官例)에 따라 그때그때 고찰하여 도관찰사에게 전보하면 도관찰사는 목사 판관의 정적을 아울러 고찰하여 포폄을 시행하십시오. 모든 형옥(刑獄)과 결송(決訟)과 전량(錢糧, 부세(賦稅)와 재정)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제 때에 보고할 수 없으니 시행 후에 사연을 대략 들어 1년에 두 번 감사에게 보고하되 국둔 마필의 번식과 고실(故失) 수도 아울러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여 출척의 근거로 삼으십시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임 현감으로 하여금 모월 모일 모시에 말을 타고 출발하여 만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오름과 내를 두 현의 경계로 하도록 지시했다. 대정현의 보성과 정의현의 고성에서 출발하여 둘이 만난 곳이 지금의 하원동이라고 하며 고군산과 가래천이 경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태종17년 정의현감 이이(李貽)는 전라도 관찰사를 통하여 당시의 실정을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으라는 교지가 있사오나 이 곳에 합속된 4현이 한라산 남쪽에 연달아 있어 만약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는다면 호아현, 홍로현은 거리(相去)가 3식(1息은 30리)이 남짓하므로 그 곳 백성이 왕래하며 공사나 목장을 고찰하는 일 등에 있어서 그 폐가 적지 않으니 정의의 중앙지인 서촌 진사(眞舍, 晋舍)나 토산(土山) 중에서 지리가 적당한 곳에다 읍성을 설치하고, 만약에 방어할 경우라면 현감은 순풍인 때 군대를 이끌고 정의진에 이르러 고수방어(固守防禦)하게 하십시오.〉라 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5년 후인 세종4년(1422) 12월 도안무사 정간에 명하여 정의성을 진사리로 옮기도록 하고, 그 이듬해인 세종5년에 3읍 백성을 出役시켜 제주목 판관 김치겸이 감독하여 석축을 했다. 당시 성의 주위가 29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었다. 한편, 1653년 이원진이 엮은 탐라지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피하여 현 치소를 옮겼다고 하였으나 옮긴 이유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세종5년(1423) 정월 9일에 착공하여 동 13일에 준공하였는데 周 2520尺, 高 13尺이라 하였다.
현청은 세종25년(1443) 현감 송섬(宋暹)의 재임시절에 건축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증·개축이 이루어졌으나 확실한 연대는 고증할 수 없고, 홍유손(洪裕孫)의 문집 소총유고(篠䕺遺稿)에 정의관사중신기가 남아 있다.
《旌義官舍重新記》(정의현 관사를 다시 새로 지음에 부쳐)
〈집이라는 것은 바람을 막고 비를 가리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래되면 다시 고쳐 지어야 하고 헤어지면 이어야 한다. 새로 짓거나 잇지 않고도 오래도록 무너지지 아니함은 드물다.
이 고을의 공해(公廨)가 지은 지 오래되었다. 어찌 이곳엔들 거센 바람과 줄기찬 비가 내릴 때가 없겠는가? 그 때에 서까래와 기둥이 썩어 꺾이지 않겠는가? 이 때에 무너지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지금 현명한 읍재(邑宰) 김종준(金從俊=敬俊) 현감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거의 임기가 다할 즈음 관청집들을 올려다보며 항상 한숨을 쉬어 마음 속에 불평이 있는 듯하였다. 고을 안의 양가의 큰 가문에서 관아에 벼슬하는 자들이 모두 엎드려 그 이유를 물었다. 현감이 말하길 “내가 이 고을에 와서 관청집들을 바라보며 무너진 것을 고치고 오래된 것을 새로 지으려 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일을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인가, 내가 근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라 했다. 모두가 대답하기를 “어찌 명부의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한 다음에 짓는 데 어려움이 없음을 건의하고는 즉시 밭가는 소를 몰고 산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 끌고 왔는데 며칠 안에 집을 지을 재목이 관청 뜰 밖에 언덕 같이 쌓였다.
현감은 이에 창고를 열어 쌓인 곡식과 재화를 풀었다. 그리고 입번한 군졸과 관청에 적을 둔 목수, 도끼질하는 이, 톱질하는 이, 대패질하는 이, 돌을 쪼는 이, 먹줄을 놓는 이자로 재는 이가 둘러서서 모두 힘을 다하여 한 달을 넘기지 않아 관아의 동서 객사와 중대청과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대문, 외대문과남장랑과 현감의 침실 부속건물과 객사의 동헌·서헌의 대청과 좌우 협실과 남행랑 여러 칸을 환하게 바꾸어 놓으니 높고 낮고 넓고 좁음이 법도에 맞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널찍하고 높직하여 옛 건물에 비하여 풍족한 형세가 굉장하나 많은 사람이 보기에 사치스럽지 않았다. 관사와 공해는 모두 기와와 판자로 수리하였으니 섬돌은 놓지 않고 울담을 쌓아 제도에 맞게 하였다.
읍민들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고, 하찮은 백성들과 과부들은 관청에서 공사를 일으킨 줄을 몰랐으니 백성들의 힘을 아꼈기 때문이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 힘써 준 문중의 부노들을 모아 가지런히 앉아 기름진 고기를 먹고 맛좋은 술을 마시며 낙성연을 베풀었다.
아! 관청집이 허물어짐을 보고 편안히 근심하지 않고 또 공무가 바빠서 수리할 수가 없다 하여 포와 곡식을 담아 두고 능히 수리하지 않으면서 자못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 현감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인가! 현감은 관청집 짓기를 자기 집 짓 듯하고 하천한 백성 대하기를 적자와 같이 하니 자애롭고 상명한 재능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리오.
현감은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벼슬하여 대마도의 연도를 지냈고, 장군이 되어 말갈의 부락을 정벌하였고, 지방관이 되어서는 탐라의 옛 나라를 둘러보았으니 천하를 두루 둘러보았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고도 지식이 부족하고 재량이 뛰어나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 관아를 중신한 것은 여사일 뿐이다. 현감이 이고을에서의 치적은 환히 드러나 없어지지 않고 현민(縣民)의 입에 오르내려 문자를 빌지 않아도 또한 마땅한 것이다. 이 고을의 건치연혁은 이미 승람에 드러나 있으므로 췌언(贅言)하지 않는다.
※홍유손(洪裕孫) : 본관은 남양(南陽=지금의 경기도 화성).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 가세가 청빈하였으나 경(經)·사(史)를 섭렵하고, 방달(放達)한 기질에 얽매임이 없었다. 과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향리의 역(役)을 벗고자 꾀하지도 않았는데, 성종12년(1481) 남양군수 채수(蔡壽)가 문장이 능한 것을 보고 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자 곧 영남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이 때 김종직은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긴 바를 알고 있으니 학자들은 모두 본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어 바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수업한 뒤, 서울로 돌아와서 김종직이 시사(時事)를 아뢰지 않는 것을 보고 비판하였다. 단종3년(1455)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길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는 세상을 희롱하여 고답(高踏)하면서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당시의 명류 김수온(金守溫)·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 등과 특히 가깝게 지내면서 죽림7현을 자처하고 노자(老子)·장자(莊子)의 학문을 토론하며 시율(詩律)을 나누었는데, 남효온은 그를 평하여 “문(文)은 칠원(漆園) 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涉).”고 하였다.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 하여 제주도에 유배되고 노비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조선시대에 매우 특이하게 76세에 처음으로 처를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어 지성(至誠)이라 이름하였다. 중종24년(1529)에 사망하였으므로 99세까지 장수하였다. 저서로는 『소총유고』가 있다. 소총유고는 순조10년(1810) 8세손 술조(述祖)가 편집,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관사는 초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하기 때문이다. 중종20년(1525) 9월에 제주목사 김흠조가 올린 소장(訴狀)이다.
〈정의 대정 두 현의 공해(公廨)와 국고(國庫)를 모두 띠로 이었으니 만일 불이 나서 연달아 붙는다면 어떻게 끌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을묘년(연산군1, 1495)에 정의에서 불이 나서 두 창고의 잡곡이 거의타서 자그마치 1만3천5백 섬이 재가 되고 남은 것은 5천여 섬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난 날의 큰 경험입니다. 이미 불이 나는 사고를 겪었는데도 오히려 교훈을 찾지 않고, 기와로 지붕을 덮어 궂은 비와 화재를 미리 막지도 않고 또 띠로 지붕을 인다면 해마다 집을 이느라고 백성들의 노력만 헛되게 하여 끝없이 폐단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기와를 굽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만일 공천(公賤)에게 두 해치의 신공(身貢)을 면제해 주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동원되어 그 일을 맡아 하게 한다면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기와를 구워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두 고을의 창고와 관아를 모두 기와로 덮게 되어 영구히 화재도 없앨 수 있을 것이고 오랫동안 쌓여오던 백성들의 폐단도 그에 따라 없어지게 될 것이니 어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장구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신공이 비록 나라의 경비에 긴요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한두 동(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 고을에서 말 값으로 받아서 저축해 넣은 수효가 900여 동이나 되는데 회계(會計)만 해서 그대로 묵히고 있으니 아무리 두 해의 신공을 소비한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손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기와로 바꾸었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정의현 관아는 객사(客舍), 중대청(中大廳)과 좌우 부속 건물, 중대문, 외대문, 남장랑(南長廊), 공아의 침실과 부속 건물, 동서 양헌(兩軒=날개 칸)의 대청과 좌우의 협실, 남행랑 등이었다고 전한다. 규모는 모두 약간 칸의 건물이라 하였지만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선조34년(1601)에 왔던 김상헌(金尙憲) 어사나 숙종6년(1680)에 왔던 이증(李增) 어사가 순력 때 묵었다는 정의현 객사는 바로 이들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현은 숙종28년(1702)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정의현의 당시 민가 호수가 1,436호, 성수비군이 664명, 말 1,1178필, 흑우 228수를 보유할 정도의 상당히 번성하였던 읍성이었다. 탐라순력도의 〈정의조점(旌義操點)〉〈정의양노(旌義養老)〉〈정의강사(旌義講射)〉 등의 그림을 보면 원래 정의현의 내아 건물은 성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중앙정청을 중심으로 남쪽에 문을 두고 이를 포함하여 모양 회랑식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헌상 정의읍성내 동헌에 대한 기록은 『탐라지』(1652년)에는 衙(아)로, 『증보탐라지』(1765~1766년)에는 近民軒(근민헌), 『정의현지』(1780~1789년)에는 縣衙(현아), 『탐라지초본』(1842년)에는 日觀軒(일관헌)으로 변화하였다.
『증보탐라지』에는 “客舍東軒在城中央○…衙在客館北有近民軒卽東軒(객사동헌은 읍성의 중앙에 있다. … 아(衙)는 객관의 북쪽에 있으며 근민헌이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동헌이다)”이라고 돼 있다.
기록으로 나타난 근민헌은 이에 앞선 사료엔 아(衙)로만 등장하지만 후세에 나타나는 일관헌과 달리 동향으로 앉혀져 있다. 숙종조에 이형상이 펴낸 「탐라순력도」〈정의조점〉과 〈정의양노〉에는 근민헌으로 보이는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료에 일관헌이라고 등장하는 건 이보다 한참이 지나서다. 헌종8년(1842) 자료인 「탐라지초본」에 일관헌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고, 이후 일제를 거치며 원형이 훼손됐다. 근민헌이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100년 후에 나오는 셈이다.
광무2년(1898) 강인호(康仁鎬) 군수가 중수하고, 광무7년(1903) 홍종우(洪鍾宇) 목사가 '왕시현감정당(往時顯監政堂)'이라 편액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동회랑에 책실이 있었고, 안쪽으로는 현감의 관사인 내아(內衙)가 있었다. 바로 전면에 내삼문(內三門)이 있었고 삼문 밖에 통인방(通引房)과 사령방(使令房)이 있었다. 공사(公事)가 없을 때에는 줄에다 요령을 매달아 통인을 부르는 신호로 삼기도 하였다. 본래 내아는 없었는데 연산군11년(1505)에 본도 관원에게 가족을 동반하여 부임할 것을 허락하면서부터 대개 현감이 가족을 대동하고 부임하였기 때문에 지어졌다.
일관헌(日觀軒)이라는 편액의 뜻은 해를 가장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신성시하는 태산(泰山)의 정상 동쪽에 해맞이하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일관봉이라 부르므로 그에 따랐다고도 하고, 또 해는 임금을 뜻하므로 임금님을 곁에 모시고 있는 듯이 바른 정사를 편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과는 다르게 개조되었고 면사무소로 이용하다가 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해방 후에도 골 함석 지붕으로 개조되어 사용해 오다 남아 있던 함석지붕 건물을 토대로 1975년 시멘트 기둥을 사용하여 새로 지었다.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이며 2층 기단석 위에 축조되었다. 건물의 좌향은 서북편에 영주산을 뒤로 하여 남동향하고 있다. 사방으로 창호문을 시설하였고 退는 개방하고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측면은 현무암으로 마감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이었다. 즉, 성읍민속마을의 상징적 건물인 일관헌은 복원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관헌은 지난 1975년 3월 12일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왔으나 성읍민속마을[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의 중심이 되는 관아 일대에 위치하고 있고, 이미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통합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보존전승을 위하여 지난 2012년 5월 23일에 도지정문화재의 지정을 해제하였다.
2001년 정의현 내아지 발굴 결과 건물지 5동, 수혈유구 4기, 기타 적심석(積心石, 축석의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돌)과 소토유구 등이 확인되고 분청사기와 백자편이 다량 출토되었을 뿐 중심 건물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고, 일관헌의 남쪽으로 문화층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변에 대한 확장 발굴이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적심석군은 중심건물인 정청의 동편에 있던 회랑식 건물지로 추정했다.
2011년 8월 7일 태풍 무이파에 의해 제주도 기념물 161호로 지정된 팽나무가 밑동에서 부러지면서 일관헌 오른쪽 지붕을 덮쳤다. 그래서 지붕 일부가 파손되었다.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사업비 1,101백만원으로 건물철거, 발굴조사, 토지매입, 건물복원 등의 사업을 추진됐다. 이에 2012년에 문화재청과 협의하여 국비를 지원받고, 일관헌의 원형을 밝혀 복원하기로 하였다.
제주도는 정의현 관아건물을 복원하기 위해 31필지 16,995㎡를 매입하고, 2014년 5월 추가 발굴조사용역을 발주, 발굴조사 결과에 의거 향청(鄕廳), 무학청(武學聽), 진무청(鎭撫聽), 작청(作廳), 군기고(軍器庫), 형옥(刑獄), 의두정(倚斗亭의) 등 관아건물 복원 따른 전체적인 계획을 확정해 성읍민속 마을 옛 정의현의 역사문화 경관을 회복하고, 문화관광명소가 될 수 있도록 정비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해 마무리 할 계획이다. 객사는 이미 2001년 복원되었다.
중앙문화재위원 등 관계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그 동안 일관헌으로 불려 왔던 건물이 조선시대 제주정의현 시절의 관아인 근민헌임을 확인하고, 지난 2012년부터 지난달까지 문화재청의 지원 받아 건물철거, 발굴조사, 토지매입, 건물복원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복원사업은 2012년 12월부터 2014년 5월말까지 진행됐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다. 건물 정면에 〈近民軒〉이란 편액을 달았다. 김제, 밀양, 청주 관아 이름도 근민헌이었다.
경내에는 채수강의 비와 강우진의 비가 있다. 채수강은 광무6년(1902) 8월부터 융희2년(1908) 3월까지 정의현감으로 근무했다. 강우진은 강이철의 후임으로 정의군수를 역임(재직기간 미상)하였다. 강우진은 고종1년(1864) 12월 전라도 운봉현감으로 부임하여 고종4년(1867) 7월까지 재임하였으며, 고종4년(1867)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정현감으로 재임하였다.
《작성 041031, 보완 170222, 26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