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대통령 각하!! 사업종자돈 500만 원만 빌려 주십시오"


(1)
식탁에 함께 앉아서 들려 주는 할머니 자신의 기구했던 운명의 이야기는 기가 찼다.
“제 이야기요. 관광공사에서는 아름답게만 표현했지만, 장편소설로 만들자면 한
편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라고 하신다.
수많은 역경을 넘고 넘은 많은 이야기 중에서 청와대에다 이판사판으로
편지를 띄웠던 이야기는 재미를 넘어
할머니의 두둑한 배짱을 읽을 수 있어 재미 있는 대목이었다.
세상 어디를 둘러 보아도 의지할 곳 없는 홀로 된 여인이 어린 4남매를 잘
키워야겠다는 강한 의지로
청와대에다 “종자돈 500만 원만 빌려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1983년의 일로,
“귀하가 살고 계시는 행정관서에 의뢰하십시오” 라는 짧은 회신을 받은
얼마 후 면사무소 직원이 찾아왔다.
“아주머니!! 왜 불가능한 일을 만들어 우리만 곤란하게 만드십니까”라고
짜증을 내면서 10만 원의 위로금을 건네 주고 갔다고 한다.
‘이왕지사 빼어 든 칼’인데 하면서 청와대로 또 다시 편지를 띄웠다.
면사무소 직원이 다시 찾아 와서 생활계획서를
대신 작성해 주고 동네 이장의 보증으로 성남의
제일은행으로부터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200만원을 대출받게 해 주었다.
(2)
은행 대출금 200만원으로 장사를 본 궤도에 올리던 싯점의 어느 날,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진솔한 삶'을 소개하는
한 TV 프로를 보다가 문득 출연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방송국 프로그램 담당자와 전화 연결이 되었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입니까?"는
물음에 "노래 부터 한 곡조 뽑겠다" 하고는 거침없이 '찔래꽃'을 불러 댔다는 것이다.
얼마 후, 드디어 그토록 원했던 TV 출연을 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소머리국밥 한 그릇 먹겠다고 멋쟁이 옷차림의 신사들이 문전에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고 경찰이 나와 사람과 자동차 정리를 도와 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정말 이게 꿈이 아닌가, 했지만 하루에 소머리국밥 수백 그릇을 팔게 된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동안 일수로 30만 원을 빌렸던 사람에게는 50만 원을, 50만 원을 빌렸으면
70만 원을 갚았다. 종업원들에게는 두둑한 수당도 지급했다.
(3)
그러나 세상만사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세무서에서 세무조사가 나오고 주변의 박수와
질시의 눈총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 주변의 질시를 참아 내기가 너무나 힘들던 차,
거액으로 업소를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넘기는 과정에서 무지의 소치로 엄청난
양도세를 물게 되었고, 또다시 그 어려웠던 지난 날로 회귀하게 되었던 일...
온갖 시련을 다 딛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 선 지금, 이제는 건강이 옛 같지 않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이제, 쉬면서 편하게 살라고 권유을 한다지만 "놀아 본 사람이 잘 논다" 고,
"놀줄을 몰라 놀 수도 없다"는 할머니다.
평생을 죽어라고 일만 하며 살아오던 삶 그대로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며 살겠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쓸쓸함이 엿보여 안타까웠다.
모든 종업원들과 똑 같은 복장으로 똑 같은 일을 하시면서 젊은 사람 못지 않게 매일매일
활기 차게 살아 가시는 할머니의 남은 여생에 건강과 영광 있으시기를 빈다.
첫댓글 아래 사진 / 최미자 할머니와 따님 (식당 커운터에서)
위 사진 / 식당야경. 처음 취재를 갔던 날 오후 낮시간 자연광속에서 찍은 사진이
'영 아니였기에' 다음 날 밤 시간, 다시 찾아 갔다.
내가 터득한 바로는 일몰의 자연광이 남아 있는 싯점, 조명된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 가장 이상적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 시간, 현장에
도착하질 못했다. 딱했다. 날씨는 몹씨 추웠는데, 남들 보기에 '미친 작
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는 이 사진이 수 만장으로 책에 실렸다.
글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