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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으로 생(生)은 완벽하지 않다
-5월의 독서일지(24.05.04~05.24)
*1일차
바깥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다. 도서관에 가다말고 돌아와 차를 끌고 간다. 어제 아내와 같이 도시 내 트래킹(Trekking)을 하느라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에 발목에 이상이 온 것이다.
도서관 1층에는 많은 젊은 부모들이 로비에 설치된 앙증스런 의자에 앉아 독서중이다. 책을 빌려 대출관리기 앞에 섰는데 앞선 부부가 반납하려는 책이 30권이 훨씬 넘는 터라 놀란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책을 한 번에 빌리고, 아무튼 기한 내에 다 읽고 가져온 걸까?’
항상 가는 역사교양 코너에서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과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을, 바로 이웃한 코너에서 《사서 일기》와 《나의 퓨마의 나날들》을 뽑아 든다.
고전 문학의 장편 소설이 댕겨 지난 번(4월의 독서)에 재미를 봤던 《서머싯 몸 단편선 2》에 이어 《서머싯 몸 단편선 1》을 빌리고, 이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일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처음 보는 작가인 ‘페르난도 바예호’의 《청부 살인자의 성모》를 대출한다.
지난번처럼 도합 8권인데,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대출기한인 3주 정도의 기간에 맞추어 적당히 긴장감을 유지하며 읽어낼 수 있는 한도이다.
모르는 작가들도 많아 이번 달 라인-업을 대충 훑어본다. 먼저 ‘페르난도 바예호’는 남미 콜롬비아 작가로 스페인어 권에서는 명성이 대단하다. 일본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다섯 살이던 1960년에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했고 영어로 작품을 썼다. 1989년에 이 책 《남아 있는 나날》로 이미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2017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로 영미권 문학의 거장으로 칭송받고 있다.
우울증 환자였던 저자가 도서관에서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일으키고 난 후 도서관 이용자를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먹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들을 그렸다는 ‘앨리 모건’의 《사서 일기》, 1989년 중국 천안문 학살을 취재하며 30년 가까이 중국 전문기자로 활약하다 2015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조너선 카우프만’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또한 흥미를 자극한다.
환경 문제에 부쩍 관심이 가는 터에 뽑아 든 ‘로라 콜먼’의 《나와 퓨마의 나날들》은 사라지고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자연의 소중함과 더불어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동물들과의 교감을 이루며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기에 충분할 것 같다. ‘조선 후기’의 ‘한국 사학’ 연구자인 ‘이철성’ 박사님의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 또한 나날이 서구화되어 가며 빠르게 전통과 그 정체성에 있어서 희미해져가는 우리의 터전 ‘한국’에 대해 기억을 새롭게 하고 그 의미를 다져보는 알찬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과 모든 것을 소중히 하고 애틋해 하는 부모의 마음의 즐겁고 신나게, 그리고 소중하게 순간의 몰입으로 책에 빠져들 생각이다.
*2일차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린다. 봄비 치고는 많은 양이 내린다고 한다. 아내를 데리고 어딜 나가기는 무리다. 차량에 먼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했는데 이참에 봄비로 세차를 할까 싶다. 그리고 소설 《남아 있는 나날》에 파묻히기로 한다.
책을 여러 권 한 번에 빌려놓으면 흔히 하는 버릇이 있다. 이 책을 읽다 잠시 지루하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책을 들어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그런 식으로 전부 일시적 스캔을 거치다 보면 나중에 읽지 않는 책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책 읽는 순서를 미리 정해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 읽을 요량이다.
1)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2)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 - 이철성
3) 《사서 일기》 - 앨리 모건
4) 《나와 퓨마의 나날들》 - 로라 콜먼
5)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6) 《서머싯 몸 단편선 1》 - 서머싯 몸
7)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 조너선 커우프만
8) 《청부 살인자의 성모》 - 페르난도 바예호
-어느 누구나 ‘위대한’ 집사라고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마셜 씨나 레인 씨 같은 사람을 보게 되면 그저 무작정 유능하기만 한 집사들과는 다르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데 거기에 가장 근접하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 바로 ‘품위’라는 단어다. (<첫날 저녁 : 솔즈베리> 중에서)
자신이 집사로 있던 ‘달링턴 홀’이라는 대저택의 주인이 영국인에서 미국인으로 바뀌며 새 주인이 주인공에게 연료비를 대줄테니 잠시 휴가를 다녀오라는 제의를 받고 국내(영국)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소설을 쓴 일본이 출생지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의 나이 다섯 살이던 1960년에 영국으로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의 영국으로 그의 나이 34살이던 1989년에 이 작품 《남아 있는 나날》을 발표한다.
어릴 때 이주한 낯선 외국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보아온 영국을 내지인처럼 생각하고 느끼며, 차분하게 회고록적인 문체로 어떤 인생(주인공인 집사)에서 삶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영국의 오래고도 깊은 역사를 외국인인 자신의 내면 속에 온전히 체화시켜 생각하고, 영어로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중략)...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첫날 저녁 : 솔즈베리> 중에서)
*3일차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으며
어제같이 비가 종일 내리고 흐린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부부는 둘뿐이다. 드물지만 고층에서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소리를 받아들이고 맑은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해 방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찬물을 한 컵 들이킨 다음에 안방에 있는 저울로 가서 몸무게를 재면 73.5kg이다. 다행이다, 더 이상 몸무게가 늘지 않아야 할 텐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펴들고 계속 읽어 나간다.
주인공 ‘나’는 저택의 새 주인의 배려로 영국의 서부 지역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솔즈베리의 여관에 머물게 된 집사(‘나’)는 향후 새 주인의 요구에 맞춰 인력 관리의 새로운 배치를 기획해야 하는 임무에 골똘해 있는데, 젊은 날 대저택에서 같이 일했던 ‘켄턴’양이 보내온 편지에 적힌 사연들을 몇 번씩이나 기억에 떠올리며 되새김질 하듯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다.
인생에서 몇 번 없는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여행-지난날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새 주인의 배려로 시작되었고 영국의 많은 지역을 돌아볼 수 있는,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중에도 ‘나’는 집사로서의 임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가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자연적 경관에서 영국의 ‘위대함’을 느끼듯 영국적인 무엇에든 ‘위대함’이란 깃들어 있으며, 자신의 업무인 집사직에도 ‘직업적 위대함’이 깃들어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하든 허투루 인생과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영국적 가치관이 정립된 신념으로서 ‘집사’라는 직업 또한 유럽에서도 오직 영국에만 있는 것으로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인 독일의 전쟁배상금 지급 문제로 승전국인 유럽의 각 나라들-프랑스, 영국, 미국, 벨기에 등-의 주요 정치적 인사들이 1923년에 영국의 대저택인 ‘달링턴 홀’에 모인다. ‘나’는 여기서 이전 주인을 모시고 주인이 원하는 막중한 국제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역시 집사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떠안고 거뜬하게 수행해낸다. 하지만 그 기간 중에 자신이 집사업무의 ‘롤’ 모델로 여길 만큼 존경했던 아버지가 대저택의 한쪽 구석인 지붕 밑의 작고 초라한 방에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게 된다.
‘나’는 순간순간 긴박하고 뜻 모를 긴장으로 가득 찼던 국제적 모임 중의 모든 상황을 의연하게 이겨내며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던 것이다. 해서 영국적 ‘위대함’이란 말에 걸맞은 직업적 임무를 수행해냈음에 조그만 자부심을 느끼려 하고 있다...
그래서 지나간 날들은 그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계속 그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다. 아직 남은 여행 중 그는 계속해서 지난날과 자동차 여행 중 마주치는 아름다운 영국의 지역 경관들 속에서 달콤한 위로와 평화로운 힐링을 소중하게 즐기려 하고 있다....
작가의 영국의 전통적인 ‘집사직’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그렇고, 1차 세계 대전 후의 전후 처리 문제에 있어서 국제 사회에서 있었을 법한 정치외교사에 대해서도 역사적 공부를 꼼꼼하게 했음직한 관련 내용들이 작품 속에서 탄탄하게 줄거리를 구성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작품 중에서 ‘달링턴 홀’의 국제적 모임에 참석한 미국의 상원의원이란 인물이 “여러분들은 순진한 몽상가 집단에 불과합니다. ...(중략)...우리를 초청해 주신, 여기에 계신 우리의 훌륭한 분을 봅시다. 그는 어떤 사람이냐? 물론 신사입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이견이 없을 줄 압니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죠. 점잖고 정직하고 선량하고. 그러나 이 어른은 ’아마추어‘입니다.”라고 말하자 집사의 전 주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이 ‘아마추어리즘’이라고 설명하는 그것을 내가 보기에 여기에 계신 신사분들 대다수는 아직도 ‘명예’라고 부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란 것에 대해선 나도 꽤 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속임수와 조작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선과 정의의 승리를 희구하기보다 탐욕과 이익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지요. 선생이 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 그건 것이라면 나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굳이 갖추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둘째 날 아침 : 솔즈베리> 중에서)
*4일차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으며
1
책을 읽는 창밖으로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차분하게 책 속의 1930년대 영국으로 떠나간다. 그런데 그전에 한 가지 뇌리에 각인시켜야 할 것이 있다. 대부분의 여건들이나 사물의 세계, 세상, 사람은 의외로(?) 변함없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변함없이 여전함.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인사 겸 찾아드는 지인들이 있다. 가깝게는 3년 전부터 길게는 40년 지기까지 다양하다. ‘건재함’을 알리는 일종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모든 것은 그대로 인 것 같다. 어쩌면 여전한 지도 모른다. 그 여전함은 몇 년까지 소급할 수 있을까. 천 년? 이천 년? 기록이 남아있는 한 그 소급은 한계가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상상력(想像力)’이라는 도구가 있으니까.
그 ‘상상력’은 이제 미래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9세기에 상상했던 각종 인류의 미래가 지금 조금씩 열리고 있음을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매일 확인하고 있다.
우주로 향하는 탐사선, 개인마다 소유하는 스마트폰, 하늘을 나는 자동차, 사이보그(AI) 시대 등은 인류가 불과 백여 년 전에 상상했던 미래다. 그때는 공상(空想)이라고까지 치부했던 황당무계(荒唐無稽)지만 지금은 버젓이 현실이 되고 있다. 이것은 ‘여전함’ 속에서 종횡무진 변하는 ‘세계의 현상’들이다.
‘뫼비우스의 띠’가 떠오른다. 요즘 유행하는 ‘융합’이라는 개념도 그렇다.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동전의 양면처럼 개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시시비비(是是非非)’의 무의미함이 요구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그 안에서 시대를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찾는 여행을 하고 있다. 19세기 개념인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에서 ‘문학’을 통해 과거 20세기 영국으로 떠나본다. 어쩌면 그곳에서 오늘 지금의 제 현상에 대한 많은 해답이나 단서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독서’는 그래서 유용한 것이라는 사실도 재확인하면서.
창밖 난간에는 내리는 봄비에 올망졸망 매달린 물방울이 투명하게 애처롭다. 자,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자연계에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정보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유일하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2
소설 속 내용에 주인공의 회고조가 많다 보니 덩달아 지나간 과거가 떠오른다.
기억 속의 어느 날
그 날 저녁에 있을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일가의 친척 분들이 집에 모였을 때
어머니를 이 집안에 들게 해주셨던
작은 고모 할머니도 오랜만에 오시고
집안은 금방 잔치 분위기였다
모든 게 하나하나 갖추어져 가고
술도 한 잔씩 드시던 작은 고모 할머니,
얼굴에 잔잔한 미소와 홍조가 떠오르자
부엌을 넘나들던 어머니 말씀 하신다
고모님,
이건
꿈입니더
딱히 누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닌 듯,
아무도 그 말에 답을 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40년이 흐른 지금
그때를 문득 반추해보면
3
약속한 날 예정된 장소에서 일전에 오랜 기간 ‘달링턴 홀’에서 같이 근무했던 켄턴 양과의 오랜만의 조우는 예상했던 대로 작품의 가장 말미에 배치되어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피날레의 일부를 장식한다.
-내가 뛰어나가 버스에 신호를 보내는 사이에 켄턴 양도 일어나 대합실 가장자리로 나왔다. 나는 버스가 정차한 뒤에야 켄턴 양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두 눈이 눈물로 얼룩졌음을 알 수 있었다.
“자, 벤 부인, 부디 몸조심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퇴직 후의 인생이야말로 부부생활의 황금기라고. 당신과 부군에게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요. 벤 부인, 혹시 다시 못 보게 될까 싶어 당부 드리는 것이니 부디 명심하기 바랍니다.”
“명심할게요, 스티븐스씨,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태워 주신 것도 고마웠고요. 여러 가지로 너무나 잘해 주셨어요.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여섯째 날 저녁 : 웨이머스> 내용 중에서)
같이 오랜 시간 근무하며 집사의 ‘위대함’이란 강한 신념에 이끌려 근무에 티끌만큼도 소홀함이 없던 주인공 ‘스티븐스’ 집사와 총무 ‘켄턴’양은 서로 사랑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수많은 기회와 시간이 있었음에도 왜 서로는 사랑의 고백을 하지 못했을까....
영국인의 ‘일과 인생’에 대한 투철한 의식과 늘 그렇듯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이 일과 관계하는 방식, 그리고 한 인간의 허망한 삶을 예리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5일차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으며
화창해서 봄날이다. 인생이 날마다 이렇게 화창하다면 어떨까. 아마 지루할 지도 모르겠다. 듣기 좋은 경복궁 타령도 한두 번 이랬던가. ‘말장난’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영원’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의 삶이 죽음이라는 단계 없이 영원하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역시 지루할 것이다. 그런데 이건 모순이다. 영원히 살고 싶으면서도 지루해서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죽음의 긍정적인 면도 생각해보게 되는.
우리는 일상에서 가끔 이런 모순적인 감정이나 상황을 경험한다. 그래서 한동안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모순’이 자리 잡으며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모순’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학 작품에서 ‘모순의 즐거움’이라는 어구를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만다. 신나게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을 다 읽고 감상문을 쓴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이 너무 좋아 점심 먹고 난 오후에는 운동이든 뭐든 구실을 엮어 외출을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의 ‘남아 있는 나날’ 중에 언제 할 건가. 《사서 일기》에서 보여줄 다른 세계로 난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송은경 옮김/민음사 2022년판
삶과 시간의 의미
1
번역된, 특히 문학 작품일 경우에는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번역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는(작품은 마음에 드는데) 경우에는 무척 실망하거나, 따로 원서를 펼쳐 감상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지금까지 번역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종종 있었던 일이다.
외국인이 외국어로 쓴 작품이지만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을 읽을 때는 완벽한 우리말처럼 완성된 감동을 얻고 싶다. 이 작품은 번역이 잘 되어 책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틈틈이 번역자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런데 번역자가 이 책의 출간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번역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2
어릴 때부터 태어나 살아온 자신의 나라 말에 아름답고 정제된 문체로 자국의 오랜 전통과 정서가 함양된 문화적 풍경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외국인으로서 타국에 이민을 가-비록 어릴 적부터 이민간 나라에서 언어를 익히고 그 나라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고 하지만-그 나라 민족의 깊숙한 내면세계와 사회를 통찰력 있게 파악하고 문학 작품화하기란 더욱,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영국의 유구한 문화적 전통과 정신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 전개되는 격변기의 영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신념을 다해 살아온 한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 인생을 예리하게 파헤쳐낸 소설로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으려면 요구되는 작가의 경의로운 재능과 노력이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본 국적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재능과 함께 조금의 유전적 상속도 없는 국외자로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영국적 삶과 정신을 영혼 깊숙이 내면화하는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인생을 작품화시켜 널리 보여줌으로서 지성의 지평을 폭넓게 하고 있는 작가인 것이다.
3
얼마 전 ‘서양 철학사’와 관련하여 읽은 어느 개론서에서 저자가 말미에 한 말이 떠오른다. ‘철학은 결국 혼자서 길을 찾아가는 학문이다’라고. 이 말을 조금 방향을 바꾸어 말한다면,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길을 떠나는 여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국의 ‘달링턴 홀’이라는 대저택의 집사라는 전문직에 신념과 자부심으로 거의 평생을 보내고 이제 은퇴시기로 접어든 주인공 ‘스티븐스’는 최근에 새로 바뀐 대저택의 주인의 권고로 영국의 서부지방을 여행하는 단기 휴가를 얻는다.
영국 서부지역을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아름다운 자연이 선사하는 영국적 ‘위대함’을 느낀 주인공은 오랜 세월 명망 있는 신사였던 주인을 집사로서 가까이 모시며, 대저택 내부의 각종 국제적 연회를 그때마다 무사히 치러냄으로서 세계적인 역사 중심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명예를 마음껏 향유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간은 대부분 다 흘렀고, 대저택에서 일하는 동안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어느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도 안타깝게 무산되었지만 주인이 바뀌면서 업무상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여정을 꾸려 출발한다.
가는 도중 시간이 날 때마다 평생 집사일 외에는 해본 일이 없는 주인공으로서는 달리 할 게 마땅치 않아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회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소일한다.
누구에게나 인생 말년에는 일단의 회한과 후회가 뒤따르는 법일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평생을 일궈가며 충성을 바친 주인은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의 나치 협력자로 오해받으며 불명예를 떠안고 말았다. 그 바람에 자신이 섰던 자리와 충성을 다해 섬겼던 오랜 시간들은 허망한 물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는 그만 허탈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옛 동료인 여인마저 결국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는 대부분의 인생이 가는 평범한 길을 선택한다.
4
주인공 ‘스티븐스’는 그녀가 사랑인지조차 그때는 모를 정도로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심지어 대저택의 연회를 지키느라 당시 같이 있었던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만다. 그는 때때로 대저택의 집사들만 모이는 회합에서 그런 자신의 업무 방식에 대해 위대한 자부심과 명예를 내세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 전에 자신의 아버지(역시 일에 관한 한 철저해서 자랑스런 집사였다)가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다.
여정의 끝 무렵 어느 버스 정거장에서, 옛 여자 동료와 헤어지던 장면을 떠올려 본다. 이별의 시간이 닥치자 양 눈가를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에 젖은 애절한 그녀를 보고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곧바로 그녀를 위로하는 프로다운 면모를 연출하며 과거에 일 외에는 늘 외면했던, 사는 동안 늘 일관되게 해온 것처럼 그 순간을 그냥 지나가버린다.
그러니까 그는 이야기가 다 끝나가는 시점까지도 자신의 살아온 삶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주변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여섯째 날 저녁 : 웨이머스> 중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저녁 선착장에 나와 바닷가 지평선으로 저물어가는 노을을 조용히 감상하려는 그에게 근처에 우연히 같이 있게 된 노인이 툭 던지듯 해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새로 모실 주인이 농담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에 대해 적절히 대응해줌으로서 주인을 만족시킬 방안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이야기 《남아 있는 나날》은 끝을 맺는다.
*6일차
-‘앨리 모건’의 《사서 일기》를 읽으며
판타스틱 스릴러 장르의 대가인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의 어느 작품을 보면 허공 어딘 가에 현실과 다른 세계로 넘나드는 문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책을 몰입해서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제는 1930년대 영국 사회로 들어갔다가 오늘은 어제와 판이하게 다른 현대 스코틀랜드의 어느 도시의 지역도서관으로 들어가 ‘저자의 시각’이라는 카메라가 움직이는 대로 펼쳐지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적 세계로 편입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을 때 너무 수준 낮거나 너무 유치하거나 너무 단순하거나 짧거나 시시한 책은 없다는 사실이다. (p153)
-도서관은 신뢰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이다. 도서관 이용자들에게는 예측 가능성이 필요하다. 구직원서를 내기 위해 매주 평일마다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야 하는 구직자들부터, 매주 다양한 행사와 교실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들과, 다 읽은 책 더미를 안 읽은 신착도서 더미와 교환하러 매주 수요일 똑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오는 연금생활자까지, 도서관은 정말이지 지역사회의 맥동하는 심장이다. (p156)
내가 책을 빌리러 다니는 지역 도서관도 스코틀랜드에 사는 주인공이 경험한 지역 도서관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지역사회에 다양한 문화(역사 기행, 작가 초빙 강연 등)를 접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고 갖은 서비스(인터넷 사용, 노인 공부, 다양한 동호활동 공간제공)를 제공한다.
책을 빌리러 대개 주말인 토요일을 이용하는데, 저번 주에는 많은 젊은 부모들이 1층 로비에 마련된 쉼터공간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공간 한쪽 벽면에는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이나 노인들이 쓴 시, 그리고 동화작가들이 그림과 함께 펼쳐놓은 동화 작품들 등이 매번 시간을 달리하며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1층은 인터넷 정보화실과 주변이 환하게 꾸며진 어린이 열람실이 자리하고, 2층은 내가 자주 이용하는 성인용 열람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최근에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면서 군데군데 일반 가정처럼 모양이 다양한 응접세트나 테이블, 편안한 의자 등을 배열해 보고 싶은 책을 뽑아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서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화려한 영상을 보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오디오 시설까지 설치되어 고급스럽고 안락한 카페를 방문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3층은 아예 소규모 카페를 연상하는 열람실과 공부를 할 수 있는 열람실, 세미나 및 동호회 활동을 할 수 있는 회의실 등이 꾸며져 지역민들의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여름 날 소설가 ‘정여울’씨를 초빙해 대회의실에서 지역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에 참여한 기억이 난다.
이처럼 도서관은 지금 현대 사회에서 유일하게 차별과 소외를 느끼지 않고 남녀노소 및 계층, 계급(굳이 있다면)을 떠나 모든 지역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동체 문화공간일 것이다. 일용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아침에 그 날 일을 얻지 못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려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이용해서 문화 활동을 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늘 대견스럽고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곤 한다.
이 글 《사서 일기》를 쓴 저자 ‘엘리 모건’(가명)은 신경 정신적 장애를 겪는 바람에 자살에 이를 정도로 악화되기도 했으나(여전히 약을 복용하고, 심리상담가의 정기적 상담을 받는다) 도서관에서 ‘사서’직을 얻게 되면서 삶에 희망적인 반전과 아울러 도서관 사용자들을 위한 보다 나은 질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어려운 주변 여건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자신이 어려운 처지임에도(물론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과정이 자신의 악화된 건강을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지역 사회의 빈곤층과 장애인, 노약자 같은 약자들을 위해 여건을 개선하고 상담도 솔선해서 하는 등, 이 모든 활약의 밑바탕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도서관 이용자들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 힘껏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에 점점 더 다가갈수록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이 책은 실명을 밝히지 않는 ‘앨리 모건’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로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가명임에 틀림없을 것이다(지명이나 도서관명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점은 웬만한 장르 소설 못지않게 스릴과 흥미가 넘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게다가 저자가 도서관 이용자나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감동스러운 장면에 있어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에서 더욱 감동스럽다는 것이다.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7일차
-‘앨리 모건’의 《사서 일기》를 읽으며
1
집 근처에 있는 지역도서관에 들어갔던 어느 날 오후, 이용자가 드물어 한적했던 2층 성인용 도서 열람실의 서가(그때는 지금과 같이 현대적인 카페 분위기로 리모델링하기 전이다) 사이를 지나며 해 본 상상이다.
‘내가 들어서자 모든 만조백관이 일렬로 질서정연하게 머리와 허리를 숙인 채 저마다 상소할 이야기가 있는 듯 자못 엄숙하고 숨소리를 죽인 모습이 고요하기까지 하다.’
이건 도서관 열람실 서가에 질서정연하게 꽂힌 책들을 두고 하는 말인데, 매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눈앞에 어지럽게 펼쳐지는 세상과 그런 세상에 대해 지혜롭고 원만하게 대처하기 위해 열심히 온 몸의 이러저러한 감각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채우는 세계관의 균형 있는 생성을 위해 저마다 고유한 생각과 지혜를 담은 대신들(책들)이 자신이 선택되기를 몸을 구부린 자세로 겸허하게 기다린다는 상상을 하면 뿌듯하고 즐거웠던 것이다.
-대여섯 살 때쯤 아버지와 함께 글래스고의 미첼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중략)...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공부 삼매경에 빠진 학생들 모습에 나는 매료되었다. 특히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이 유독 뚜렷한데, 지금 생각하니 이십대였을 것이다. ...(중략)...그와 대조적으로 미첼은 성당이었다. 고색창연했고 고용한 경배가 가만가만 테이블을 토닥였다. 여기, 이 훌륭한 긴 테이블 중 하나에, 성직자가 앉아 있다. 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책 더미의 미래를 항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편안해 보였다. ...(중략)...미첼도서관은 성당이고, 그 종교는 지식이다. 지금도 나는 그곳에 발을 들이면 사방의 석조 벽면 내부에서 마법이 느껴진다. 현대적으로 리노베이션을 한 후에도, 그곳의 공기는 압축된 지식으로 농밀하다. (본문 중에서)
2
일단 도서관에서 살아남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 ‘앨리(저자)’는 자신과 같은 사서들이 장시간 기획한 도서관 내에서 열리는 ‘제빵 행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지역민들의 도서관 이용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 더 많은 방문자를 확보하려는 차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작업에 대해 지원을 하기는커녕 온갖 규정을 들이밀며 무산시키려는 방해 공작이 난무하는 중에 성황리에 마치게 된다. 이로서 ‘앨리’는 취업 계약이 연장되는 동시에 시의회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전개된 이야기다.
3
이 책은 우울증과 PTSD, 자살충동으로 치료를 받는 저자의 건강회복을 위한 고군분투기이기도 하다. ‘사서’라는 처음 해보는 직업에 도전하여 열악한 환경에 적응해나가면서 ‘그레이엄’이라는 심리치료사와 정기상담을 병행해 나가기 때문이다.
여건은 아주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살충동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무처 주변에는 그녀의 그런 병을 알거나(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알아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몇 번씩 위기를 맞아 ‘실직’의 고비에 이르며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심리치료사 ‘그레이엄’으로부터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앨리’는 받게 된다. 그건 순전히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을 수행하면서 맞이한 몇 번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이 ‘사랑’의 이름으로 영혼의 정화를 거치며 더욱 강인한 정신으로 거듭난 때문이다.
해서 재계약 조건이 갈수록 열악해지지만 ‘앨리’는 이 직업에 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며 열정을 불사른다. 그녀는 ‘사서’라는 직업을 통해 새로 태어났음이 분명한 것 같다.
《사서 일기》
-앨리 모건 지음/엄일녀 옮김/문학동네 2023년판
도서관은 또 하나의 해방구(解放區)
1
어디론가 가야겠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적절한 장소가 없는가. 복잡한 세상일을 잠시 동안 잊고 영혼을 건강하게 정화시키고 싶은 경건한 장소를 찾는가. 그러면 근처 도서관으로 가라.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 책상에 앉아 독서에 빠져들어라. 당신은 잠시 이 세상을 떠나 딴 세상으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갔다 오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건 비밀인데 일종의 마법이다.
2
-도서관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도서관을 이용하게 하여 정보 접근권의 빈부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지혜는 정보와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나온다. 그 정보와 지식은 시시각각 수많은 형태로 마치 강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 흐름에서 소외되거나 자칫 방심하면 벌어지는 세대간 차이만 해도 엄청나다. 책을 읽다보면 나이 든 노인들이 자식들이 사서 이용하라고 준 스마트폰을 사용할 줄 몰라 도서관에 근무하는 사서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SNS 등이 활용되는 정보화 사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바깥으로의 외출이 여의치 않는 취약자들을 종종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지식의 빈부격차는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한 해 도서관을 이용하는 빈도와 독서량을 조사한 데이터를 보면 실망스러운 정도다. 이건 개개인의 삶의 질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3
우울증과 PTSD, 자살충동이라는 심각한 신경정신병을 앓던 저자가(‘앨리’, 가명)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에 도전하여, 몇 번의 실직 위기를 맞아 극복하는 과정에서 병도 치유하고, 근무했던 지역도서관 운영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는 쾌거를 다룬 에세이로 SNS를 통해 저자의 근황이 알려지면서 영국의 BBC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일약 유명인사로 발돋음하는 활약을 펼친다.
4
이 모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지역 공동체에 대한 ‘박애(博愛)’적인 따스한 사랑과 희생과 같은 봉사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 몸에 병이 심각해서 정상적인 판단이 가끔 어려운 지경임에도 불구하고(취업이 치유를 위한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심리치료사의 상담을 정기적으로 이어가는 형편이긴 하지만, 직장(도서관)에서 맞닥뜨리는 취약계층의 어려운 현실들을 목도하고는 외면하지 못한 채, 그를 고용한 상부조직에서도 꺼려하고 일부 제지하기도 하는 환경개선을 위해 용기 있게 활약하는 내용들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심각했던 병조차 완치되는 결과(자신조차 거의 믿지 못했던)들에서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맛보게 되면 더욱 부인할 수 없다.
이 시간 현재 곳곳의 도서관에서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근무하시는 모든 ‘사서’분들에게 많은 응원이 됨과 동시에 열화 같은 격려의 메시지를 세계 곳곳에서 받고 있음을 책의 안팎, 곳곳에서 확인한다.
5
책과 독서는 일찍부터 친구가 되면 남은 시간 평생의 독실한 반려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신의 행복한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기여할 것이다. 그런 책과 독서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도서관은 생(生)의 성전(聖殿)이자, 일상의 해방구(解放區)인 셈이다.
*8일차
-‘로라 콜먼’의 《나와 퓨마의 나날들》을 읽으며
1
인간이 문명(文明)생활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과연 그건 무엇일까. 문명생활이 생활의 편리에 따른 안락함과 질서를 주었다면 자연 본연의 본능을 잊어버림으로서 영혼이 거칠게 메마르고 황폐화되지 않았을까.
작가 ‘로라 콜먼’은 대학에서 미술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지만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해 방황한다. 청소부, 전화 상담원, 여행사 마케터 등 일을 닥치는 대로 해보았지만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허전함을 메워주지 못한다. 그 허전함의 정체조차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일을 내려놓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으려나 싶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곳은 볼리비아였다.
흔히 문명인이라고 일컫는 도시인이 처음 원시림의 자연 속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안전에 대한 불안과 생활의 불편함이다. ‘로라’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야생동물 보호단체의 숙소가 있는 지역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당장 돌아갈 마음부터 먹는다. 모든 것이 불결하고 불편한 숙소부터 시작해서 야생의 동물들이 펼치는 야단법석의 난장판에 기가 질려버린 것이다.
2
1930년대의 과거 영국의 대저택을 관리하던 ‘집사’에서 이웃한 현대 21세기의 스코틀랜드 한 지역 도서관의 ‘사서’로, 그리고 이제는 영국에서 공부한 한 스마트한 여성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여행지 볼리비아에서 야생동물 보호단체 관련 ‘봉사활동’을 막 시작하려는 여정이다.
지역적으로는 유럽의 영국에서 이웃한 스코틀랜드, 그리고 멀리 남미 대륙의 볼리비아로 이동했고, 시간적으로는 1930년대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21세기 현대로 되돌아왔다.
장르로는 문학작품 ‘소설’의 허구적 이야기에서 2편의 ‘에세이’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빙의로는 고지식한 영국의 남성과 신경정신증을 심하게 앓는 당찬 30대 초반의 스코틀랜드 여성 사서와 같은 또래의 방황하는 영국 여성의 정신상태다. 공교롭게도 모두 영국 사람들이다.
3
도시적 삶이란 무엇을 뜻할까. 저자 ‘로라’는 파스타, 피자, 맥주, 담배, 인터넷, 더운 물 샤워 등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자신이 봉사하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안에는 수시로 출몰하는 극성스런 모기, 구더기와 커다란 거미로 더러우며 소름 끼치는 화장실, 음식마다 들끓는 불개미와 바퀴벌레, 지저분한 오물로 뒤덮힌 도로 등으로 봉사일자가 끝나는 한 달 후 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괜히 온 것이다. 답답하던 일상에서 탈출해서 뭔가 전환점을 찾으려 볼리비아로 여행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려고 마음먹던 차에 우연히 본 자원봉사자 전단지에 마음이 끌려 충동적으로 불쑥 왔던 것인데, 역시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무엇 하나 마음에 차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4
그런 ‘로라’를 그가 맡았던 암컷 퓨마 ‘와이라’가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와이라’는 새끼 때 사냥꾼에게 붙잡혀 도시에 팔려나가 인간들의 음식을 먹고, 묘기를 배우느라 채찍질을 맞으며 훈련을 받다 야성을 잃고 병이 들었다.
숨 막히는 정글의 모든 것에 대해 적응이 더뎠지만, 퓨마 ‘와이라’와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로라’의 마음이 열려버렸던 것이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돌아갈 항공편만 거듭 생각하던 ‘로라’에게 어느 날 산책 나갔던 ‘와이라’가 자신에 다가와 온몸으로 비비며 거친 혀로 그의 손을 다정스럽게 핥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이라’는 어릴 때 도시에서 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외부인에게 마음을 쉽게 주는 법이 없었던 퓨마였다. 이후 ‘로라’에게 정글도 활짝 열리게 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두렵고 불편하고 지저분하던 정글이 ‘와이라’로 말미암아 다정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녀는 한 달 후 돌아가려던 항공편을 취소하고 ‘와이라’와 좀 더 지내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그녀는 이 모든 사항을 영국에 있으며 그녀를 걱정하는 엄마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5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자, 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의미도 가르쳐준다. 정글 속의 ‘로라’와 ‘와이라’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제1부 껍질 속의 나, 제2부 깨어나는 나, 제3부 새로운 나로 엮어진 이 책에서 아직 1부에 해당한다.
정글 속에서 ‘와이라’와 사는 ‘로라’에게서 어떤 변화와 미래가 펼쳐질지 계속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9일차
-‘로라 콜먼’의 《나와 퓨마의 나날들》을 읽으며
1
사람은 가변성이 충만하다. 고정불변을 추구하는 욕망도 있다. 대신 그 욕구를 해결하고자 의미부여를 한다. 장소를 지정해서 공간을 창조하고, 기억을 떠올릴만한 이름을 부여하거나 행사(의식, 예배 등)를 주관한다. 그래서 자아중심성에 만족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여행(혹은 죽음)을 훌쩍 떠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돌아와서 다시 태어났다고 말(선언)한다. 이것은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 개념이다.
2
-매일 걱정한다. 와이라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내가 부족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될까 봐. 와이라가 원하는 것이 내가 아닐까 봐. 더 훌륭하고 더 용감하고 더 다부진 사람이어야 와이라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봐. (본문 중에서)
작가 ‘로라’는 퓨마 ‘와이라’를 순수한 한 영혼으로 보며 관계를 다지려한다. 그가 한 달간의 예약된 봉사를 거치고 돌아가려다 갈등을 일으키는 중에 엄마와 나눈 통화의 일부다. ‘저, 누군가를 만났어요?’ 물론, 엄마는 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으로 착각한다.
‘로라’는 삶에 의미를 찾고 인생의 진정한 길을 찾으려 방황하는 중에 퓨마 ‘와이라’를 만났다. 그녀는 이로서 혼란스러운 삶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간다. 아직 완전한 확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3
‘로라’와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퓨마 ‘와이라’ 등 보호 중인 야생동물들이 다 함께 머무르는 ‘파르케’ 주변의 정글에 어느 날 대형 화재가 발생한다. 스무 명 남짓한 자원봉사자들의 힘만으로 불을 끄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정글이란 곳의 특성이 사람의 접근을 용이치 않게 하고,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한 곳이어서 쉽사리 진압되지 않는다.
3주 정도의 불길은 주변 정글에 아무런 생명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불길은 다행히 그 방향을 바꾸었고, ‘로라’와 자원봉사자들과 보호 중인 야생동물들에게는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불길을 잡느라 그 동안 찾아오지 않은 사이에 퓨마 ‘와이라’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케이지로부터 탈출도, 먹이 사냥도 불가능했던-두려움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처럼, 그동안 호수 주변에서 머물기만 하던 소심함에서 벗어나 과감히 뛰어들어 수영을 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로라’를 감동시킨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맛보는 순간 같이 ‘와이라’를 돌보던 동료 ‘제인’의 충격적인 제안이 ‘로라’에게 전달된다. 이제 ‘파르케’를 떠날 때가 되었다며 같이 떠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겨우겨우 버텨왔던 그들의 의지가 이번 대형화재의 산불 진화과정에서 맥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제 막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이 하루하루의 일상이 알차게 영글어가던 ‘로라’도 자신에게 다가왔던 모든 것을 갑자기 다가온 환상처럼 치부하며 같이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남은 기간 과거처럼 인근 도시와 국가를 떠돌며 문명의 편안함을 즐기다 여행을 마치는 것으로 하며 1부가 끝맺는다.
4
5월의 독서가 2주차로 접어든다. 고층 아파트 창밖은 비가 간혹 내리긴 하지만 여전히 화창한 봄이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뜨거운 여름으로 넘어갈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에 영감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먼저 정리하고 밥을 먹는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시간의 리듬에 맞추어 독서를 시작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4시 무렵이면 그 날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한다. 다시 저녁을 먹고 아내와 산책 겸 운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 TV를 보다 잠자리에 들거나 책을 다시 읽거나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내는 길어지는 휴가-다음 건설현장일이 잡힐 때까지-에 가끔 성화 아닌 성화를 부리기도 하지만, 난들 어쩌겠는가, 순리가 그러한데. 일이 나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좋고, 이렇게 집에서 계속 독서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중력이 나날이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이건 순전히 봄의 화창한 날씨 덕분일 것이다!
*10일차
-‘로라 콜먼’의 《나와 퓨마의 나날들》을 읽으며
1
저자인 ‘로라’가 과거 도시 문명권 내에서 생활하며 번민하던 모습에서 서서히 벗어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나가고 있는 과정들이다.
-번듯한 직장인의 길로 착착 나아가고 있었지. 바닷가에서 살 생각이었고. 남자친구도 있었다? 부모님이 정말 기뻐하셨어. 젠장. 그런데 지금은 정신이 나간 줄 아셔. 어쩌면 그럴지도. 이런 게 바로 집에 돌아가면 느끼는 것들이야. 그런데 여기 있으면 어떤 줄 알아? 이렇게 정신이 맑았던 적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느끼는 것과 정확히 똑같다. (본문 중에서)
-내가 톰에게 했던 말에 관한 생각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벌써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 말. 네 머릿속에는 이 모든 일들, 모든 동물들이 너무도 많이 자리 잡고 있다고. 너무도 많이.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별 수 있을까. 저 밖의 세상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전부 시시하고 평면적이다. 어떻게 이곳에 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다채로운 빛깔로 불타오르는 이곳에. 한때는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 정글에. 그때는 미지의 오솔길을 걸을 때, 머릿속 피가 꼭 기관총을 쏜 듯 귀 밖으로 튀어나오고, 무수한 심장 박동이 나의 몸을 풀어 헤쳤다가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같았다. 오래된 바위에 앉아 저 먼 곳을 바라보는 지금은, 정반대다. 내 몸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제2부 ‘깨어나는 나’ 중에서)
2
요즘 책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한다. 저자가 쓴 책들을 읽어보고 있으면 다양한 서구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동양인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출연(?)하지 않는다.
‘로라’가 활약한 볼리비아만 해도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파르케’가 있는 외진 지역임에서도, 어느 날 벌어진 활력을 불어넣고자 열린 달리기 시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리적으로 전혀 가깝지 않은 유럽의 덴마크인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뉴질랜드인이 즐겁게 경주를 벌이고 있다.
‘파르케’에는 세계 각지에서 자원봉사를 하러 온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서구 문명은 어느 순간부터 세계 문명의 주도권을 획득한 채 정치, 경제, 문화뿐만 아니라 지구환경과 자연의 보호운동까지 빈틈없는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3
책을 읽다보니 어느덧 오후 4시가 훌쩍 지났다. 번뇌하던 저자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거듭나는 자신을 발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 후의 모습을 소개하는 3부 ‘새로운 나’부분으로 접어든다.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다. 책을 마저 다 읽고 독서 후기를 남겨야 한다.
《나와 퓨마의 나날들》
-로라 콜먼 지음/박초월 옮김/(주)도서출판 푸른숲 2023년판
소설화한 방식으로 연대하기
1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김춘수 시인, 시 <서풍부> 중에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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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위선의 허울뿐인 세상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절실한 순간들을 드러낸 글이다.
웬지......정말 설렌다. 생기가 넘치는 기분이다. 친구들과 술집에 있을 때, 일을 할 때, 비자 카드를 들고 쇼핑몰에 서 있을 때, 인스타그램 최근 게시글을 볼 때, 그럴 때마다 느꼈던 명색뿐인 존재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난 명색뿐인 존재감을 결코 떨칠 수 없었다. 플라스틱 판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곳, 부패를 유발하고 신장 질환을 일으키며 아나콘다가 득시글되는 이 늪지대에 그런 판 따위는 없다. 오로지 탁하고 넌더리 나는 진흙 냄새와 자극적인 조류 냄새, 습기 냄새, 생성되고 부패되는 냄새뿐이다. (본문 중)
저자 ‘로라 콜먼’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 택한 볼리비아 여행-여행에 우연히 마주친 자원봉사(야생동물 보호)-야생동물 보호지인 ‘파르케’에서 퓨마 ‘와이라’의 만남을 통한 진정한 자아의 발견 등의 여정을 거치며, ‘껍질 속의 나’-‘깨어나는 나’-‘새로운 나’로의 찬란한 변신이 이루어진다.
이 여정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의도치 않게 일어난 변화여서 자못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관여하게 된 자연환경 보호 운동조직이나 단체,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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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슬플 때마다 그들은 우리의 상상력이 충분히 드넓은 한 세상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음을 상기하도록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파르케에서 찾은 희망이기도 하다. (본문 중)
《소설판 장바구니 이론》에서 ‘르 귄’은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말한다. 영웅 한 명이 맞서야 하는 폭력에서 벗어나 협동과 발효, 협력과 연결로 나아가는 것. ...(중략)...우리 모두가 함께 출렁이며 중요한 연결을 만들어가는 곳. 변화를 몰고 오는 건 연결이니까. 그렇지 않은가. (본문 중)
이 책은 우리 인간들의 정신세계 영역의 우아한 확장과 아울러 독특한 ‘글쓰기’로 우리들의 이야기, 즉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이야기로 정보를 교환하며 상생하는 인간’들에 대한 특별한 영감을 주고 있다.
소설처럼 줄거리가 가미된 이야기 방식을 통해 한 편의 특별한 성장소설인 동시에 자연보호와 지구의 미래를 진지하게 성찰해보며, 자연계의 한 종인 인간으로서의 상호연대를 이끌어내고, 저자의 살신성인적 경험이 담긴 간곡한 호소를 담은 메시지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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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처음 알게 된, 최근 과학자들이 발견해냈다는 ‘모든 소들의 울음소리는 같지 않다’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작가가 사랑한 퓨마 ‘와이라’뿐만 아니라, 요즘 국내에서도 반려견의 ‘존엄권’에 대한 의식이 달라지고 있는 추세를 주목하게 된다. 그건 전 세계인이 부르짖는 생명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