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국화-무궁화(한화.훈화초)-일편단성.영원성을 상징한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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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반도사관의 목적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 직할기관<조선사 편수회>의 목적은 단군3조선의 붕괴로 인하여 북방의 진.번조선 유민들의 대거 이주와 한반도지역의 패권쟁탈전으로 인하여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한 고대 한반도인들을 조상으로 삼아야 하는
일본인들의 역사적 갈등을 감추고 조선인들에 민족적 열등감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조선민족은 열등한 민족으로 세뇌시켜 일본의 통치를 합리화하는데 있었다. 그리고,8·15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활동한 이병도는 8.15이후 경성제국대의 후신인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국 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수 많은 이병도 제자들에 의해 조선인들의 역사는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반도사관을 그 특징으로 삼는 일제 식민사관이 한국사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도사관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사학자들의 논리로 무장된 재야 사학자들이 '민족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반박논리로 저항하였고,
중국의 갑골문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단국대 윤내현 교수같은 제도권 교수들이 이병자 제자들의 박해와 음해를 받으면서도 단군조선은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지역까지 포괄한다는 내용의 논리적인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일제 식민사관도 점점 힘을 잃게 되었다. 현재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역사전쟁 중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요서지역의 고대 한국문명인 요하문명을 중국화하여 중국과 한반도문화가 모두 중국문명에서 나왔기 때문에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한반도북부까지 지배한 고구려도 중국역사에 속하고 결국 한반도북부(북한)도 중국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영토지배논리를 펴기 위함이다. 그래서 여신전.옥.뱀.빗살무뇌토기.곰토템.원형제단.적석총(피라미드) 등 요하문명의 뿌리가 백두산문화에서 나왔고, 백두산문화는 결국 고고학적으로도 1만년을 전후로 현인류문명의 근원이 되는 마고문명의 중심지(서해)에서 가까운 한반도문화에서 나왔다는 역사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세계적인 유물.유적의 시원지(고인돌.토기.볍씨.선박.옥.곰토템 등 세계최초 최대 유적유물)가 되는 한반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대한민국차원의 서북공정의 역사논리를 전개시켜야 중국의 동북공정이 고꾸라지게 되어 있다.
중국문명의 뿌리가 결국 한반도문명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만 증명해 주면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반도 문명의 가지들에 불과한 중국문명은 결국 한반도문명에 고개를 숙여야 하기 때문이다. ▲ 백제 대향로 위의 봉황 -봉황는 고대 한반도인들의 신조(천상의 새). [산해경]"동방의 봉황이 사해를 날면 평화가 실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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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와 인식론 사람들은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인류의 뿌리, 그리고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심리적인 배경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역사학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결국 자기울타리에 머문 국수주의적인 차원에서 전쟁과 대립을 부추켜 인류평화를 깨트리고 학살과 전쟁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는데 있지 않다.
객관적인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세계가 갈라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지평융합의 세계임을 인식하고 현인류조상과 현인류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공존공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데 있다고 본다. 한국의 예언자 함석헌 선생이 "인류가 어서 빨리 역사의 줄기를 통하여 하나의 신과 하나의 조상을 찾아서 오손도손 살아야 한다"라고 호소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럼 역사학의 방법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쪼개진 퍼즐을 맞추어 모양을 만드는 진실탐구에 있다. 따라서 종합적인 분석을 전제로 하는 인식론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려진 편향된 인식론으로 역사의 진실이 밝힐 수 없으며 역사학을 할 자격이 없다. 예컨대, 한 사건에 대한 여러 문헌들의 기록들을 비교분석해서 공통적 내용에 해당하는 교집합을 찾을 줄 알아야 하고, 땅 속에서 출토된 유물유적을 통하여 문헌들의 공통적 기록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각 문헌들의 공통적 기록내용은 고고학적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대한 역사적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공통적인 내용이란 사건의 사실을 사가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문헌들의 경우 후대로 내려 갈수록 고대 한국인들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감추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높이고 확대하는'춘추필법'으로 기록하였다. 예컨대, 태호복희는 백두산지역의 신시배달국 태우의 한웅의 막내 아드님인데, 중국에서는 추상적인 신화로 기록하여 중국의 인문학의 시조로 추앙하고 있다. 태호복희는 산동에 묻혔는데, 중국문헌들은 출생지와 장지가 불분명하고 여러 군데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국문헌들은 황제헌원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진시황과 유방은 전쟁에 출전할 때 전쟁신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제헌원이 승리했다면 진시황과 유방은 치우가 아니라 황제헌원에게 제사를 지내야 상식적으로 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지배한 고대에서 영어구조와 동일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하며 중동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주하여 황하강 중상류에 거부하여 동이족들을 복속해 나간 화하족들은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춘추필법으로 중국지역의 '동이사'를 감추고 왜곡하고 있다.
반면에 중국 동북공정론자들과 식민사관론자들에 의해 위서로 취급하고 있는 [한단고기:고대 한민족 역사를 기록한 고대 사서들을 묶은 책]는 신화적 기법을 배제하고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우리 민족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 사서로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단군조선의 영역자체가 고인돌.비파청동검과 세형청동검 출토지역을 기준으로 [한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3조선의 영역으로 산동.요서.만주.몽골.연해주.한반도.일본열도임이 증명되었다. [조선왕조실록]를 보더라도 세조3년에 전국 8도 관찰사들에게 고서들을 수집해서 중앙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있는데, 그 고서들 중에[한단고기]에 포함된 <삼성기>라는 고서도 보이기 때문에 계연수 선생이 근대적인 용어로 해석을 했다 치더라도 그 원내용은 그대로 기록한 책이 [한단고기]이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기록내용을 담고 있는
[한단고기]는 기자.위만.한4군 문제 등 중국문헌이 왜곡하고 있는 고대사의 논쟁거리에 대한 혼란을 말끔히 해소해 주고 있다. ▲현도군.임둔군.진번군.낙랑군은 기자조선(번조선)의 제후국들이다. 기자조선을 빼앗은 위만조선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위만조선의 내분(기자조선세력과 위만세력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암살되자 한무제(유철)이 위만조선을 공격해 들어 왔으나, 북부여 고두막군대와 위만조선유민들이 연합하여 격퇴시켰기 때문에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4군은 허상에 불과한 날조다. 소위,한4군의 지명도 한무제때의 사가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명나라때의 역사문헌에 등장한다. 무참히 번조선유민들과 북부여 군대의 연합군에게 무참히 참패를 당했던 한무제는 사마천의 [사기]를 통하여 4군을 설치했다라고 왜곡했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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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과 왜곡된 한4군의 실체는 무엇인가? 북한 평양을 단군조선의 중앙 왕검성으로 착각한 조선의 유학자들이나 일제 반도사관론자들은 단군조선의 시기에 대해 크게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구분하며 지역도 한반도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한단고기]에는 단군조선은 엄연히 3한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는데, 간접적 통치를 가했던 중국지역을 제외하고라도
직접 통치영역은 산서.하북.요서에서 양자강까지(번한),만주.연해주.몽골.시베리아(진한),한반도.일본열도(마한)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 중국을 지향하는 소중화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 유학자들과 일제 식민사관론들의 주장은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역사관임을 알 수 있다. 한나라 한무제 시기의 역사를 기술했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위만에서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흉노를 경계했던 한나라 제후국 연나라 왕 노관(노관은 전한 고조 유방과 같은 마을에서 자라 후에 유방을 도와 장안후長安侯에 봉해졌다 후에 연왕燕王)이 되었다. 진희의 반란때 진희의 음해로 반역죄로 몰려 흉노에 투항해 동호東湖의 노왕盧王으로 살다 그 곳에서 죽었다)이 한나라의 내분으로 흉노로 망명하자,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이 상투를 하고 만이('만이'는 고대 화하족이 중국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한국인들을 얕잡아 이르던 말)의 복장을 하고 패수을 건너 조선에 투항하자, 조선왕이 장군으로 삼고 국경을 수비하게 했다. 그러자, 위만은 주변의 진번세력과 투항해 온 위만세력을 모아 반란을 도모하여 왕검성(하북성 창려=험독)을 점거하고 왕에 올랐으나, 덕과 인이 부족하여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망했다." (*난하:고대에는 요하=윤내현 교수)
위만이 준왕을 한반도로 몰아 내고 왕검성을 점령한 배경을 [위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병(漢兵)이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여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고 하였다." 이 때를 《사기(史記)》에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 기원전 194년~ 기원전 180년)라고 하였다. 한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세력은 바다를 건너 마한(한반도) 땅으로 들어와 '한왕'이라고 칭했다. 중국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우리 문헌[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나온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위만이 조선을 치니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韓=한반도) 땅에 이르러 나라를 창건하고 마한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도사관론자들의 논리처럼 기자조선이 대동강 부근에 있었다면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갈 이유가 없다. 기자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기에 준왕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자들도 한반도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남부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개국했다고 착오를 하고 있다. 마한이라고 했을 때는 단군3조선 중 한반도 땅을 의미하지 중국지역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평양지역의 기자가묘의 배경이 설명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한단고기]는 연나라 사람 위만을 기자조선을 강탈한 도적넘으로 보고 있다. 위만의 복장을 보았을 때 위만은 조선인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상투는 조선인들만 하는 풍습이고, 영어구조의 티벳계 언어를 사용하며 백인문화를 가지고 중국의 서쪽에서 동진하여 황하강 중.상류지역에 거주하며 동방 배달족의 문화의 영향으로 황하문화를 형성하여 나라를 열었던 화하족이 얕잡아 부른 만이도 산동.요서지역에 사는 한국인들로 위만은 노관의 부하로써 한나라 영역에서 망명해 온 조선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만이 화하족이라면 국호를 조선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며, 제도와 관직명도 기자조선을 계승하지 않고 한나라 제도와 관직으로 변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만은 기자조선의 제도와 관직명을 그대로 이었다. 문제는 기자조선세력과 위만세력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인한 내분이였다. 위만조선은 한나라가 1년간을 수군과 육군으로 공격했어도 망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전쟁에서 패한 장군 6명을 참수하고 1명만을 서민으로 강등시켰다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위만조선이 망한 건 내부분열에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반란자들이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한 조선인들때문에 한나라가 어부지리하여 4군 지명도 없이 한4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위만조선이 내부분열로 붕괴된 후에 한무제(유방)가 설치했다는 중국 요서지역의 4군이 바로 위만조선의 영역인 셈이다. 그런데, 반도사관론자들은 소위, 한4군을 지금의 북한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북한 사학계에서는 요동지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와 혼인하여 낙랑국의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가 한4군의 낙랑군의 딸인양 착각하고 있다. 공주라고 했을 때는 태수의 딸이 아니라, 엄연히 국왕의 딸을 의미한다.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는 북한평양지역의 최리 낙랑국이다. 번조선(기자조선)의 제후국 요서지역의 낙랑국에서 발해만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온 최숭의 후손 최리의 나라가 낙랑국인 것이다. 최숭은 47대 고열가 단군천황이 황위에서 물러나 산속으로 들어가자, 요서지역에서 마한의 왕검성인 북한의 평양지역으로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고 후손인 최리가 낙랑국을 개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최리 낙랑국을 한4군의 낙랑군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며 궤변인 것이다. 평양지역에서 후한시대의 인구조사통계를 적은 목간이 발견되었다고해서 한4군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건 궤변이다. 엄연히 한4군은 후한시대가 아니라 전한시대이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후한시대의 목간은 고구려 대무신왕 당시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의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 서해바다를 건너서 최라 낙랑국 영역의 일부를 점유하여 설치한 낙랑군을 의미한다. 후한 광무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위해 바다를 건너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반도사관론자들은 후한 광무제의 낙랑군이나 최리 낙랑국을 한4군으로 조장하거나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배경은 위만조선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진국(辰國)과 한나라의 교역로를 가로 막게 되었고, 이를 두려워 한 한무제가 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涉何)가 위만조선군에 살해된 것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위만조선과 1년간의 전쟁에서 처참히 참패한 한무제(유철)© 윤복현 저널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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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한나라는 한4군을 설치했던 것일까? 아니면 조작인가? 결론은 조작이라 할 수 있다. 한무제 당시 사마천은 [사기]에서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살해되자, 4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단고기-북부여기 상]에서는 전혀 반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렇다. "
한나라 한무제(유철)가 평나(위만조선 왕검성=창려)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 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이에 그 지방(위만조선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한무제 유철이 내분으로 우거왕이 암살되어 위만조선이 붕괴되자, 위만조선을 점령하기위해 군대를 모아 몰려 왔는데, 이 때
북부여의 동명성왕 고두막(북부여 5대 단군)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와 전쟁을 하여 연전연승하니 위만조선유민들이 합세하여 한나라 군대를 몰아 내었다는 내용이 된다. 따라서 한나라의 4군 설치는 무산되었다는 내용이다. 명나라 때의 문헌에 나타난 한4군의 지명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한4군을 외쳐대고 있으니 정신나간 민족이 아니겠는가!
위만조선과 전쟁을 벌이다 무참하게 패한 한무제 당시 사마천도 4군의 지명을 [사기]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유령의 4군을 역사적 사실인양 외쳐대야 한다는 것인가?▲ 한나라는 육군과 수군으로 1년간에 걸쳐 위만조선을 공격했으나 무참히 참패했다. 당시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으며, 치우족의 후예로 구성된 번조선의 군사력이 전통적으로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단군한검천황은 단군한국을 3개 지역으로 분할할 때에 하북.산서.요서에서 양자강유역까지 영역으로 삼는 번조선을 중국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책임을 부여하면서 번한(번조선 단군)을 치우천황의 후예인 치두남으로 삼았다. © 윤복현 저널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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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나라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위만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년간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한나라는 참패했다. 그리고 한나라나 위만조선이나 초기 국가재건기간이고 한나라 북쪽에는 번조선의 제후국가였던 수유족(흉노)이 강력한 유목국가로 성장하여 한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여서 한나라의 군사력이 위만조선을 쉽게 점령할 상황이 아니였다. 위만조선이 붕괴한 건 한나라의 공격이 아니라 내분에 의한 붕괴가 확실하다. 한무제의 병략가 회남자도 자신의 저서에 한나라가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기록이 없다.그런데, 왜 우리가 한4군을 외쳐대야 한다는 말인가? 위만의 손자 우거는 위만조선의 왕으로서 내분외분에 맞서 항전했으나 결국 내분으로 암살당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어 버렸고 이 기회를 노려 한나라가 군대를 몰아 다시 쳐 들어오자, 북부여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위만조선 유민들과 합세하여 몰아 내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한단고기-북부여기 상]에는 위만의 망명과 위만조선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때 노관의 부하장수 위만이 처음에 북부여에 망명요청을 했으나 병 중에 있던 해모수가 고민하던 차에 기자조선의 기준왕이 위만을 받아 들여 땅을 주고 박사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후 위만이 기자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위만의 손자 우거왕때는 북부여를 공격하여 이북 영토(해성)를 빼앗자,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 단군이 5천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해성을 격파하고 땅을 회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를 위협할 정도로 위만조선이 성장하고 팽창한 배경에는 위만이 흉노로 망명한 노관의 부하였던 만큼 북방 초원지역의 흉노제국과의 긴밀한 공조관계가 있어다고 봐야 한다.
북부여에게 있어 북부여의 제후국가인 기자조선(번조선)을 강탈한 위만세력은 야비하고 교활한 떠돌이 도적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만조선은 북부여와 한나라와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위만조선내부에서는 위만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권력쟁탈이 치열했던 것이다. 그 결정판이 우거왕와 우거왕의 최측근 성기를 조선인들이 반란을 통하여 암살한 사건이고,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참패했던 한나라가 내분의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침략해 들어 오자, 번조선 유민들이 북부여 고두막군대와 연합하여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한4군이라는 유령4군을 역사적 진실인양 떠들어 대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