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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의 시인탐방 8 저문 도시의 강에 詩를 씻는 시인, 정희성
저문 도시의 강에 詩를 씻는 시인, 정희성
도시에 저녁이 스민다. 어둠의 깃털이 날리는 시간이다. 자신이 기른 개인지 자신을 해칠 늑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어슴푸레 밝혀지는 네온등이 강물을 자욱하게 번지게 한다. 오랜만에 강가로 가 선다. 그리고 물이랑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물그림자가 처연하다는 것을, 초하 늦저녁에 바스락거리며 물의 소리들이 빛난다는 것을 알겠다. 누군가 이곳 강가까지 끌고 온 어스름의 발자국이며 눈물 뿌리가 울음으로 맺혀 있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는, 저녁이 젖는 강가에서 시간이 흘러 온 흔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시감은 어디서부터 연원하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슬픔처럼 쭈그리고 앉아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던 도심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그들의 깊은 회한과 정서를 노래하였던 정희성 시인의 대표시「저문 강에 삽을 씻고」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시절,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가 배태한 시대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인은 온 몸으로 시대의 정황을 읊었던 연유이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고.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고.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고.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뜬다,고.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보다 그 시절을 관통하였던 그들의 삶을 위무하는 노래가 어디 더 있었으랴. 낮아서 정중하고 어두워서 가냘픈 단조 가락은 우리들의 70년대를 가만히 조명해 주고 있다. 가난하고 지난했기에 오히려 찬란했던 노동의 시절, 붉게 달아오르는 도심의 달 아래서 자신의 삶과 시를 저문 강에 씻으며 살아왔던 정희성 시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식인으로서 답지해야 할 문학을 노동자의 삶으로 육화 시켜 지켜낸 정희성 시인이었다.
싱그러움이 한창이던 6월 저녁, 정희성 선생님을 마중하기 위해 한국작가회의 대전지부 회원들은 유성 도룡동에 위치한 한식당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희성 시인은 신경림 시인에 이어 백북스 특강 강사로 초청 받으셨던 차였고, 뵙고 싶다는 전화를 드리자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환한 미소와 함께 진한 밤색 셔츠에 베이지 톤 바지, 그리고 이에 잘 어울리는 중절모를 쓰신 선생님께서는 ‘신사’라는 단어를 단박에 떠올리게 하였다. 갈치 조림 정식을 먹으면서 우리의 담소는 이어졌다.
서울 정착 후, 문학이 도래하다
■ 김명원: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평생 교사로서 봉직했던 교직을 떠나셨는데 소회가 있으실 듯 한데요.
□ 정희성: 1972년에 서울 숭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으니까 정년퇴임 때까지 근 35년을 한 학교에서만 근무했습니다. 사립학교라 옮겨 다니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동안 제자 1만 여명에 시집 5권을 상재하고, 결혼하여 아이 둘을 길렀으니 그만하면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졸업 30주년 ‘모교 방문의 날’ 행사에 찾아온 어느 제자가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라고 축복하기에 “자네들 덕에 내 삶이 즐거웠지!”라고 답했답니다.
■ 김명원: 퇴임 후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 정희성: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제가 집에만 있으면 아내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아내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거의 매일 학교에 출근했던 것처럼 비슷한 시간에 외출합니다. 제가 사는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의 부속시설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40여분 뛰고요, 또 20여분 근력 운동도 하지요. 그리고는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엔 친구들을 만나고요. 저녁에는 술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가끔 근무하던 학교에도 가보고 싶기는 하지요. 퇴임하면서 제 책을 모두 학교에 기증하고 나왔는데, 제가 기증한 책을 읽는 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가보고 싶지만, 후배 선생님들을 번거롭게 할 것 같아 삼가고 있어요. 작가회의 사무실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가면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 김명원: 선생님의 결곡하신 성품을 알고도 남겠습니다. 이러한 품격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직을 수임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 정희성: 제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재임 시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해 온 결과로 금강산에서 남북한과 해외문학인들을 포괄하는 ‘6·15 민족문학인협회’가 결성되었던 것이지요. 분단 6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단일 문학인 조직이 탄생한 것이 의미가 깊었고요. 이 협회에서 협의를 통해 ‘6·15 통일문학상’을 제정하고, 기관지인《통일문학》발행 등이 논의 되었지요.
■ 김명원: 참 의미 있는 시도였고 실행였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문학적 과업을 이루기까지의 고된 과정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데요. 우선 선생님의 문청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정희성: 처음으로 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요. 특별활동으로 서예반에 들어가 활동을 했지만 문예반이 주최하는 청맥문학발표회 시낭송을 보면서 부러워서 시를 쓰게 되었지요. 저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지만 백일 후에 선대가 살아온 원적지인 충남 회덕(지금은 대전)으로 거처를 옮긴 후, 기술직 공무원이셨던 부친을 따라 이리, 여수 등지를 떠돌다가, 용산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거든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시절에는 교내 신문사에서 주최했던 ‘대학문학상’이라는 제도가 있어 거기에 출품하였던 시「啄木鳥」가 당선되었지요. 그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요. 1968년, 처음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변신」을 투고하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마종하 시인에게 밀려서 최종심에만 오른 채 낙선을 하게 되었어요. 이후 ROTC 장교로 강원도 원통에서 군 복무를 하다가 제대할 무렵인 1970년에 투고한 적이 있었던「변신」을 다시 손질해서 동아일보에 투고해 당선 되었던 것이지요. 그 때까지 써 놓은 시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대학문학상과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보고, 나에게도 시적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古典의 어느 숲을 지나온 江물 위에
지금은 무섭도록 해진 얼굴이 일렁이는데
이것이 글쎄 누구의 얼굴인지
이 江邊에서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던지면서
생각해 보았는지 몰라.
죽은 사람과 죽지 않은 사람
淡淡한 얼굴을 하고 흘러서는
그렇게 쉽사리 돌아오지는 않을 것 (중략)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속에서 죽었을까
神話와 現實의 어중간에서 우리는 失神한다.
빛이 外面한 땅속 깊이 욕망의 불을 넣어
그 무던한 밤과 어둠을 지킨
우리가 미련한 짐승의 자식인 탓일까
마늘과 쑥 대신 풀뿌리 나무껍질을 씹으며
너무도 오랫동안 强靭한 餘力으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우리들과 싸워왔다.
우리?
눈물이 나도록 슬픈 象徵이여 (중략)
그대 오른 손이 다시금 手琴을 쥐더라도
女人이여,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마디를 풀고 흐를 수 없는 우리,
웃기는 웃어도
웃으라면 내가 그렇게 웃기는 하여도
시시로 파고드는 시름의 주둥이를
종이 접듯 안으로 사릴 줄 아는 슬기로
슬픔을 접어 하늘에다 날릴 날이
다시 노래한 날이 있을까 몰라.
-「변신」일부
■ 김명원: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셨지만 학위를 포기하고 일선 교사로 봉직하신 일은 잘 알려진 일화인데요.
□ 정희성: 그래요. 저는 제대 후 모교인 서울대 대학원에 복학해서 지도교수 정병욱 교수 연구실에서 있으면서 고전문학을 공부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1년 후에 숭문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대학원 공부가 흐지부지 되었고, 곧 이어서 결혼도 하였고요. 그러나 공부를 계속 할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신문기자인 동창생들의 잇단 해직과 투옥, 그리고 부양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어요. 모교 스승이셨던 고 정한모 교수님께서는 제가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강의 중에 받아두었던 리포트를 보충해서 제출하라고까지 권고하셨는데, 저 자신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아 포기했답니다.
시인은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자
■ 김명원: 이제는 선생님의 시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1974년에 상재하셨던 첫 시집『답청踏靑』을 두고 박남희 평론가는 “고전주의적 상상력은 그의 대학원 전공이 고전문학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그가 한학자인 신호열 선생으로부터 杜甫를 배운 사실과 선배 시인 신경림 등과 함께 몸담았던 <민요연구회>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면서 “시가 대부분 짧고 압축미가 느껴지는 것이나 일정한 율조를 띠고 있는 것, 그리고 십구체 향가와 같은 10행 전후의 시들이 많은 것 등은 그의 이러한 고전적 취향을 잘 말해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생님 시 중 10구체 향가를 연상시키는 시로「踏靑」,「매헌의 옛집에 들러」,「제망령가」등을 들 수 있겠고요. 고전적인 전아의 미를 갖추었다는 세간의 평을 받고 있는 시집『답청踏靑』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 정희성: 제 시의 독자 가운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상당수는 첫 시집『답청踏靑』에서 받은 인상에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 후의 변화를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그러한 독자들의 느낌과는 다른 입장에서 오히려『답청踏靑』의 세계를 부정하고 싶었고요. 칠 십 년대 이후 절박했던 정치 현실은 나를 고전적인 안주에 더 이상 머물게 하지 않았거든요. 저는『답청踏靑』이후의 현실 인식이 깃든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후기에서 썼듯이, 역사의 발전을 믿고 이 땅의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무언가를 이룩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양심적인 사람들의 문학과 행동을 뒤늦게나마 자각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어요.
■ 김명원: 이러한 시세계의 변화는 시대 상황과 조응되었던 선생님의 현실 인식 때문이었겠지요?
□ 정희성: 글쎄요. 시인이란 모름지기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산소 결핍 징후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아무도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에도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여겼거든요. 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의 시작과 유신시대, 그리고 80년대 암흑의 시기를 거치면서 나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겠지요. 시인으로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다 보니 저의 시는 사회성이 강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제 시어는 거칠고 공격적으로 변해가게 되었고요.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언어가 시인을 떠나 독자에게 이르는 동안 생각지도 않게 왜곡되고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를 가르치는 한 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제 시「아버님 말씀」을 읽어준 것이 문제가 되어 교단에서 쫓겨난 사건과 제 시에 고무되어 시위를 하다가 다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 김명원: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두 번 째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세 번째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의 사이에는 참 깊은 변화의 세월의 고여 있는데요.
□ 정희성: 그렇지요. 두 번 째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60년대 시인들의 내면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반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기는 했으되 제 자신의 내면의 성찰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가『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에 와서는 그와 같은 반성, 다시 말해 지식인적 시작詩作의 한계를 절감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노동자가 생각하는 현실과 지식인인 제가 보는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이 점을 인정해야 했던 거지요.
저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삽을 씻어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시는 실제로 제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 아니라 노동판의 십장 노릇을 하신 아버님의 노동을 생각하면서 쓴 시니까요. 더욱이 80년대 들어서서는 노동자 출신의 좋은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두 번째 시집이 의미를 갖는 때는 지나갔다고 생각했고, 제 자신으로 돌아가서 자신에게 충실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런 점이 두 번 째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세 번째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의 시세계의 다른 점이에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 얼마나 치열한 자기 성찰을 하시고 계신 분인가 하는 점이 드러나는 말씀인데요. 노동자 시인이 아닌 채로 노동 현실의 시를 쓴다는 한계를 통감하시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시를 창작하시게 되는 또 한 번의 변환기를 맞으신 셈이군요. 세 번째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에서는 선생님 시에서 생경했던 그리움이나 사랑 등의 맑은 정서를 만날 수 있지요.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전문
□ 정희성: 가파른 시대에 맞대거리를 하며 시를 써 오다가 이제는 군사 정권에서도 벗어났고 민주화도 되었으니 눈을 곱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려고 쓴 시지요. 바라는 게 있다면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연애시를 한 편이라도 남기고 싶고요.
■ 김명원: 반드시 소망을 이루시리라 여겨집니다. 선생님께서는 ‘만해 문학상’과 ‘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하셨는데요. 불교와 인연이 있으신가요?
□ 정희성: 저는 세례명이 토마스 아퀴나스로 가톨릭 신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문화로서의 불교적 상상력을 차용해서 쓴 시들이 꽤 있어요. 아마도 제 자신의 내면에는 어딘가 불심이 많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늙은 릭샤꾼」,「그가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등 인도 여행과「고구려에 다녀와서」,「서경별곡」,「낯선 나라에서의 하룻밤」등 북한 체험을 하고 오셔서 자기 성찰을 담지한 시들을 다섯 번째 시집『돌아다보면 문득』에 수록하셨지요.
□ 정희성: 그래요. 1997년도와 2001년도 두 차례에 걸쳐서 인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첫 번째 인도여행은 아들의 친구 부친인 대기고 이사장과의 인연으로 여행경비를 부담해 주시는 바람에 간 것이고요. 두 번째 여행은 상금을 비축했다가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온 것이에요. 제가 시「인도의 기억」에 썼듯이 인도는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낯익은 곳이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처럼 눈에 밟히는 곳이더라고요. 아마도 인도는 산업화되기 이전의 우리 과거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구역질을 했네
주검 타는 냄새
어슴푸레 밝아오는 갠지스 강
비좁은 사원 골목을 총총히 빠져 나오며
죽음에게 붙잡힐까 뒤도 돌아보지 않았네
오직 죽기 위해 갠지스에 온 노인들이
내 발목을 잡고 빈손을 내밀었네
눈앞 아득한, 허기진 손들의 숲
그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며
차마 하늘을 볼 수 없었네
한때
민중의 좋은 벗이 되리라 다짐했던 나
―「갠지스 강」전문
딱히 어디로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늙은 릭샤꾼은 힘에 겨운 듯 야무나 강변에 나를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 건너 편으로 죽은 자를 위한 화려한 집 타지마할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 이 쪽은 눈길을 주기가 민망할 빈민들의 거처였다. 이 묘한 지점에 나를 세워두고 어쩌자는 것일까. 나는 늙은 릭샤꾼의 눈을 들어다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서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눈길은 나를 지나 내 뒤의 무엇을 향해 있었는데 퀭한 눈으로 그가 건너다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을 뿐이었다.
―「늙은 릭샤꾼 」전문
□ 정희성: 정작 보름동안의 인도 여행에서 제가 보고 느끼고 온 것은 간디도 늙은 릭샤꾼도 그들이 꿈꾸었을 아름다운 세상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인도를 통해 아직도 전쟁의 위협과 빈곤에 시달리는 한반도의 현실을 보았고, 그 가운데 초라하게 서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지요. 제가 앞으로 관심을 가질 주제가 ‘반전’과 ‘평화’예요. 2001년도에 남북평화통일 대축전 참관 차 도종환, 김준태 시인등과 함께 6·15 선언 실천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저는 북한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분단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북한의 계관 시인 오영재를 만나서 친필로 사인한 시집을 건네주고 돌아왔지요. 그때의 북한 체험이「낯선 나라에서의 하룻밤」등의 시로 나타나게 되었고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당대의 현실 인식을 시에 반영하고 계셨음을 드러낸 말씀인데요. 시력 40년 동안에 집적하셨던 ‘시’란 무엇인가요?
□ 정희성: 저는 40년 동안이나 시를 써 왔으면서도 아직 시에 허기져 있어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비가 안 돼 있어요. 내가 ‘이것이 최상의 시다’라고 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썼다면 저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을 거예요.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거든요. 그러니 저에게 여전히 시는 진정한 시의 앞모습과 대면하기 어려운 갈증의 연속이고, 손 뻗어 만지면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영원한 짝사랑이지요.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음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詩를 찾아서」전문
□ 정희성: 엘리엇은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라고 말했지요. 어쩌면 시에 대한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이나 많을지도 모르겠고,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수도 있겠어요. 그런 면에서 저는 김종삼 시인의「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라는 시를 좋아해요.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이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라는 시지요.
어린이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세상
■ 김명원: 선생님께서 여생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시는 시의 지향점을 알려 주시지요.
□ 정희성: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사회성이 강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먼저 언급하였지요. 그러다 보니 세상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버릇이 생겼고, 언어는 거칠어지고, 언어가 거칠어지다 보니 사람 또한 거칠어지고 공격적이 되더라고요. 내가 했던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적도 있었지만 저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해서 회피할 생각은 없어요. 그동안의 시적 작업에 대해 준엄한 비판의 소리도 마다하지 않을 거고요.
얼마 전 제주 올레5코스를 걷다가 법정의「존재의 집」이라는 잠언이 돌에 새겨진 것을 보고 왔는데요. 이렇게 새겨 있더라고요.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요.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게 고요하게 나오고,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라고요.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으니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고 말이지요. 얼마나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잠언입니까. 말이 곧 존재의 집이라니요.
오래 전,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에 사는 제자의 집을 방문했다가 쓴 시가「민지의 꽃」이에요. 제 시에 나오는 민지처럼 어린이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지요. 시인도 역시 민지와도 같이 어린이의 심정이어야 경계가 없어요. 어린이가 쓴 글은 다 시 같다고 말한 이도 있잖아요? 저는 어린이의 말과도 같은 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민지의 꽃」전문
■ 김명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의 언어에 대해 저 역시 숙고하게 되는데요. 생텍쥐페 리의『어린 왕자』에서 어린이인 작중 화자가 어른들에게, 보아 뱀이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을 보여 주었던 장면이 연상됩니다. 어른들에게는 설명이 필요하지만 어린이는 직관으로 모든 사물과 소통을 하니 어린 아이다운 사고와 언어가 얼마나 시와 닮아 있는 것인지요. 그러니 선생님의 시「민지의 꽃」에서처럼 잡초를 ‘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쓸 줄 아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정희성: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낡은 세계에 친숙해지는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이 보는 구태의연한 세상도 때 묻지 않은 어린애의 눈으로 보면 그만큼 깨끗하게 보일 거예요. 때 묻은 세상을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시의 몫이겠지요. 공자가 말한 ‘시삼백일언이폐지 사무사詩三百一言以蔽之 思無邪’에서 곧 ‘사무사思無邪’란 어린애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저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욕망을 끊어버리고,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욕심마저 끊어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되어야 시가 다가오니까요.
저는 70년대 등단과 더불어 시작된 사회의 격변기 속에서 줄곧 일그러지고 구석진 곳에 눈을 맞추고 시를 써오느라 오랫동안 미움과 대결의 언어, 분노의 감정, 증오의 대상을 알아보는데 길들여져 왔어요. 제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인 환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거든요. 저의 시는 한 시대의 불의와 맞서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사람들의 영혼에 바쳐진 것이었어요. 이제는 새로운 길을 찾고 싶네요. 저는 저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면 저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되었으면 싶어요. 이제 새로운 길로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유법이무법 有法而無法
■ 김명원: 시인들에게 주시는 충고나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 정희성: 2001년도에 우리가 초청한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나를 바꾸어버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뼈아픈 고백입니까? 그러나 시가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 쓰기를 그만 두어야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인들이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일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낡은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원소나 원리를 발견해내는 일에 비견할 만하겠지요. 예를 들어 조선조 500년 동안 국화의 의미는 늘 ‘지조와 절개’였어요. 진부하지요. 하지만 서정주에 이르러 국화는 그 의미를 갱신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하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에는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말하자면 전우주적인 조화가 있었다는 말인데, 이야말로 서정주 시인이 생명파시인이라고 불릴 만한 단서가 되는 것이에요. 그의 시「국화 옆에서」를 문학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국민이 느낄 수 없는 남다른 풍부한 정서를 ‘국화’에서 느끼게 될 테니까요.
이처럼 시인은 평생에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 말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고요. 두보가 “어불경인 수사불휴語不驚人 雖死不休”, 즉 “나의 말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죽더라도 쉬지 않겠다”는 말도 이런 경지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차피 낡은 세상 낡은 사물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시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운명을 타고났어요. 시인들은 무엇보다 상투적이고 관용화한 틀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니, 흔히 말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끊임없이 독창적이고도 참신한 이미지를 창조해내려고 안간힘을 다할 테고요. 그러나 이 ‘낯설게 하기’가 지나치면 소통을 가로막을 수 있어요. 기초가 튼튼해야 비약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일찍이 완당阮堂이 설파한 ‘유법이무법有法而無法’이란 말이 있어요. 이는 “화법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요, 그렇다고 화법에 얽매이는 것도 못 쓰는 일이다. 오직 먼저 법도를 엄격하게 지킨 뒤에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신품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니 유법에 극진함으로써 연후에 무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란 뜻으로 이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 김명원: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유념해 보시는 시인이나 시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 정희성: 저는 시를 읽을 때 좀 편식을 하는 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 위주로 읽으니까요. 그러다가 우연히 엄원태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는데 아주 놀랐지요. 좋은 시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구나 해서요. 말 이전의 느낌이 오도록 만드는 것, 이게 시인의 몫이구나 싶더라고요. 엄원태 시인은 대구에 살고 있는데 투석을 요하는 환자라고 들었어요.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는데 제 시의 편식 습관을 고쳐 주었지요.
그 후에 유념해서 여러 시인들의 시들을 읽는 편인데요. 허나 재능 있는 시인들은 많지만 ‘좋은 시인’들은 적더라고요. 좋은 시인이란 인간적으로 따를만한 시인을 일컫고요. 재능 있고 인격을 갖춘 시인이라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런 시인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서, 사후에도, 그리고 외국에서도 읽힐 수 있는 시를 쓰겠지요. 바로 위대한 시인인 것이지요. 저는 “그 사람 재주는 있지만 사람은 못 쓰겠더라.”는 소리는 안 듣고 싶습니다.
■ 김명원: 선생님, 여담인데요.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요. 수능 시험 언어 영역에 자주 출제되는 선생님 시를 두고 문제를 푸실 때 정답을 맞추시나요. 최승호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한 수능 문제에 오답을 냈다고 실토했는데요.
□ 정희성: 저도 잘 몰라요. 그래서 학생들이 문제지를 가지고 와서 물으면 우선 정답이 뭐냐고 물어요. 그런 다음에 아마도 출제한 사람이 이런 관점에서 답을 요구하고 있겠다고 설명해 주곤 했지요.
■ 김명원: 선생님 시 중에 재미있는 시가 있는데요.「시인본색」이라는 시요. 그 시를 읽으면 선생님 댁 가족 상황이나 분위기가 궁금해집니다. 지금 사시는 곳은 어디인지요? 그리고 혹시 자제분들 중 문학을 하는 분은 있는지요?
□ 정희성: 1972년에 결혼을 하고서 제가 살던 영등포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방학동으로 옮겼어요. 아내가 친정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요. 방학동으로 이사할 때 미아리 고개를 넘으며 참 슬펐지요. 그 땐 왜 그렇게 그 길이 멀게 느껴졌던지….「시인 본색」이라는 시는 저를 우습게 아는 집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에요. 엄숙한 시만 쓰면 재미없어서 농담을 해보고 싶어 쓴 시지요. 그 시를 발표하고 나자 시는 자신이 썼는데 왜 원고료는 시인이 받느냐고 아내가 놀리더군요. 우리 집사람이 말을 아주 재미있게 잘해요. 그 말들을 다 받아 적으면 재미있는 시들이 많이 나올 듯 하고요.
그리고 제 집의 큰 아이가 73년생 딸이고 둘째 아이가 75년생 아들인데요. 큰 딸이 뭔가 끼적거리기는 하는데 꺼내 보이진 않고 있네요. 결혼을 안 하고 있는 아들은 불편을 좀 느껴 보라고 독립을 시켰는데 애들 엄마가 파출부처럼 가서 보살펴줘서 문제예요.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시인 본색」전문
■ 김명원: 선생님, 마지막으로 저희 시단에 주고 싶으신 당부가 있다면요.
□ 정희성: 우리나라는 10년 단위로 역사의 위태로운 일들이 일어났지요. 현재 2010년을 기준으로 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나라 잃었던 한일합방 100주년, 6·25 동족상잔의 비극 60주년, 피로써 민주주의를 외친 4·19혁명 50주년, 광주항쟁 30주년 등이요. 이젠 더 이상 슬픈 기념일을 만들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70년대부터 시를 써 왔는데, 그 70년대가 어떤 시대였나요? 그리고 지금 2010년, 우리는 어느 지점에 서있나요? 자본주의적 성장이 곧 진보이고 발전일까요? 40년 동안에 우리가 이룩한 것도 많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지요. 기계문명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환경 파괴, 기후 변화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니까요. 더구나 보수 정권이 들어서서 그동안 피 흘려 얻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되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 시단부터 이런 반성을 해야 합니다.
■ 김명원: 선생님과 여러 말씀을 나누다 보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고 오늘 나누지 못한 이야기꽃을 피워야할 듯싶은데요.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들, 고맙습니다.
사십년을 시업에 게으르지 않았으면서도 겨우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 첫 시집을 출간했을 때 적어도 오년에 한 권씩은 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이 십년 만에 겨우 한 권씩을 추가했다는 시인. 유명세를 타면 반드시 출간하게 되어 있는 산문집이나 교육서, 혹은 동시집을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은 너무도 결곡한 시인. 그가 바로 정희성 시인이다.
시대의 격풍과 마주하면서도 변함없이 차분한 성품을 시로 형상화해 낸 정희성 시인은 지나온 시절에 대한 자신의 시세계와 시정신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맑은 어투는 찬찬하고 더구나 유창하지 않아서 신뢰를 자아냈다. 조심히 건너는 말씀의 행간마다 진실과 진정의 행보가 찍혔던 연유였다. 왜 시인들이 그를 두고 선비 같다느니 지사 같다느니, 라고 일컫는 지가 이해되는 시간이었다. 그가 시창작을 설명하며, 묵언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들어가 쉴 만한 작은 공간을 빚어낼 수 있을 따름이라고 표현한 엄격성도 이제야 알겠다.
서울행 마지막 열차표를 준비해 드리고는 발차 시간이 어지간히 남아, 역 앞 호프집에서 선생님과 생맥주를 마시며 초하의 밤을 익힌다. 유월이 되자 한결 풋풋해진 연둣빛 가로수 그늘들이 함부로 창가로 휘어지고, 골목에서는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귀가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제 잠시 후면 선생님을 배웅해야 하리라. 어둠이 젖는 도심의 강으로 돌아가시게끔 배웅해 드려야 하리라. 순결한 어깨를 적시며 웅크려 앉아 정성스럽게 시를 씻으시는 모습을 다시금 그리워해야 할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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