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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사상의 꽃들
반경환 {사상의 꽃들}은 한국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후엔 소장자의 가문의 영광이 될 책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노틀담의 성당 종탑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노틀담의 곱추」를 썼다는 빅토르 위고가 생각나고 연인에게 달려가며 빨리 가고 싶어 삼십분마다 마부에게 팁을 주었다는 발자크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생각나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울 첼란이 생각나고 좌우명이 진리는 구체적이라다던 브레히트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가 생각나고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게네스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왕」이 생각나고 쉴러의 시에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마지막으로 미셀 트루니에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 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천양희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에서
천재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두뇌와 그 재주를 지닌 사람을 말하며, 그는 선천적으로 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말한다. 비극의 진수는 고독이고, 이 고독은 천재의 보증수표가 된다. 천재는 친구가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와의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인류 전체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또, 그것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생각할 줄 아는 그의 사고법을 대다수의 인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와 바흐가 그렇고, 고흐와 파울 첼란과 브레히트가 그렇다. 존 케이지와 디오게네스와 괴테가 그렇고, 슈베르트와 베토벤과 미셀 트루니에가 그렇다. 천재란 시대를 앞서 가는 단 한 사람이며, 이 단 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우정’이란 한낱 공허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천재는 고독해야 하고, 이 고독 때문에 그토록 처절하게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괴로움이 고독의 생산성으로 나타나고, 그 구체적인 증거가 ‘노틀담의 꼽추]’,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고흐의 자화상’, ‘파울 첼란과 브레히트의 시’, ‘존 케이지의 음악’, ‘디오니게스의 자유’, ‘괴테의 마왕’,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미셀 트루니에의 묘비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천재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 새벽이란 날이 밝을 무렵이고 하루의 시작이지만, 그러나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의 ‘새벽’이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새벽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운명도 생각해보고, 발자크의 연인에 대한 사랑의 강도도 생각해본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도 생각해보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도 생각해본다. 나치 치하의 유태인으로서 그 비극적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파울 첼란의 시, 현실주의의 대가인 브레히트의 시와 연극,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니게스의 철학, 마왕을 작곡한 슈베르트,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 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라고 노래했던 미셀 트루니에 등----. 이 모든 인간들은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에서 새롭게 탄생한 고산영봉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천재들이 천하의 절경으로 피어나고, 따라서 자아를 망각한 황홀함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게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없이 거룩하고 더없이 경건해지는 시간이며, 언제, 어느 때나 삶의 기쁨이 샘솟아나오는 천재의 시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 한 사람의 친구도 없는 천재, 고독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그 고독의 생산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천재, 어느날 갑자기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나듯이, 느닷없이 미래의 시간대에서 출현한 천재----. 이 천재는 현실의 모든 친구들을 잃었지만, 이처럼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천재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자기 자신의 붉디 붉은 피로 변모시킨다. 최고급의 격세유전이며, 신진대사의 교체는 원활해지고, 언제, 어느 때나 역동적인 삶이 전개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혼자 깨어 있다는 것이고, 혼자 깨어 있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 간다는 것은 그 어떠한 비굴한 굴종이나 타협도 없이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은 그의 운명을 새롭게 창출해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가치의 창조자이며, 모든 사건과 사고들의 심판자이고, 전 인류의 아버지(스승)이다. 부디 부디 수많은 천재들과 대화를 나누고, 고귀하고 위대한 천재의 피를 생산해내거라! 부디 부디 새벽에 홀로 깨어 새로운 세상을 열고 그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을 구원해내거라! 부디 부디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을지라도 그 운명을 사랑하고, 그 천재의 운명으로 최고급의 인생찬가를 불러보라!
모든 시는 인생찬가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행복의 연주자일 수밖에 없다.
찬양하고, 또 찬양하라!
천양희 시인의 [새벽에 생각하다]는 천재의 시간이며, 최고급의 인생찬가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의 땅
신대철
“x제국주의자들을 물러가게 하라! x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인 x도당들의 독재를 때려 부수어라!”
“자유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2의 생명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야음을 통해 비무장지대로 몸을 숨겼다가 날이 아주 밝아졌을 때 국군 초소로 오십시오. 총구를 땅에 향하고 흰 헝겊이 있으면 흔드십시오.”
풀어진 몸, 김이 모락모락 난다,
낡은 지뢰탐지기를 선두로
도로정찰조가 돌아온다
조금 비 개인 날,
모래들은 산 밑에 하얗게 씻겨 있다. 강물굽이를 돌아나온 놀란 물새떼, 안개를 강가로 몰며 하나씩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그날밤 늦게 남방한계선 철책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뻑뻑하여 말 안 듣던 팔 다리, 열쇠 채우는 소리 땜에 앞으로 앞으로만 내디뎌야 했다. 총뿌리를 정신없이 돌리다 보면 바람 소리, 작은 밤짐승, 안개 자욱히 밀리는 소리, 별똥이 시끄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지뢰표지판이 길을 안내하며 좁혀 들고 있었다. 결승전 스포츠중계 같이 열띤 어조로 밤새 방카와 골 속까지 뒤흔들던 대남방송 스피커 소리, 되풀이, 막 펼쳐진 아침밥 짓는 연기에 젖어도 부드럽게 들리지 않던 그 억양.
또 무지개가 뜬다, 둥그런 무지개
저 둘레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강기슭에서 은은히 피어 올라
군사분계선을 덮고
산과 산 사이를 까마득히 잠겨 놓은 안개가
제 몸을 비틀어 짜내 띄워 놓은 무지개
유난히 빨강 파랑이 두드러진 저 무지개 속엔
어른어른 그림자가 비친다.
무지개는 누구의 혼인가? 저 자리서 죽은 자와 죽은 자를 기다린 자가 이제 만나 손잡고 輪舞를 즐기는가? 왜 저 자리서만 떠야 하는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내가 볼 땐 내 그림자만 네가 볼 땐 네 그림자만, 이상하다, 우리들이 한데 어울려 박자를 맞추려 하는 동안 갑자기 춤은 멎고 다시 한 겹 벗겨지는 안개,...... 강물은 푸르다. 저 푸름이 온 산에 가득 안개를 씌우는 걸까? 강물은 우리들의 군화를 적시며 흐르기만 했다. 끊임없이. 바람이 잔 물결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쓸어 낼수록 더욱 푸른 물가엔 조용히 물고기떼들이 나와 놀고 있었다. 마주, 중태기, 꽃붕어, 징거미, 아 山고기. 불길하다. 잡으면 꼭 놓아 줘야하는 山고기, 불길하다. 하필 이 강에 山고기가 그리 많을까? 좀 깊은 물 속에선 무릎이 떨어지고 가랑이가 찢어진 군복하의들이 물이끼에 감춰져 있고 쭈그러진 수통, 뼈들. 녹슨 쇠붙이며 탄피, 종이돈, 각종 불발탄들. 화약낸지 풀낸지 가려내기 어려운 고리타분한 냄새들이 발길에 채어 흩어지곤 했다. 불내, 어디선가 불내가 난다. 후욱 끼쳐오는 불내, 불똥이 튀기고 토끼 노루똥이 젖은 채 타는 냄새. 탁 타닥 나무껍질 타는 소리, 실탄 터지는 소리, 거무튀튀했다. 연기 속에 날름날름거리던 불길, 순식간에 山 하나를 잡아먹고 꿈틀거리며 북방한계선 목책 있는 데로 불쑥 방향을 틀던 불길. 시뻘겋게 솟구쳐오른 불꽃. 하나 둘 셋 넷 불꽃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쾅쾅, 쾅쾅, 산산조각 나던 우리들.
멀리서 들리는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
山, 山, 山, 軍隊
몇 조각 구름들이 뭉쳐서 山 밖으로 몰린다.
능선들은 시퍼렇게 위장되어 까져 있고
토굴 속에 들어가선 나오질 않는 군용차들,
모래 운반차? 군용차? 그리고 무슨 차들일까?
아침엔 구보병력이 보이고 연달은 기합, 조포훈련, 소리 치면 한번 이상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우리들 옆 GP엔 나지만한 山들
싱싱하게 깃발이 펄럭거린다.
깃발이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 말고 깃발도 살아 있었어...... 친구여, 보고 싶다. 2km 내의 너를 만나는 데 6개월론 모자르구나. 네 앞산 우물길에 사람이 나타나 있다. 우중충하다. 사람, 무장된 사람. 간밤 총소리는 오발이라구? 자발적이었다구? 늘 들어도 네 목소리가 그립구나. 山도 배경으로 만들고 싶다. 고집도 가려진 네 얼굴, 코마저 작게 보인다. 포대경에 잡히는 허탈하고 어색하게 웃는 네 얼굴. 나무들이 점차 가을로 돌아서는 것도 잊고 딸딸이를 들고 포대경을 들고 마주보며 바보같이 웃는 우리들. 生이란 무엇일까? 적? 죽음이란? 적? 땅이란? 이념이란?
잠을 좀 자야 한다.
총을 휴대한 사람들에겐 꿈이 차례가 오지 않는 잠,
며칠째 개꿈도 들지 않는다. 신경만 뿌릴 잡는다. 물차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담배 한 대, 자기 매질, 무조건 용서, 무조건 체념, 꿈이 갖고 싶다.
초가집이 두어 채 양지 쪽에 쓰러져 있다.
그 옆에 황색 팻말이 주위를 황색으로 물들인다.
팻말이 군사분계선을 말해 주고 있을 뿐,
낯익은 풀꽃들이 팻말에 기대어 피어 있었다. 山길은 강 가까이 이를수록 희미했다. 마을 골목터엔 박쥐가 날고 웬일로 울지 않은 매미, 매미는 사람 있는 마을에서 사람을 보며 우는가? 이 마을 사람들은 신발과 밭을 버려두고 나룻배를 부숴 놓고 지금 어디서 무얼하는가? 갈대밭이 된 과수원, 봄이면 갈대밭에 흐드러지게 피는 복사꽃, 아아, 우리들과 여기서 임시 헤어진 자여, 내내 무사하라.
무사하라, 발목이 떨어져 지뢰밭에 뒹굴던 얼굴들
몇 푼의 휴가비를 만지작거리며 혹은 흔들던 웃음들
맞출 수 없이 흩어진 사진 조각들, 편지 글귀들
죽어서 지뢰표지판 하날 남긴 사람들
죽어서 오래오래 잠들 수 있고 오래오래 무사한 사람들
제대 특명을 기다리며 군대 때가 묻은 생각들을 산병호에 강 쪽에 내버리며 햇빛 쐬던 고참병들도 보급차 편에 사라진다.
산병호에 어둠이 스며든다.
깊은 한밤에만 사람이 다니는 길,
山길 도처에 조명지뢰를 설치하며 클레이모어 위치를 확인하는 사이 우리들은 어느새 軍人이 되어 있다, 완전한
하루가 가고
갈라진 땅에서 또 하루
스스로 갈라진 군대로 만나는 우리들, 한국인들.
----신대철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서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나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나 자기 땅- 자기 영토를 지키지 못하면, 그 민족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이민족의 노예가 되어 그 비극적인 일생을 마치게 된다. 우리 한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이나 자기 땅-자기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강대국을 섬기는 노예민족의 운명을 선택한 바가 있다. 사대주주의事大主義는 노예민족의 사상이며, 이 사대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한, 우리 한국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남북이 분단된 지도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통일의 꿈은 요원하기만 하고, 소위 4대강국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x제국주의자들을 물러가게 하라! x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인 x도당들의 독재를 때려 부수어라!” “자유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2의 생명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야음을 통해 비무장지대로 몸을 숨겼다가 날이 아주 밝아졌을 때 국군 초소로 오십시오. 총구를 땅에 향하고 흰 헝겊이 있으면 흔드십시오.” “나무들이 점차 가을로 돌아서는 것도 잊고 딸딸이를 들고 포대경을 들고 마주보며 바보같이 웃는 우리들”, “총을 휴대한 사람들에겐” “개꿈도 들지 않는” 우리들의 땅, “발목이 떨어져 지뢰밭에 뒹굴던 얼굴들/ 몇 푼의 휴가비를 만지작거리며 혹은 흔들던 웃음들/ 맞출 수 없이 흩어진 사진 조각들, 편지 글귀들/ 죽어서 지뢰표지판 하날 남긴 사람들/ 죽어서 오래오래 잠들 수 있고 오래오래 무사한 사람들”, “山길 도처에 조명지뢰를 설치하며” “하루가 가고/ 갈라진 땅에서” “스스로 갈라진 군대로 만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남북현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신대철 시인의 [우리들의 땅]은 한국시문학사상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산문시이며,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최전방의 현역장병의 눈으로 ‘무지개빛 통일의 꿈’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결승전 스포츠중계 같이 열띤 어조로 밤새 방카와 골 속까지 뒤흔들던 대남방송 스피커 소리” 속에서도 “무지개는 누구의 혼인가? 저 자리서 죽은 자와 죽은 자를 기다린 자가 이제 만나 손잡고 輪舞를 즐기는가?”라는 시구 속에는 얼마나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현역장병의 꿈이 담겨 있는 것이고, 또한, “하루가 가고/ 갈라진 땅에서 또 하루/ 스스로 갈라진 군대로 만나는 우리 한국인들”이라는 시구 속에는 얼마나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신대철 시인의 꿈이 담겨 있는 것이란 말인가? 신대철 시인의 [우리들의 땅]은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나도 슬프다는 것은 동족상잔의 비극(분단현실의 비극)에 맞닿아 있고,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은 ‘무지개빛 통일의 꿈’에 맞닿아 있다. 한국시문학사상, 이처럼 대단히 깊이가 있고 지적인 시도 없었고, 또한 그 인식의 힘을 이처럼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쓴 시인도 없었다. 현실(남북분단)에서 환상(남북통일)으로, 환상에서 현실로 자유자재롭게 넘나들며, 그 비극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우리들의 땅]은 아직도 내 가슴을 뛰게하고, 대한민국의 영원한 명시로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독일에서 보듯이, 남북통일처럼 더 쉽고 간단한 문제도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국가도, 그 어떤 민족의 지도자도 우리 한국인들의 ‘남북통일’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소위 4대강대국들과 그 지도자들의 너무나도 사악하고 교활한 야욕을 꿰뚫어보고, 그들보다 더 뛰어난 외교전략을 구사할 수 있으면 된다. 남북통일은 너무나도 쉽고 간단하며, 전인류를 감동시킬만큼의 대의명분도 우리가 갖고 있다. 문제는 오랜 시간과 돈이며,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트럼프와 아베와 시진핑과 푸틴의 지식을 단숨에 돌대가리들의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의 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북통일의 문제는 인간의 지적 능력의 문제이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황제 같았으면 벌써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전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
“나무들이 점차 가을로 돌아서는 것도 잊고 딸딸이를 들고 포대경을 들고 마주보며 바보같이 웃는 우리들”, “총을 휴대한 사람들에겐” “개꿈도 들지 않는” 우리들의 땅----. 하지만, 그러나 주입식 암기교육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영원히 남북통일을 이룩한 주권국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은 성장촉진제이지만, 주입식 암기교육은 발육중단제(성장억제제)이기 때문이다. 독서중심의 글쓰기를 하면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황제가 출현하지만, 주입식 암기교육을 하면 이명박과 박근혜와 최순실과 박정희 등이 출현한다. 남북통일을 이룩하려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보다도 더 뛰어난 천재(영웅)가 필요하지만, 주입식 암기교육은 영원한 바보와 영원한 어린아이만을 생산해내게 된다. 우리 한국인들의 주특기는 뇌물요리와 좀도둑질과 그리고 표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부정부패이고, 그 이념의 국방정책은 사대주의이다.
대국을 잘 섬겨라! 그러면 영원한 분단국가의 노예가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에 소환되어갔을 때, 부시가 this man이라 불렀고,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easy man이라고 불렀다. 전자는 막말로, “이 새끼, 왜 헛소리해 쯤”이 될 것이고, 후자는 “이 노예새끼 죽여버릴거야 쯤”이 될 것이다. 사대주의와 부정부패가 건국이념인 한국놈들아, 너희들이 언제 인간 대접을 받을 수가 있겠니?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한국인들도 해마다 노벨상을 타고, 전인류의 존경을 받는 일본인이 되었을 것이다. 뇌물로 밥먹고, 뇌물로 숨쉬며, 표절로 출세하는 너희들이 쓰레기이지, 인간이냐? 도대체 일본을 욕할 자격이나 있니? 당장 전국의 소녀상부터 철거하거라! 이 못난 노예놈들아!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시조는 뇌물이다. 뇌물의 이름만 들어도 전국민이 만장일치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린다.
날마다 뇌물의 축제이고, 전국토가 뇌물의 성지이다.
獅子
-- 모교의 교정에서
박남철
내 앞발에 박힌
이 깊숙한 가시를
핥다가 나는 이따금
부릅뜬 눈을 들어, 핥
야 이 개새애끼들아
내 머리, 오 이 구름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인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
----박남철 시집 {지상의 인간}에서
이성복과 황지우와 박남철은 이상의 후배 시인들로서, 그들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시인들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상 이후, 그 어느 시인들보다도 초현실주의의 사상과 기법을 받아들인 시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유연상과 자동기술의 기법은 물론, 그들의 풍자와 해학을 통한 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등은 개인의 자유와 인간해방을 간절하게 꿈꾸었던 1980년대의 시대정신과 맞물려서, 1980년대를 ‘시의 시대’로 이끌어 나갔던 장본인들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무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라는 것, 잔디밭 잡초를 뽑아내는 여인들이 자기 자신의 삶까지도 솎아낸다는 것,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자신의 하늘까지도 무너뜨린다는 것, 노인과 便痛의 다정함 속에 몇 건의 교통사고와 몇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모두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 [그날]의 가장 핵심적인 전언이라면, 이성복 시인의 자유연상과 자동기술의 속도감 속에는 한국사회 전체가 속속들이 병들었다는 가장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진단이 그의 풍자와 해학을 통한 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도 마찬가지이고, 박남철의 [사자--모교의 교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황지우와 박남철은 신문기사와 텔레비전 보도내용, 유행가의 가사와 시정의 잡배들의 온갖 욕설과 은어와 비어와 사투리까지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시인들이며, 그들 역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위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풍자는 사회적인 죄악상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을 말하고, 해학은 그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을 너무나도 유머러스하게 희화화시켜 놓는 어떤 것을 말한다. 풍자와 해학은 반드시 기지, 반어, 역설, 언어유희 등으로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그 주체자들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 자재롭게 넘나드는 것은 물론, 과감한 형태파괴적인 시들을 낳게 된다. 시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非시적인 것만이 있다. 아니, 非시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시적인 것만이 있다. 그들이 모두가 다같이 서투른 공산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주제와 소재, 또는 의식과 무의식의 측면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초현실주의자가 되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지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재빨리 발휘되는 재치를 뜻하고, 반어란 본뜻과는 반대되는 말을 함으로써 문장의 의미를 강화하는 방법을 말한다. 역설이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에서처럼, 표현상이나 상식적으로는 전적으로 모순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말을 뜻하고, 언어유희란 그야말로 말놀이와 말잔치를 뜻한다.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하루]에서의 대도둑의 절도품목들은 거꾸로 그 대도둑보다는 그러한 고가의 사치품들을 소유하고 있는 특수한 부유층들의 그 도덕적인 부패와 타락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시적 화자는 일체의 사적인 감정을 숨기고 그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절도품목들을 제시해놓고 있지만,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치품목들은 대부분의 일상인들에게는 접근불가의 대상들이며, 따라서 그 특수한 부유층들의 부도덕성만이 드러나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위대한 ‘재(灰)의 왕국’이고, 이 땅의 소시민들은 매우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황지우의 시적 전언이기도 한 것이다.
박남철의 [사자--모교의 교정에서]라는 시는 ‘모교’라는 곳이 사자의 웅대한 기상과 그 화려한 꿈을 심어주기보다는 그 어린 사자의 앞발에 도저히 뽑아낼 수 없는 가시를 박아놓았다는 ‘분노’를 표현해보인 시라고 할 수가 있다. 학교는 백만 두뇌를 양성하는 곳도 아니고,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가르쳐 주는 곳도 아니다. 또한 학교는 진리를 탐구하는 곳도 아니고, 전인교육을 가르쳐 주는 곳도 아니다. 학교는 오직 값비싼 등록금이 자라나는 곳이고, 또한, 스승이라는 밀렵사냥꾼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곳이다. 학교는 선후배들의 一刀必殺의 劍法이 자라나는 곳이고, 또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양심의 뒷통수를 치는 厚顔無恥의 秘法이 자라나는 곳이다. 오늘날의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밀렵사냥꾼들의 사냥의 터전이라는 것이 박남철의 가장 날카롭고 충격적인 전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앞발에 박힌/ 이 깊숙한 가시를// 핥다가 나는 이따금/ 부릅뜬 눈을 들어, 핥/ 야 이 개애새끼들아아”라는 시구나, “내 머리, 오 이 구름 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힌/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라는 시구에서처럼, 그의 문장은 완성됨을 모르고, 그 완성되지 않은 파열음을 토해내며, 그 분노의 대명사인 그 거친 욕설들이, 마치,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상,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시인은 모든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현자(의사)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제일급의 시들은 때로는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탕자들을 등장시켜 놓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전위주의는 대한민국의 해체를 겨냥하는 한편, 또한, 자기 자신들의 생명의 해체까지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식의 파괴는 자기 자신의 파괴이며, 자기 자신의 파괴는 형식의 파괴이다. 아니, 형식의 파괴는 새로운 형식의 창조인 것이고, 자기 자신의 파괴는 또다른 ‘나’의 탄생이기도 한 것이다(반경환, [전위주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선구자들],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2).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 중에서 하버드대학교와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 등, 미국의 명문대학교로 유학을 갔다온 학자들은 수없이 많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 수많은 학자들이 대한민국의 모든 요직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미국 명문대학교의 ‘천재생산의 교수법’을 역설하는 학자는 단 한 명도 없고, 오히려, 거꾸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주입식 암기교육’의 열광적인 찬양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입식 암기교육-표절-대사기꾼의 탄생’----. 이 ‘저주의 덫’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학적 공식과도 같다. 아아, 어쩌다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엄청난 유학비를 쏟아붓고도 ‘영원한 바보’가 되어 돌아왔단 말인가? 아아, 어쩌다가 자기 자신이 영원한 바보(영원한 낙제생)라는 사실을 은폐한 채, 또다시 ‘영원한 바보’들만을 양산해내는 민족의 반역자가 되었단 말인가? 독서와도 무관하고, 철학공부와도 무관한 ‘주입식 암기교육’을 받으면, 그 민족은 가장 확실하게 못쓰게 되고, 영원한 이민족의 노예가 된다.
우리 한국인들은 외면적으로는 ‘백수의 왕’인 사자의 기상을 타고 났지만, ‘주입식 암기교육-표절-대사기꾼의 탄생’이라는 ‘저주의 덫’에 걸린 사자의 새끼들에 지나지 않는다.
표절대통령, 표절국회의장, 표절대법원장, 표절대학총장, 표절교육부장관, 표절국민작가!!
내 머리, 오 이 구름같은 불
내 머리 내 이 머리에 온통 뒤덮인
이 저주받은 이 성난 갈기, 핥
야 이 개애자식들아아아
낮달맞이꽃
오 현 정
해 뜨자마자 오세요
당신 오시라고
햇살 걸음 눕히고 노란 꽃등 켜놓았어요
어서 오세요 서방님
나는 날마다 허리가 하늘거리는 새색시
골짜기엔 계곡 물소리
흠뻑, 산 이슬에 젖을 거예요
길을 잊으셨나요?
해지기 전에 오세요
저녁까지 기다리다 조막손이 되겠어요
“그대가 부른다면 수천의 승리를 버리고라도 가야지”라고 했던 어느 영웅호걸의 말도 있고, “여자의 진심은 당신에게 바쳐진 거예요. 우리 집 바보는 내 몸을 새치기했어요”라는 어느 요부妖婦와도 같은 공주의 말도 있다. 사랑은 삶의 본능이자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이고, 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랑은 둘이서 하나가 되는 행위이며, 최초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어머니가 되는 행위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은 천지창조의 힘이며, 이 사랑의 힘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인류의 역사는 더욱더 젊고 푸르러진다.
사랑의 힘에 비하면 수천의 승리도 새발의 피와도 같고, 사랑의 힘에 비하면 불륜의 두려움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은 대범하고 간이 크고,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을 연출해낸다. 어둠을 밤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사랑이고, 밝음을 대낮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사랑이다. 온갖 짐승과 온갖 나무와 온갖 풀들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도 사랑이고,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수치심을 모르고, 사랑은 선과 악을 모른다.
사랑은 천지창조행위이고, 영생불사이며, 사랑은 영원한 주연배우이고, 사랑은 영원한 노래이다. 사랑은 붉디 붉은 피이고, 생명이며, 아마도 이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생명체도 이 세상을 살아갈 목표와 그 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낮달맞이꽃은 달맞이꽃과는 다르게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을 말한다. 대낮은 은밀한 정사情事가 이루어지는 시간대이고, 노란 달맞이꽃의 향기는 자기 짝을 부르는 소리가 된다. “해 뜨자마자 오세요/ 당신 오시라고/ 햇살 걸음 눕히고 노란 꽃등 켜놓았어요”라는 시구는 수천의 승리를 버리고서라도 ‘어서 오라’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날이면 날마다 보고 싶고, 날이면 날마다 서로가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싶은 서방님, 그 어두운 밤을 하얗게 뜬 눈으로 지새우며 노란 꽃등을 켜놓은 새색시----, 이 새색시의 기다림이 한국 연애시의 진수인 [낮달맞이꽃]으로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은 천지창조주가 되고, 시인은 사랑의 창조주가 된다. 만일, 시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랑이 천지창조주가 될 수가 있었겠으며, 또한, 시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처럼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의 드라마를 연출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시인은 예술가의 중의 최고의 예술가이다. 시인은 거짓말쟁이 중의 최고의 거짓말쟁이다. 시인의 거짓말은 진실보다도 더 진실한 거짓말이며, 이 거짓말의 진수는 그 어떤 꿀맛보다도 더 달콤하고, 그 중독성이 강하다. “어서 오세요 서방님”이라고 부를 때, 최전선의 영웅의 심장이 뛰고, “나는 날마다 허리가 하늘거리는 새색시/ 골짜기엔 계곡 물소리/ 흠뻑, 산 이슬에 젖을 거예요”라고 속삭일 때, 남성적인 힘이 저절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로 발기를 하게 된다. 사랑의 힘은 천둥과 번개를 번쩍거리게 하고, 사랑의 힘은 한 여름의 소낙비처럼 우리들의 삼각주三角洲를 비옥한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낮달맞이꽃]의 시적 화자는 어느 열녀烈女처럼 “길을 잊으셨나요?/ 해지기 전에 오세요/ 저녁까지 기다리다 조막손이 되겠어요”라고, 그만 망부석처럼 울부짖게 된다. “햇살 걸음 눕히고 노란 꽃등” 켜놓은 새색시, “어서 오세요 서방님” 하고 날이면 날마다 “하늘거리는 새색시”, 산골짜기 계곡 물소리에도 흠뻑 사타구니가 젖은 새색시, 재색미모에다가 간드러진 교태와 우아한 말솜씨까지 지닌 새색시----. 오현정 시인의 [낮달맞이꽃]은 더없이 요염하고 애틋하다. “해 뜨자마자 오세요// 당신 오시라고/ 햇살 걸음 눕히고 노란 꽃등”을 켜놓은 요부같은 새색시, 그러나 끝끝내 사랑하는 서방님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조막손을 지닌 망부석이 다 되어가는 새색시----. 아아, 얼마나 그립고 기다림에 지쳤으면 사지멀쩡한 손가락이 다 닳어 없어질 것 같다는 말인가!
요부, 팜므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여인, 하지만, 그러나 어느 정숙한 열녀가 요부가 아닐 수가 있겠으며, 어느 요부가 정숙한 열녀가 아닐 수가 있겠는가? 사랑은 천변만화하는 요술쟁이이며, 그 어느 얼굴도 그의 진짜 얼굴이 아니다. 사랑은 인종차별도, 종교차별도 없고, 사랑은 도덕도, 국경도 모른다. 사랑은 천지창조행위이며, 사랑은 선악을 떠나 있다. 사랑은 환영이고, 마약이며, 그 어떤 마약보다도 더 중독성이 강하다.
사랑은 천지를 창조하고, 시인은 사랑을 창조한다.
오현정 시인의 [낮달맞이꽃]의 사랑은 ‘조막손의 사랑’이며, 한국문학사의 최고급의 연애시라고 할 수가 있다.
느리게 느리게
이순희
완행열차를 타고 물 흐르듯 흘러가네
이 역 저 역 다 쉬고 멈추는 비둘기호 타고
구석구석 구경하는 이 맛
맨드라미가 붉게 핀 화단과
봉숭아가 곱게 핀 간이역,
모두 눈에 담으며
쉬고 멈추며 둘러가는
이 삶의 맛
----이순희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에서
문화선진국의 대학교수는 매학기 마다 새로운 논문으로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공부를 한다. 문화선진국의 명문대학교 학생들은 지도교수의 강의를 1주일에 한 번 듣고 두 명의 조교 밑에서 상호토론과 상호비판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밥 먹고 잠 자는 시간만 빼놓고 공부를 한다.
문화선진국의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참으로 느리고 느리게 살지만, 그 어떤 빠름보다도 더 빠르게 산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느리게 느리게’ 완행열차를 타고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것과도 같다.“이 역 저 역 다 쉬고 멈추는 비둘기호”처럼, “맨드라미가 붉게 핀 화단과/ 봉숭아가 곱게 핀 간이역/ 모두 눈에 담으며// 쉬고 멈추며 둘러가는/ 이 삶의 맛”이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소크라테스 역, 플라톤 역, 아리스토텔레스 역, 스피노자 역, 라이프니츠 역, 칸트 역, 마르크스 역, 헤겔 역, 니체 역, 쇼펜하우어 역, 하이데거 역, 프로이트 역, 베토벤 역, 모차르트 역, 반 고호 역, 폴 고갱 역, 알렉산더 역, 나폴레옹 역, 호머 역, 단테 역, 괴테 역, 보들레르 역, 랭보 역, 톨스토이 역----,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한다는 것은 오직 책상이라는 완행열차에 앉아서 이 모든 역들을 다 거쳐가며,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의 진수를 맛보는 것과도 같다.
언제, 어느 때나 사상과 이론의 최전선에 서서, 전체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연출해내는 사람들은 이와도 같은‘느림의 미학의 대가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벨문학상, 노벨경제학상,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의학상, 노벨평화상이라는 월계관과 함께 전인류의 찬양과 존경이 이‘느림의 미학의 대가들’에게 바쳐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순희 시인의 [느리게 느리게]를 읽으며, 우리 한국인들을‘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고급문화인’으로 인도하겠다는 나의 꿈을 생각해본다.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입}에서
학문이란 무엇이고, 대학이란 무엇인가? 학문이란 지혜를 뜻하며,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 지혜를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혜’는 이 세상의 ‘기축통화’와도 같다. 지혜를 가진 자가 황금왕관을 쓰고, 지혜를 가진 자가 전 인류의 스승이 되고, 지혜를 가진 자가 최고의 부자가 된다. 이 세계는 지혜를 가진 자가 지배하는 세계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전인류의 스승인 플라톤 에게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이란 최고급의 지혜를 지닌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서 지혜를 가르치고 그것을 배우는 고등교육기관이며, 어느 국가의 흥망성쇠는 이 대학의 학문연구의 성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사물에 대한 이해를 뜻하는 개념, 어떤 사건과 현상들을 설명해주는 이론, 그리고 이 개념들과 이론들을 종합하여, 그것이 공산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낙천주의이든지간에, 우리 인간들의 지상낙원을 지시해주는 사상----. 모든 학문의 목표는 이러한 개념들과 이론들과 수많은 사상들을 창출해내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대학들은 이 최초의 진리를 창출해내기 위하여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벌여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잘 알려져 있고 그 이름이 있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고, 오직, 새로운 것, 즉,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만이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의 시세계는 떠남이 돌아옴이 되고, 돌아옴이 다시 떠남이 된다.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가 활개를 치던 군부독재시절, 즉, 1980년대에는 대학사회라고해서 이 닫힌 구조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고, 악이 선이 되고, 허위가 진리가 된다. 어떻게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고,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된 대학사회가 대학사회일 수가 있었겠으며, 또한 어떻게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던 대학사회가 대학사회일 수가 있었겠는가? 왜,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고, 왜, 학문과 진리탐구의 상징인 대학교에서 그처럼 총성이 울렸던 것일까? 왜, 전인류의 스승인 플라톤을 공부하는 시인은 외톨이가 되었고, 왜, 그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할 스승은 말이 없었던 것일까?
나는 기형도 시인의 [대학 시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무너졌고, 그의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시세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눈물을 흘렸고, 너무나도 처절하고 비극적인 그의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었었다. 시의 영역에서는 뮤즈의 은총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역에서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플라톤은 너와 내가 모두가 다같이 잘 살고, 모두가 다같이 행복하게 살기를 꿈 꾸었던 이상주의자이며, 따라서 기형도 시인의 절망은 이상주의자로서의 절망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책을 말하며, 우리는 이 고전들을 수없이 되풀이 읽고 이 고전들의 힘으로 새로운 사상과 이론들을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기형도 시인은 고전들을 읽고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 책들을 모두 버렸다. 기형도 시인이 플라톤적인 이상국가를 꿈꿀 때, 다른 친구들은 데모를 하거나 군대로 끌려갔고, 또 게다가 기형도 시인과 함께 플라톤을 읽거나 시를 써야 할 후배는 중앙정보부의 기관요원이 되었다. 이 완벽한 허위와 이 완벽한 범죄 속에서, 하지만, 그러나 명문대학교의 스승은 도통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안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것이고, 실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걸었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의 ‘존경하는 교수’는 판단력의 어릿광대이며, 그 ‘존경’이라는 명예를 더없이 추락시킨 체제순응자에 지나지 않았다.
기형도 시인의 [대학 시절]은 암흑의 시절이며, 절망의 시절이고, 이상주의자로서의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아, 외톨이, 외톨이----. 오죽 했으면 이 ‘외톨이’가 학문연구와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부정부패와 권모술수와 수많은 절망들만을 양산해내는 대학을 그 은신처로 삼고 싶어했던 것일까? 아아, 대학의 악은 그래도 사소하고, 적어도 그의 부모님에게 등을 기댈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학문연구와 진리탐구----.
우리 한국인들은 영원한 미성년이자 불량청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아아,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이것이 기형도 시인의 최후의 단말마의 비명이자 그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플라톤을 사랑했고, 플라톤에 대한 글을 적지 않게 썼다. 남보다 더 가난했고, 남보다 더 고통스러워했고,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왔다는 것----, 이것은 나의 치욕(영광)이지, 그 누구의 치욕(영광)이 아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