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66편 1-12절
설교제목 : 노래할 이유
상처를 딛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흰이슬이 내린다는 백로를 지나면서 완연한 가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고유의 명절 한가위를 보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한가위만 같아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추석이 지닌 풍요로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태풍 힌남로로 인하여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벌어진 참사는 풍요로운 기대와 만남을 일순간에 빼앗아버렸습니다. 한 중년의 부부는 아파트 옆 냉천이 범람하면서 지하 주차장에 물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이동주차를 시키려는데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물에 휩쓸려 심정지상태로 발견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차가 주차장 출구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꼼짝없이 주차장에 갇혀버렸고, 물어난 물에 속수무책을 당해버린 것입니다. 아픈 엄마가 걱정돼 함께 지하 주차장에 갔다가 홀로 빠져나오지 15살 김모군도 있었습니다. 같이 있던 어머니는 의식이 있는 상태로 구조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인간의 생사가 인력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속절없이, 영문도 없이 생이별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풀 수 없는 숙제인 듯 합니다.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는 어떤 위로도 사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시금 삶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초등학교가 다시 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여전히 갈등과 고통 속에 있지만, 다시금 폐허 속에서도 상처를 딛고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길 소망해봅니다.
현재 진행형
오늘 시편 66편의 표제는 “시,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성전 찬양대를 따라서 함께 주님을 향하여 진정한 찬양을 드리는 시편입니다. 1절은 찬양하는 자의 감정과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온 땅아, 하나님께 환호하여라.” 환호한다는 표현은 기쁨과 감격으로 온 마음을 담아 외치는 상태입니다. 언제 이런 감정의 상태에서 찬양할 수 있을까요? 어떤 놀라운 일을 경험하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터져나올 때입니다. 3절에 보면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주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은 우리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때 절로 탄성이 일어납니다. 스위스에 수차례 갔지만 빙하가 있는 인터라켄 쪽으로 가본 적은 없었습니다. 가족들과 분석가 과정을 마무리하고 쉴트호른의 정상에 바라본 만년설의 빙하는 그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풍경이었습니다.
또한 도저히 내 능력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이런 환호성을 지르며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셨으므로,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 구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놀라운 사건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5절에서 “오너라. 와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아라”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사건은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지속되고 있는 구원사건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하여, 무엇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내일의 삶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코로나와 전쟁, 기후 위기로 인하여 현재 원달러환율의 급상승,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고물가와 경제적 불확실성이 더욱 가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전을 보증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육지로 만드시고,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소환해내며 찬양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시하며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이 펼치실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찬양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편지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이런 확신 속에서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잃지 않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와서, ... 보아라”는 시인의 초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과 역사에 현재 진행형으로 일하고 계심을 굳게 붙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보살피심
시인은 다시 한번 백성들을 향햐여 외치며 노래합니다. “백성아, 우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크게 울려퍼지게 하여라.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살펴주신다.”(8-9)
우리 인생 길에서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듯 보입니다. 현실의 무거움에 낙담하고 한숨쉬기 일쑤입니다. 시대의 우울과 어둠이 우리에게 이런 무거움을 더욱 자아내는 듯합니다. 출근길 퇴근길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영혼을 빼앗긴 좀비와도 같습니다. 혼을 빼앗긴 자들처럼 무표정하거나 휴대폰에 몰두하며 자신의 영혼을 저당잡혀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진심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수많은 경쟁에서 도태되고, 인정받지 못하고, 자아 팽창에 사로잡힌 이들은 원망과 불만, 적대감이 꽉 차 있어서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 직전의 위태한 모습도 있습니다. 오늘날 소비사회는 더 나은 인간 존재로서 옛 성현들처럼 군자가 되거나, 참 그리스도인으로 내적 인간의 성숙보다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자가 되라고 부추깁니다. 저는 가끔씩 저의 아이들을 포함해서 학생들을 만나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고 싶고 사야할 것이 너무 많기 때입니다. 한편으로 외적 가치에 대한 필요성에 눈을 돌렸기 때문에 긍정적이나 지나치게 내적으로 부실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물질이 신이 된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기는 너무나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근본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살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심을 노래합니다. 인생의 힘들고 아프고 고단해도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 있음을 신뢰하는 자는 마음의 미소를 잃지 않고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주신다는 확신 속에 있는 자는 든든하게 인생을 걸어갈 것입니다.
10여일 전에 꿈에서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유턴을 해야했고, 유턴을 하는 과정에서 차가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부딪히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난 길을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객관단계에서 저의 딸에 대한 내용도 되고, 주관단계에서 아직 어린 영혼이 운전이 미숙한 가운데 유턴하는 과정에서의 위험한 상황을 일러주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이런 꿈은 더욱 더 조심스럽게 삶을 걸어가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저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인생을 보살피고 계시고, 관심갖고 계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찬양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름의 의미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경험적으로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우리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니, 우리가 불 속으로, 우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10-12)
하나님은 마냥 좋으신 분은 아닙니다. 시험하시어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연단을 주시는 분입니다. 때로 함정에 빠지게도 하시고, 우리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지우셔서 그 무게를 짊어지고 숨가쁘게 힘겹게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때로 우리를 무시받게도 하십니다. 시인은 지금 현재 직면한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삶의 무게가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의미를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신경증조차도 의미를 알지 못한 고통이라는 융의 말은 진실에 가깝습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고통의 한복판에서는, 짓누르는 짐을 어깨에 메고 가는 순간에는 그 의미를 통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고, 삶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어 살아내면 어느새 그것은 의미로 다가와 새로운 삶을 가능케하는 문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저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는 일과는 이별을 고했습니다. 모든 신학서적 종교서적은 몇 박스를 버려버렸습니다. 그런데 25년을 훨씬 지나고 나니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그리스어가 융의 저작을 번역하여 음역하는데 크게 쓰임받을 수 있었고, 융의 저작의 신학적 사상을 융심리학적으로 이해한 내용을 충분히 감득할 수 있었던 것은 쓸데 없다 생각한 신학공부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6년 전에 20여년의 전도사와 부담임목회에서 작은 교회 개척을 하고 잡다한 행정적인 일을 손을 떼었던 그 일이 지금 외부적인 사무총장의 행정업무를 너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별볼일 없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은 나의 존재에 가장 유용한 것으로 활용된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불과 물을 통과하는 시련과 삶의 무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보다 강한 자아의 든든함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라 감히 말할 수 있고 싶습니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 시인의 고백처럼 그러나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외적 풍족함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풍족한 곳으로 이끄셔서 삶의 여유와 넉넉함을 지니고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단한 시간은 의미로 채워지고 있는 때임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힘겨운 시간을 넘어서 하나님은 마음의 풍족한 곳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심을 굳게 신뢰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