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들어 부산에서는 브라질영화제에 이어 스웨덴영화제가 열렸다. 열하루 동안의 일정으로 진행된 영화제에서 나는 여덟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닷새째 날과 마지막 날에는 하루 두 편씩의 영화를 보았다. 스웨덴영화제 닷새째 날 1시 영화가 끝나고 5시 상영시간 사이에 두 시간의 틈이 생겼을 때 나는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나루공원을 엘사와 함께 충분히 거닐었다. 집 근처에는 크고 작은 근린공원이 여러 곳 있고 바다 쪽으로 나가면 광안리 테마공원과 민락동 바닷가의 수변공원, 그리고 백산 동쪽기슭을 돌면 수영강변에 또 하나의 공원, 나루공원이 깊어가는 가을빛을 머금고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광안리 해수욕장 동쪽끄트머리의 수변공원은 2002년 광안대교 개통과 함께 민락동 바닷가에 나루공원은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를 계기로 센텀시티에 자리 잡은 공원이다.
나루공원에도 가을이 절정에 달했다. 강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을 떨구고 산책로 길섶 따라 쌓인 낙엽이 발길에 흩날렸다. 나루공원은 꽃피는 봄이 좋다지만 만추를 노래하는 지금이 더 좋은 것 같다. 붉게 타는 노을이 내려앉은 수영강 하구에는 윤슬을 보려는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높이 뛰어 오르고 둥지로 돌아가려는 아기오리 떼가 종종걸음을 쳤다. 나루공원은 강변도로에서 광안대교로 진입하는 지하차도 위 링브릿지인 좌수영교로부터 수영교에 이르는 곳이다. 좌수영교를 경계로 재송동쪽으로는 생태습지와 꽃내음길, 바람의 언덕과 맑은 소리 습지가 자연의 모습을 복원시켜 놓았고 하구 쪽으로는 수영강변에 3만여 평의 APEC나루공원이 조성되었다. 나루공원은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센텀시티와 신작로를 사이에 두었다.
공원에 들어서자 붐비고 소란한 도심과는 달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강변 따라 보행로와 자전거길이 깔리고 널찍한 잔디밭에 꽃나무와 설치미술작품들이 어우러져 생명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사이로 낙엽 쌓인 산책로가 이어지고 벤치에는 삶의 여유를 구가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한가로웠다. 높은 전망대 사다리를 세운 천성영의 작품, <바람이 그대 곁에 있다>에는 올라앉은 사람이 유유히 흐르는 수영강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영강은 양산 원효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법기, 회동 저수지를 이루고 금정산에서 발원한 지류 온천천과 합류하여 수영구와 해운대구의 경계를 이루며 수영만에서 바다와 만난다. 길이 30km 하구폭 50~70m을 가진 수영강변에 조성된 나루공원에는 2006년과 2008년 부산비엔날레에 출품한 17개국 40개 설치미술작품이 옮겨져 야외갤러리를 이루었다.
나루공원은 한 가닥 신작로로 센텀시티로부터 차단된 외딴섬이다. 센텀시티에서 나루공원으로 오가는 길은 횡단보도 한두 곳뿐이다. 접근성을 생각하지 않은 도시계획을 이토록 방치하는지 안타깝다. 그러나 외로운 나루공원은 찾는 이들에게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다가 이제야 오느냐고 추궁하지 않는다. 그 나루공원을 거닐며 문득 떠오른 생각은 방송기자생활을 하던 젊은 날 옛 수영비행장을 통해 서울정보기관으로 연행되던 악몽의 기억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수영강을 살리자>는 캠페인 프로그램 취재에 매달렸던 일, 윈드서핑을 배울 때 바람 부는 날이면 해운대로 달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야간대학원에 다닐 때는 번영로와 강변도로에서 춤추는 가로등불빛에 사무쳤던 아련한 추억이 새삼 회상의 파도를 탔다.
다음 영화 상영시간을 맞추려고 서둘러 나루공원을 빠져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은 몇 번이고 뒤돌아보게 했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다시 찾기로 마음먹었다. 나루공원은 어두운 밤이면 변신을 꿈꾼다. 건너편 수영성당이나 엘올리브 레스토랑에서 센텀시티쪽을 바라보라. 빌딩의 불빛이 수영강물에 긴 불그림자를 드리운 채 출렁이고 무더운 여름날이면 밤하늘을 솟구치는 분수의 물보라가 이를 데 없이 싱그럽다. 그 뒤로 센텀시티를 한걸음 물러선 장산의 실류엩이 거칠산국의 전설을 속삭이는 듯 들려준다. 나루공원의 밤은 그렇게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영혼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젊은 날의 회상과 함께 영화제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아름다운 스톡홀름의 전경을 배경으로 다섯 개의 기발한 스토리가 교차하는 <스톡홀름 스토리>와 영화 전편에 바이킹의 향수를 품은 분위기와 주옥같은 스웨덴 대중음악을 풀어놓은 청춘음악영화 <돈 크라이 포 미 예테보리>를 보았다. 하루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보는 것은 즐겁고 힘든 일이었다. 이번 스웨덴영화제에서는 스웨덴이 낳은 전설적인 여배우 잉글리드 버그만의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치러지는 각종 행사와 더불어 신세대 감독들의 뉴웨이브 감각이 넘치는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새로운 인생(New Life)>의 인문정신에 젖을 수 있었다.
첫댓글 영화제 이야기를 읽으며 부산의 아름다운 나루공원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부산 살면서도 안가보았네요^^상상하면서 한번 가봐야 겠네요.^^
저도 부산에 살면서 한번도 안가보았네요...언제 한번 가보아야겠습니다...^^*
두 분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들이 얼마남지 않은 2015년을 화려?하게 장식하신 것 같아요.
부산이 많이도 변화되어 저로서는 예전의 부산이 그리워지네요...감사합니다.^^*
나루공원에 한 번 가보러 갔다가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어느날 문득 부산에 사는 사람들은 문화의 혜택을 참 많이 누린다고 생각을 했지요.
물론 영화제가 열리던때요. 영화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좋을것 같아요.
아름답게 표현된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부산의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