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에 얽힌 이야기
강신홍
의식이 어슴푸레 들면서 사방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마을 보건소란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 일어서다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누군가 부축해주었다. 인천에 사는 처남이었다. 집안 일로 막 내려온 참이었다. 내가 퇴원했을 때 처남이 고백을 했다. 이때 나의 상태보다 막내 여동생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앞섰노라고. 몇 년 전 처남의 누이 남편(매부)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정신이 든 것을 보고 보건소 소장은 집에 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외상은 없고 다만 안경이 깨지고 가방 속 도시락 통이 찌그러진 상태였기에 가볍게 판단을 했다. 아내와 처남이 수원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싶다고 간청을 해 빈센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빈센트 병원은 정밀검사를 위해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보냈다. 뇌출혈이었다. 다행히 출혈이 멈추어 응급조치하고 다시 빈센트 병원으로 보내져 한 달 간 약물 치료를 받았다. 보건소 소장의 책임 없는 말만 믿고 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할 때 마다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내와 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직장이 있는 서울에서 6개월 정도 신혼 생활을 하다가 친정 동네인 병점으로 내려왔다. 임신 중인 아내가 낮잠만 자면 가위에 눌렸기 때문이다. 나는 기차나 시외버스로 서울과 병점을 출퇴근 했고, 교수의 꿈을 품고 대학원 공부를 위해 주간에서 2부 야간학교로 옮겼다. 사건이 있던 날도 여느 때처럼 대학원 수업 시간에 맞추어 아침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면에서 근무하는 방위병이 면허증도 없이 재미삼아 상사의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한산한 시골길을 신나게 달렸다.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기차역으로 가던 나의 뒤를 들이 받았다. 지나가는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사람 하나 죽었다고 말했다는데 버스를 세워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방위병은 나를 둘러메고 보건소로 왔다고 한다.
빈센트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동료와 제자들이 병문안을 와주었다. 교장도 내려와 나의 상태를 보고 “훌륭한 교사인데...”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아내가 들려주었다. 이 사건 이야기가 화제가 될 때마다 아내는 교장의 눈물이 재미있었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한다. 신임을 주던 교장에게 후에 나는 교무회의에서 그의 잘못을 언급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물론 이 후 한 동안 교장의 눈빛은 차가웠다.
퇴원을 한 내게 어느 날 방위병이 찾아왔다. 자신의 취직자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어렵다고하는 그의 가정 형편을 생각해 교통사고를 그의 과실로 처리하지 않고 내 실수로 부상당한 것처럼 보험 처리하는 등 어떤 재정적 부담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아내도 밉상스러웠는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간 뒤에, 최근에 안녕리 한 노인은 큰 부상도 아닌 교통사고로 위자료를 받아 땅을 샀다는데 자기는 뭐냐고 나에게 웃음을 띠우며 핀잔을 주었다.
첫댓글 큰 일 날 뻔했네요.
선생님의 따뜻한 인품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