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 백련사(紺岳山白蓮寺) / 전통사찰
- 충북제천시 봉양읍 명암리
백련사는 몇 해 전에 들린 적이 있다.
어느 해 5월 초에 감악산 산행을 왔다가 '입산통제기간'이라 발을 돌린 적이 있다.
발을 돌려서 나오는데 이정표가 보였다. 절에는 갔지만 산 정상까지 갈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그때 백련사에 대한 느낌이 좋았다. 그때는 전통사찰에 관심이 없었다.
의림지에서 아침 겸하여 친구와 컵라면을 먹고 11시에 헤어졌다.
감악산은 용두산과 이어져 있다. 마음은 언젠가는 이곳을 산행하고 싶지만 그 실천은 어려울 것 같다.
길에 나무가 누워있다.
여기까지 좁은 길을 올라왔다. 여기부터는 조금 더 넓고 아스팔트 포장한 길이다. 아쉽다.
주차하고 고민을 하였다. 그 사이에 두 대의 차가 돌아갔다.
"백운계곡이 좋다고 하던대. 백련사까지 2km 남았다고 나온다."
나이가 제법 드신 분들은 백련사를 포기하고 차를 돌려 내려 간다.
2km, 햇살은 따갑다. 여기까지 왔으니 걷자는 마음이 들었다. 몸은 조금 피곤함을 느끼고 있지만.
감악산 샘물, 오르는 길에 목을 축일 수 있다. 내려 올 때 이 샘물을 보지 못 했다.
감악산 정상에 저런 바위가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바위 위에 서 있다.
백련사 연혁.
662년(문무왕 2)에 의상(義湘)대사가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작은 암자를 짓고 백련암(白蓮庵)이라 하였다.
692년(효소왕 1)에 큰 비로 산사태가 나서 백련지와 암자가 파묻혔다.
819년(헌덕왕 11)에 무착(無着)대사가 옛터를 찾아 중창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이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창건한 뒤 이 절을 중수하였다.
1587년(선조 20)에는 벽운(碧雲)이 중수, 1624년(인조 2)에 학린(學璘)이 중수하였다.
1798년(정조 22)에는 처봉(處峰)이 중수한 뒤 절 뒷산의 이름을 따서 감악사(紺岳寺)라 개칭하였다.
1910년 욱일(旭日)이 중수, 1916년 화재로 전소, 같은 해 10월에 주지 윤인선(尹仁善)이 현 위치로 옮겨 중창, 백련사라 개칭.
1950년 6·25전쟁으로 절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그 뒤 1959년과 1962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조)
백련사 안내판 내용과 비슷하다.
무착이란 승려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나옹왕사는 유명한 승려이다.
무착대사가 치악산 상원사 건립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용마를 타고 매일 한 차례 왕복하였다.
어느 날 용마가 감악산을 오르다 미끄러졌다. 그때 생긴 말자국이 남아있다. 말이 마신 옹달샘인 용마수도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이곳을 피신 왔다는 전설도 있다.
백련사 안내판은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글을 쓰고 교정과 교열을 한 후에 만들었어야 한다.
내가 마신 감악산 샘물이 '용마수'란 샘물일까?
담월당대선사, 이분이 이 절의 중창에 원력이 크셨던 모양이다.
반달형 석탑 입구가 인상적이다.
삼성각, 사천왕문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있다.
선방 겸 사천왕문이다.
백련사에서 본 경치, 월악산이 있는 방향 같다.
극락전
백련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 충북 유형문화재 제217호
단양군 금수산 조계사 극락전 삼존불로 봉안하고 있다가 어떠한 까딝으로 주불이 이곳으로 왔다.
제천 강천사엔 협시 보살 1구를 봉안하고 있다. (강천사 편 참조)
감악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곧 돌아섰다.
경내에서 마주친 여신도가 승용차를 운전하여 내려 간다. 태워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경내에서 마추쳐도 눈인사조차 없었기에 마음이 열리지 않았을 테다.
내려 가는 길에 나무가 쓰러졌다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나무 밑으로 차가 지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늦여름 더위는 길에 누워있다.
승려가 탄 차가 쌩하고 지나간다. 다시 올라 온다. 또 내려 간다. 짐작이 가지만 나는 걷기에 바쁘다.
승려를 도왔던 산꾼 두 명과 승려는 난처한 기색이다.
전기톱이 나무 중간이 끼였다. 톱이 나무를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밑둥부터 자르는 게 아니다. 위 가지부터 차근차근 잘라야했다. 119에 신고한 모양이다.
내가 도울 일은 없다. 산꾼도 제 갈 길을 간다.
금수산 무암사(錦繡山霧巖寺) / 전통사찰
- 충북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산행 관련 밴드에 제천 작은동산과 동산 산행기가 자주 올라 온다.
높지는 않지만 바위가 만든 여러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언젠가는 나도 이곳을 산행하리라.
등로 입구에서 내렸다 승용차 서너 대 주차가 가능하겠다. 남근석~!
무암사 사적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다.
명문이 새겨진 기와로 봐선 1740년(영조 16)에 중수,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절 서남쪽 1㎞ 지점에는 늙은 중을 뜻하는 노장암(老丈巖)이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절 입구에 중 모양의 바위가 있으면 그 절의 사맥(寺脈)이 끊기지 않을 뿐 아니라 식량이 넉넉하다고 한다.
노장암은 안개가 끼었을 때만 나타났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안개와 바위를 엮어 무암사라 하였다고 한다.
(란국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내용을 가지고 옴)
절 주위로 보이는 경치가 장관이다. 무엇이라 표현할 길이 없다.
한참을 머물었다. 보고 또 보고, 극락보전에 앉아서 잠시 졸기도 하였다.
자연석이 만든 공간에 치성 드리는 곳을 마련하였다.
떨어질 듯한 바위가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그 위 바위엔 얼굴 형태가 있다.
얼굴 형태, 자연이 만든 신비이다. 종교적 어떠한 신비로운 힘이 만든 게 아니다.
이 전각이 대문이다.
노장암이란 바위는 안개 낄 때만 보이겠다. 안개가 나무를 가려 주니까 바위만 보이는 것이다. 재미있다.
갈라진 바위는 모양이 투구 모습이라 장군바위이고 남근석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 끝부분만 보인다.
소바위는 소 두 마리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장군바위
극락보전
소바위
소나무로 쌓인 절이다. 소나무는 황룡이 하늘로 올라 가는 느낌을 준다. 안개 낄 때 오면 또 다른 경치를 즐길 수 있겠다.
절 아래 경치는 한정이다. 절 주위와 산정의 경치가 가관이다.
사진 가운데 있는 곳에 노장암이 있는 것 같다. 그 뒤에 남근석이 있고.
무암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霧岩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 / 충북 유형문화재 제214호
높이는 85㎝이며 복장은 유실, 비교적 규모가 큰 목불로 통나무로 조각하였고, 두 손은 따로 만들어 끼운 형태이다.
전체 층단을 이루고 대칭 구성이며 추상적인 선미감이 두드러진다.
특히 다리 앞쪽의 대칭인 물결 문양의 옷주름선은 매우 추상화되었다.
이러한 추상화 경향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행한 특징이다.
이 불상은 극락보전이 건립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740년(영조 16))
삼성각
현경당 부도, 주차한 곳에 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절이다.
하루종일 머물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하니 이곳 주위에 부도가 여러 기 있다. 소부도골이란 곳에.
방문하기 전에 몰랐으니 이 절을 제대로 본 게 아니다. 9월 24일 영월에서 동문회가 있으니 이때 다시 와야겠다.
차는 정방사로 향한다.
2022년 8월 21일(일)
백련사...무암사....정방사....단양 읍내(저녁 식사)...죽령/차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