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첩│김태호
지치지 말고 꾸준히 걷기를!
▶ 초고가 완성된 후 탈고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시나요? 어떤 관점에서 작품을 점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한편의 글이 완성되기까지 다른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합평을 통해서 작품을 단단하게 만들었죠. 『제후의 선택』(문학동네, 2016)에 나온 단편들은 대부분 초고가 완성되고 합평모임에서 여기저기 아프게 차였던 작품들입니다. 초고들은 지금 다시 봐도 엉뚱하고 당황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초고를 완성할 때만큼은 혼자 감동에 젖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신이시여, 제가 이런 작품을…….’ 원고를 들고 손을 덜덜 떨곤 했습니다. 그 대단한 작품을 들고 합평모임에 당당히 나갑니다. 그럼 여지없이 많은 분에게 휴지조각이 되도록 용서 없는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제 나름에 장점이 있다면 그런 합평을 듣는 동안 상처가 되는 말들은 흘려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의견 중에는 정말 도움이 되는 말이 꼭 있더라고요. 톱니바퀴가 딱 맞는 부분을 찾아내듯이 초고를 더 단단한 완성작으로 만들어 주는 아이디어를 얻어내었습니다. 오가는 많은 말 중에 필요한 걸 정확히 잡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 아이디어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다 보면 뭔가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수정을 거친 작품은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개인에 따라 다 다르지만, 저는 합평모임을 완성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제 글을 읽히는 것은 정말 부끄럽지만, 그만큼 작품을 새롭게 보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른 사람의 눈에 자기의 글을 맞추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뚜렷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품을 더 빛낼 방법을 합평을 통해 잡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구 흘러넘치는 아이디어를 적당한 선에서 막아줄 둑을 쌓는 일이 필요합니다. 절제의 둑이 있으면 마지막 탈고는 혼자 힘으로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습니다.
일단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그 뒤론 열심히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잘 안 읽히거나 어색한 말을 찾아냅니다. 개인적으론 그 과정을 좋아합니다. 필요 없는 단어 하나를 찾아내어 지워낼 때마다 짜릿한 느낌마저 듭니다.
글도 너무 오래 괴롭히면 지칩니다. 다 완성된 글은 한참 폴더 안에 재워두고 가끔 꺼내서 읽어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생각이나 어색한 것들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조금씩 다듬어 가며 한 편을 완성해 갑니다.
김태호
1972년 대천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림책 『아빠 놀이터』를 쓰고 그렸으며 『삐딱이를 찾아라』를 썼고, 동화집 『네모 돼지』, 『제후의 선택』을 썼다.
창작 수첩│유은실
글이 풀리지 않을 땐 바닥에 누워 구릅니다.
▶『드림 하우스』, 『마지막 이벤트』 등 작품마다 진지하고 묵직하면서도 유머와 해학이 넘칩니다. 유머를 활용하는 선생님만의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혹은 유머를 다룰 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몸이 불편한 채로 사셨어요. 제가 ‘아버지’라는 걸 인식할 땐 겨우 지팡이를 짚고 걸었고, 제가 7살 되던 해부턴 완전히 걷지 못하게 되셨죠. 아픈 아버지가 눕거나 앉아있던, 빛이 잘 들지 않던 좁은 안방을 문득문득 떠올려요. 그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웃던 생각, 방바닥을 구르며 웃던 생각이 나요. 아버지 유머 덕분이었죠. 무거운 상황을 유머로 넘기는 건 아버지가 가진 힘이었고, 저도 그런 방식을 어느 정도 배운 것 같습니다.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유머를 사용하는 걸 많이 어려워하진 않는 것 같아요.
작가 지망생 시절, 저에게 글쓰기를 배우던 어린이가 제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해주기도 했어요.
“글 써서 응모하는 거 그만하고, 코미디언 시험을 보세요. 선생님은 글보다 말이 더 웃겨요.”
대충 이렇게 말한 것 같아요.
“싫어. 혹시 붙어도 얼굴 크다고 놀림 받는 코미디언으로 살게 될 거야.”
저는 대충 이렇게 대답한 것 같고요. 언제부턴가 <개그 콘서트>가 불편해졌어요. 보지 않아요. 외모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놀리는 게 싫어요. 그리고 걱정이 돼요. 그걸 보는 아이들이, 그렇게 놀려대는 걸 유머라고 배울까 싶어서.
유머는 나와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다고 믿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과 거리를 두려고, 또 그 고통이 식구들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 않게 하려고 웃겼던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나서 읽은 모든 글 중에, 가장 빛나는 유머가 녹아든 건 권정생 선생님 유언장인 듯해요.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양철북, 2015)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인간이 익살을 터뜨릴 때 가장 슬퍼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공통적인 표현 방법인 것 같습니다. -1983년 권정생
글을 구상할 때, 어린 독자와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상상을 자주 해요. 물론, 쓰는 동안에도 수없이 모니터 건너편에 가상의 어린 독자를 소환하지요.
‘아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 이 어린 독자를 너무 아프게 하는 거 아닐까?’
‘듣기 괴롭다고 도망쳐버리면 어떡하지?’
‘씁쓸한 내용을 당의정처럼 만들어 마음에 쏙 넣어줄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가상의 독자와 대면하지요. 저뿐 아니라 대다수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가 맞닥뜨리는 문제일 거라 짐작합니다.
덜 아프게 하려면 ‘거리 두기’가 필요하고, 도망치지 않고 씁쓸한 내용을 먹게 하려면 ‘재미’가 필요하겠지요. 판타지나 우화가 가상의 시공간으로 어린 독자를 데려가서 ‘거리 두기’를 하는 거라면, 유머는 리얼리즘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딱딱한 이야기와 독자 마음의 맨살 사이에 ‘유머’라는 완충제를 넣으면, ‘재미’와 ‘거리 두기’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고 봐요.
『마지막 이벤트』(바람의 아이들, 2010)는 상실과 애도의 문제를 다룬 건데, 그 초고를 쓰는 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아르바이트를 모두 그만두고 ‘대산창작기금’에 응모하려고 틀어박혀서 쓸 때였죠. 못 쓰겠더라고요. 마지막 장을 쓰지 못해 응모하지 못 할 뻔했지요. 제 경우를 보면, 큰 슬픔 앞에 놓여있으면 감정을 절제하며 ‘거리 두기’가 힘들어져요.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지점을 그리기도 어렵고요. 시간이 흘러야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드림 하우스』(문학과지성사, 2016)는 주거복지 문제를 다룬 건데, 우화 형식으로 유머러스하게 쓰려고 했어요. 2004년 데뷔했을 때보다 아이들의 삶이 더 심각해져서, 특히 세월호 이후에는 가상의 어린 독자를 소환하기만 해도 마음이 많이 아파서, 하는 수 없이 거리를 두는 온갖 방법을 다 불러냈죠. (......)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고통을 상상하면, 슬픔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고통 앞에서 한 줄기 유머도 들어갈 틈이 없는 것만 같아요. 그래도 세월호 약전『짧은, 그리고 영원한』(굿플러스북, 2016)을 작업하며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마주볼 때, 한 줄기 유머가 들어갈 틈을 내려고 애썼어요. 잠깐이라도 무례하지 않게 웃기고 싶었거든요. 한 번은 삭발한 머리가 좀 자라 짧은 커트 일 때, “어머니 두상이 예뻐요. 전위예술가 같아요.” 하고 마주 웃었어요. 나머지는 아이가 살아있을 때 능청맞게 굴던 순간을 떠올리며 웃었고요.
유은실
1974년 서울 생. 2004년 <창비어린이> 겨울호에 「내 이름은 백석」을 발표하며 등단.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외 11권의 창작집 출간.
첫댓글 많은 참고가 되는 글입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