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신대철 조순희 김정웅 현순애 이병국 이병일 이병연 박은주 사공경현
기수역 풍경
신대철
만조 때
수중보 넘어온 물길이
버드나무 군락지로 밀려온다.
혈거족 말똥게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눅눅한 둔덕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집게발을 내민다.
떠다니는 버들잎에 망둥어가 튀어 오른다.
습지 탐방 아이들 뒤편에서는
게들이 주르르 쏟아져 나온다.
길 건너 달맞이꽃 덤불 속으로 사라진다.
참게, 펄콩게, 말똥게, 털말똥게, 붉은발말똥게,
민가도 없는데 도둑게도 끼어 있다.
어린 왜가리가
뒤처진 말똥게를 물었다 놓는다.
서서히 발목까지 잠기는 기수역 습지
갈대밭에 가만히 서 있어도
물은 참지 않고 꿈틀거린다,
미래 어디서 쓸려온 생물인지 안다는 듯
더 이상 서 있지 말고 물소리라도 어루만지라는 듯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투명한 비명
조순희
평생 물밑 지형을 더듬고 다녔을 꽃게 몇 마리,
개수대에 만발하는 입맛을 부려 놓자
발끝에 울음을 매달고 사는 족속들 일제히 아우성친다
입에서 흰 비명을 꺼내는 녀석도 있다
낯선 침범을 경계하는 단단한 미각을 솔로 닦는다
개펄을 놓친 낭패감이 강할수록 거센 버팀들
다음을 손질하려는데 보라색 집게다리 하나 뚝,
딱딱한 습관을 체념하듯 내게 방금 내려놓은 자신을 던진다
옆길만 믿어온 종교는 앞뒤를 재는 일에 서툰 것일까
낯선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남은 한쪽마저 버리고 마는,
어떤 성질 사나운 바다는 전부를 포기하고 몸통만
추신처럼 남겨놓기도 한다, 순간 나의 뒤통수가 후끈하다
불편이 서툴러 숱한 만남을 걸어 잠그고
사고처럼 다가온 아픔을 이유 없이 떠나보냈던,
삶의 퇴적층에 멍울처럼 만져지는 내 집요한
최후 같은 다리 허공에 내어준 개수대 속 꽃게처럼
쉽게 포기해 버린 청색의 그들을 생각한다
들녘 어딘가에서, 숲속 어딘가에서, 바닷가 어딘가에서
지금도 귀가하지 못하는 나의 해묵은 조각들
저녁이 방문한 창가에서 철 지난 후회 하나 독백처럼 집어든다
몸통만 남은 채 최후를 두드리는 기척들을
측은스레 바라보는 봄날,
빛바랜 일기장에서 내 기억 밖으로 밀려났던 숨진 바다가
누군가를 흉내 내며 속울음을 손질하고 있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북극 항로
김정웅
깨뜨려야 해
가려는 마음조차도
배가 다닐 곳은 못돼
빙하는 단단한 벽
방위를 잃고 떠다니는 마음들이모인
얼음 기둥들로 가득한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
빠른 길 수에즈 운하를 두고
쇄빙선을 찾다가
결국엔
늦는데도
더 늦을 텐데도
바다를 깨뜨려
나아가야 하니까
배가 달려야 하니까
개척한다는 것은
결국은
누구에게는 등을 보여야 하는 일
등을 돌리는 일보다
등을 보는 일이 힘들었던 기억
번져 가는 뜨거운 상념이
빙하 속에 차갑게 갇히는 시간
나침반이 N극을 잃은 낯선 북극에서
S극만이 서성거리는 우리의 좌표는 해빙되고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철새 도래지, 화진포
현순애
살맛 잃어 야윈 발목
미시령 넘어 화진포로 서식지 옮기는 철새,
오늘은 고니쯤 되기로 하자
호수와 바다가 만나
간 맞추어 통정하는 화진호에는
연어, 숭어떼 서로 희롱하고
동해가 달려온 산줄기와 은밀히 내통하다가
바람도 물결도 잠이 들면
전설에 잠긴 마을 잠깐 보여준다는데
고운 모래사장 모래톱으로
부지런히 먼 이야기 퍼 나르는,
파도가 부려놓고 간 물기 스민 첩첩산중에 묻혀
한 사나흘 살아보자
일렁이는 물결에 서리서리 얽힌 세상살이
실마리도 풀어보고
생각 많은 머릿속은 솔바람에 헹궈도 보자
하늘과 바다가 절정이 되는
저 농밀한 세상에서
절묘하게 선경이 되는 화진포 해안가
모래 밟는 소리에 홀려
고니처럼 한 계절 살다 보면
살맛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함박
이병국
스테이크를 떠올린다면 하루가 고픈 일이지
눅진한 몸을 식혀 단단한 생활로 이끄는 함바 말고
겹겹이 쌓인 둥근 잎 안쪽 노란 망울 맺는 미나리아재비, 함박
폭신폭신하게 안겨 한잠 푹 잘 수 있으리라는, 함박
짙어 해맑게 주름 맺힌, 함박
수줍게, 함박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바가지로 함박을 떠
동글납작한 그릇에 담아 내어놓으면
아무래도 넘칠 수밖에
기울여 붙잡은, 함박
자주 비워둔다 해도 가파른 몸을 어쩌지 못해
다보록한 아침을 오래 바라보다
남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어내도 되겠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악기 도서관
이병일
해 지는 순간에 나가서 해 뜨는 순간에 돌아오는 무역선이 있었다. 어느 섣달 서양악기를 가득 싣고 북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얼어붙더니 바다와 눈보라는 엇갈린 빙하로 벽을 세웠다. 더 이상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선원들은 악기를 태워 불을 피우자고 했다. 하룻밤 사이 발가락과 손가락이 새까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차가운 불에 덴 것이다. 오므라들고 오그라드는 얼음구멍 속에서 바다표범이 얼굴을 비추는 밤, 오로라만이 땅거죽을 밀어 올리는 봄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소년은 낮에 본 어떤 악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꽁꽁 헝겊으로 감싸놓은 것을 풀어헤치고 침발롬*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신왕에게 바쳐질 악기였지만, 소년은 궁전에 가닿기 전에 얼어 죽을 순 없다고 가느다랗고 질긴 자작 나뭇가지로 선율을 켜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불의 깃털을 가진 음표들이 북극성에 가닿자 별자리가 흐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북두에서 튕겨나간 빛이 빙판에 금을 내자 일각고래 한 무리가 흰빛을 뱉어냈다.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듣지 못했던 음악이 목마른 것에 푸른빛을 내주었다. 흰빛과 붉은빛과 푸른빛이 뱃길 사이로 난 길을 보여주었다. 뼈와 관절 가진 것이 되살아나 한바탕 춤을 추었다. 진물과 피 냄새와 새까맣게 물든 상처가 신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새의 부리에서 나오는 휘파람소리가 신들이 주고받은 술잔이었지만 소년은 아직도 무척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소년은 해가 부지런히 구름떼를 몰아가라고 마지막 악장을 헤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의 흥과 운명은 뒷문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눈을 뜨자 소년은 해빙 같은 꿈에서 빠져나온 듯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침을 흘리고 있는 거야? 여기가 어디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악기 없는 난파선에서 책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빳빳하게 박힌 책의 표지들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날 소리의 뼈가 이곳에서 채굴되었다.
*헝가리의 민속악기.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사구 식물
이병연
바람에 날려 쌓인 모래 언덕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식물
뼈대를 세우고
몸집을 불리고 싶어도
살아남기 위해
거센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뉘면서
세상 사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몸을 낮추고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어깨를 부여잡고
뿌리를 간절하게 내리며
휘어져도 질기게 일어서며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모래 언덕에
집 짓고 아이 낳고
기를 쓰며
제 몸보다 몇 배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무리 지어 산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이면지를 끼우다
박은주
다시 집어 든 이력서가 무겁다
십 년 빈칸이 너무 넓어
한 줄을 채우기도 버겁다
매일 걷던 길인데 오늘은 유난히 낯설다
남편의 다리처럼 휘어진 도로
거리를 가로지르던 나무도 입을 다물고
낯선 구두에 보도블록이 움찔거린다
문 닫은 상점 유리에 나를 비춰본다
두꺼운 먹구름 아래 뿌옇게 바랜 블라우스
눈썹 끝에 매달린 이슬
누군가 내게 오는 빛을 다 써버려
남은 건 찢어진 바람뿐이다
날 뭐라고 소개할지 혓바닥을 달싹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린다
숨과 숨 사이 끼어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접어놓은 이름을 다시 펼친다
주름마다 채워진 수많은 낙서
그보다 많은 그림자
반쯤 지워진 얼굴을 넘기며
남은 빈칸을 채우기 위해
립스틱으로 웃음을 그리고
누군가 써준 자기소개서대로
가짜가 된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행복한 우체국장님
사공경현
구내에서는 분명 기관장으로서 방귀깨나 뀌는데 밖에 나가면 도무지 어깨에 힘이 빠진다 지역 내에서 이런저런 행사도 있고 기관장 회의도 더러 있건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것은 야생의 서열 매김이라는 의전에서 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좌석이나 순서는 언제나 맨 끝자리에 뭔가 구색용으로 전락한 마네킹 같다 유창한 언변이 있으나 발언 기회도 없을 뿐더러 가물에 콩 나듯 말할 기회가 주어져도 이미 딴전을 피는 참석자들로 인해 혼자만의 염불에 맥이 빠지기 일쑤다
회식 자리에서도 문간 쪽 귀퉁이에 앉아 있으려면 벌써 어슬어슬 한기가 돈다 면장님, 지서장님의 술잔은 비우기가 무섭게 잔이 채워지는 데 반해 내 잔은 가뭄에 바닥 갈라진 논바닥 같다 그렇다고 제 손으로 술을 따라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부익부 빈익빈 술배를 골아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도 어쩌다 자기 말에 동조해달라는 듯 고개를 한번 내 쪽으로 돌려주는 게 고마워서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환한 표정으로 화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맞장구를 쳐 주거나 재미 한 푼어치 없는 아재 개그에도 배를 잡고 웃어야 하는 처지다
다른 기관장들은 그새 취했는지 횡설수설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대뇌피질은 점점 청빈해진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혼자 한 잔 더해야 할까보다 비틀비틀 사라지는 영감님과 굳은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먹먹하다 터덜터덜 가로등이 서럽게 비추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앞서가는 그림자가 오늘따라 느자구없이 더 길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속에 섞여 살면서 늘 구석 자리에 앉아 반 박자 빠르게 술을 따라주고 한 박자 느리게 잔을 비우면서 웃어주고 손뼉 쳐주는 나는 행복한 고독에 몸서리치는 시골 우체국장님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스노우볼
이용임
다섯 살 무렵엔 많이 아팠다
교회의 종탑에서 떨어진
커다란 시계바늘을 안고
맨발로 골목을 걸었다
하늘이 툭, 무너졌다
꽃들이 기침을 하고
먼지를 뱉었다
그을음을 뭉쳐 심장을 만들었다
사나운 날개뼈 아래 숨겨두었다
스무 살 무렵엔 사랑을 했다
연인이 선물한 꽃다발이
방 가득 시들었다
먼지를 감아 이불로 덮었다
아무리 걸어도
발바닥에선 피가 흘렀다
마흔 살이면 표정이 질겨질까
정수리에 흰 머리카락이 돋으면
가위로 잘라주세요
땅속에는 구근이 가득해요
투명한 슬픔이 근사하게 자라서
모자도 쓸 수 없는 사슴이 되었다
예순이 되면 얼굴이 지워지나요
아침마다 세수를 해도
새로운 표정이 생겼다
무너진 벽을 꽃이 점령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언덕과 바다까지 행진했다
오늘의 나는 슬픔 반스푼 모자란 사람
목구멍을 간질이는 소리가 있어요
빗장뼈를 열면
부러진 날개에서 자란 깃털들이
눈보라처럼 쏟아졌다 차가운 화덕에 두고
잊은 빵처럼 모서리가 부서진
재투성이 심장이 거기,
있었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