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칼럼>
화려한 휴가
최광림(주필)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지난 달 25일 개봉, 한국영화사상 최단기간(7
일)에 관객 200만을 돌파하더니 상영 11일째인 5일, 마침내 300만을 훌쩍 넘어섰다. 관객동원의 신기원
을 수립한 ‘화려한 휴가’는 영화의 질이나 흥행을 논하기에 앞서 침체된 국산영화시장에 부활의 신호탄과
도 같은 가뭄 속 단비다.
광주항쟁을 소재로 다룬 대표적 영화는 ‘화려한 휴가’에 앞서 1996년 장선우 감독의 ‘꽃잎’, 2000년 이창
동 감독의 ‘박하사탕’ 등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사회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했
으나 ‘화려한 휴가’만큼 크나큰 반향을 주진 못했다. 그렇다고 두 영화가 ‘화려한 휴가’에 비해 내용이나
질적인 면에서 처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무튼 100만 관객돌파라는 ‘서편제’를 시발로 ‘실미도’ ‘왕의
남자’에 이은 ‘화려한 휴가’는 한국영화계에 ‘화려한 잔치’가 되고 있다.
영화 ‘꽃잎’은 5․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의 총부리 앞에서 죽어가는 어머니를 외면하고 도망친 15세 소
녀(이정현 분)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영화다. 소녀는 공사장 인부 장씨(문성근 분)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
르지만 당시 충격으로 인한 정신이상에 만신창이가 된 소녀의 깨뜨릴 수 없는 기나긴 침묵과 초점 잃은
무거운 시선이 장씨를 더욱 분노케 한다. 이 악몽에서 탈출하고 싶은 장씨는 소녀를 강간하고 무참하게
학대하면서도 그녀의 고백에 점차 아픔을 공유해가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박하사탕’ 역시 2000년 한국영화의 문을 열었던 작품으로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의 파란 많은 삶을 역
추적한 작품이다. 순박한 스무 살 청년 영호의 삶을 뒤바꾼 광주민주화운동. 순임(문소리 분)이 준 박하
사탕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영호는 입대 후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민간인을 죽이고 이
성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시대적 아픔과 질곡의 변질과정을 비교적 상세한 차원에서 다룬 영화다.
그렇다면 ‘화려한 휴가’는 어떤가, 퇴역장교인 시민군 대장(안성기 분)과 간호사인 그의 딸(이요원 분) 택
시기사 시민군(김상경 분)과 고등학생인 동생(이준기 분)을 내세워 고독한 항쟁의 열흘을 주섬주섬 스크
린에 담아냈다. 무고한 시민들이 총칼로 무장한 진압군에게 무차별적 폭행과 죽임을 당하자 시민군을 결
성, 마침내 항쟁의 중심에 선다. 때때로 웃음과 눈물로 응집된 감흥을 자아내면서 당시 광주시민들의 애
환과 필사적인 몸부림을 적당수준에서 터치한 작품이다.
사실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기 전 5․18세대의 한 사람인 필자는 그 기대가 남달랐다. 1980년 전두환을
축으로 한 신군부의 등장과 정권찬탈로 야기된 5.18 광주민중항쟁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92년 전까지
만 해도 입에 담기조차 버거운 극도의 금기사항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광주민중항쟁 27주년을 넘겼고
또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뀐 마당에 스크린을 통한 역사적 진실고발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줄만 한 파격
적일 것이라는 섣부른 예상에서였다.
실체적 경험은 고사하고 간접적 경험조차 일탈한 일반 관객에게 ‘화려한 휴가’는 그날 오월의 참혹한 만
행과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 각인시켜 준 스크린의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겠으나 당사자격인 광주시민
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의 입장에서도 아쉬움이 크다.
다소 미흡한 극적 긴장감, 사실적 내지는 실체적 접근의 한계가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옥의 티로 작
용했다. 당시의 현장 테잎이나 다각적인 고증을 앞세워 보다 공격적인 연출을 했더라면 관객의 감동배가
는 물론 스크린의 위력이나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려 새 지평을 여는데 일조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다
만 아직도 광주의 오월은 현재진행형임으로 후속타에 거는 기대 또한 포기할 수 없다.
‘화려한 휴가’의 개봉을 계기로 장외공방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 카페 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는 ‘광주사태는 탈레반과 같은 폭도들이 만들어낸 폭동이다.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지 말자’ ‘각하의
위상을 깎아내리기 위해 억지로 만든 영화’라며 극도의 정신질환적 발작과 난동을 획책하고 있다. ‘각하
의 명예회복!! 영광의 그날까지!! 함께하는 전사모!!’라는 무시무시한 슬로건을 내걸고 제 2의 반역을 획책
하는 그들의 협박과 광기에 분노의 차원을 넘어 소름이 뻗친다.
진정 대안은 없는가, 전 재산 29만원으로 지금 이 시간도 역사를 역류시키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정권
찬탈과 민족살육의 수괴 전두환과 그 도당들을 화해와 용서라는 미명하에 묵인과 방치로 일관하는 현 정
권과 국민 모두에게 ‘화려한 휴가’가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다.
<choikwanglim@yahoo.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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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칼럼]화려한 휴가
최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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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85
07.08.09 14:13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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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오랜만에 들렸다가 선생님의 작품들 염치없게 잘 감상하고 갑니다. 화려한 휴가 꼭 보아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자알 감상하고 뭔가를 얻는 시간 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엄청난 비극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영화를 보는 순간순간 뭉클거리는 어떤 것을 토해내지 못해 가슴을 쥐어 뜯었습니다. 가까이 또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분노했으며 또한 가슴에 응어리가 얼마나 뭉쳐있을까요? 스승님, 이러한 사태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저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국민 역시 그러리라 믿습니다.
'남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지요. 민족의 최대비극인 이런 일들이 이 땅에 다시금 재현돼서는 안되겠지요. 모두의 겸허한 성찰과 굳은 각오가 있어야겠습니다.
오널, 두 아들과 함께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진혼곡 같은 공포의 총성, "눈 떠 봐, 눈 떠. 너, 형 말 안 들을 거야? 일어나 빨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자." 형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죽었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관을 나서며 탑동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습니다. 스크린에서 들었던 그 날의 총성이 재현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현대판 4.3사태로 비유할까요. 정신병자 같은 한 사람의 정권야욕이 이렇듯 국가적인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직도 살아있어 비겁한 우리모두의 잘못이 아닐까요? 수많은 민중들의 희생이 민주의 화신으로 부활하는 날까지 우리는 주어진 책무에 더욱 충실할 일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도 광주의 오월은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