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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목사님의
복음주의 에큐메니칼리즘?!
에 대한 이해? 부연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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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사상이 필요 할까요?
이럴 시간에 나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전도합시다!
/
아젠다 및 세부 목표설정은
누가?
과정은 공정하며
열매는 ~ 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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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4년 9월호)
[좌담]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를 위한 성찰
김흥수 목원대학교 명예교수
안재웅 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
이홍정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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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9일, 대한기독교서회
김흥수
오늘 좌담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창립 100주년을 맞아
NCC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의
교회 일치와 협력 운동 전반을
성찰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최근의 모습을 보면,
NCC의 경우 회원 교단들의 참여가
현격히 떨어진 것 같고,
시민운동처럼 대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등
NCC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요.
그리고 보수나 진보 가릴 것 없이
연합운동이 언젠가부터
정치화되거나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경향도 보이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도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고,
에큐메니컬 운동이
원래 추구해야 할 가치도 되짚어보면 좋겠습니다.
//
‘에큐메니컬’이란 단어의 기원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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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올해가
한국 기독교(개신교) 140년이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00년 되어서 9월에 100주년을 기념합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이 내한한 지
40년 뒤인 1924년에
NCC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조직되어
교파 간 연합운동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공의회가 조직되기 이전부터
연합 활동은 이루어졌지요.
1910년경이 되면
장로교, 감리교를 포함해서
성결교, 침례교 등
지금 한국에 있는 주요한 교파 선교회가 다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니까 1910년 이전부터
다양한 교파들의 연합 활동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하나의 기구로 만들어진 것이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입니다.
이 기구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 무렵에는
어떻게 힘을 합해서
활동할 것인가를 구상하면서
‘연합’이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선교사들은
‘유니온’(un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1905년경 이후로
여러 잡지에
유니온의 필요성에 관한 글을 많이 썼죠.
감리교에서는 유니온을
‘협성’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감리교의 신학교를 이르는 말도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공동 운영하는
신학교라는 의미에서 영어로는
‘유니온 세미너리’(union seminary),
한국말로는 ‘협성’신학교였죠.
교명이
감리교신학교로 바뀐 것은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통합된
1930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해방 이후에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때부터 말이 어려워집니다.
지금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한참 설명을 들어야 이해가 되는 단어죠.
이것은 세계 교회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초대 총무를 지낸
비셔트 후프트(W. A. Visser’t Hooft)의 글에서는
에큐메니컬이란 단어를
역사적으로 7가지 의미로 썼다고 말해요.
그렇게 다양한 의미에서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을 써왔는데
한국교회도 그렇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이 에큐메니컬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말을 꼭 써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먼저 다루면 좋겠습니다.
WCC는
아마 1948년 창립 직후부터
이 용어를 썼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7년부터
그 단어를 쓰기 시작하고,
에큐메니컬을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합니다.
1959년에는
NCC가
‘에큐메니컬 운동 선언’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는데,
그때 이후로 많이 쓰인 거죠.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ecumenical’이라는 단어를
‘에큐메니칼’로 표기해 왔습니다만,
「기독교사상」에서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방식에 따라
‘에큐메니컬’로 표기합니다.
//
박종화
교회가 갈라지기 전
니케아공의회 선언문에
“하나의, 거룩한, 공교회이며,
사도적 교회”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라는
문구가 나와요.
교회의 네 가지 본질을 말하고 있지요.
‘가톨릭’이라는 말은 원래는
‘공교회’라는 의미인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서 이 단어를
‘로만 가톨릭’(Roman Catholic)으로
해석하면서
자기들만이
보편적 교회임을 주장했지요.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는
로마가톨릭이 전유한
그 용어를 대신할 다른 말을 찾았고,
/
그것이 ‘사람이 사는 온 세계’라는 뜻의
‘오이쿠메네’(Oikoumene)라는 말이지요.
오이쿠메네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전 세계에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보편적인(catholic) 교회로서
‘일치’를 이루며 살라고 부름 받았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온 세계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적인(apostolic) 교회로서
‘선교’의 사명을 다하라고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거룩한’ 교회는
이처럼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신구교 모두가
이 점에 동의합니다.
/
그런데 아시다시피
개신교의 경우
특별히 한국교회에서는
에큐메니컬(ecumenical)과
에반젤리컬(evangelical)이라는 말이
신학 성향상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를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요.
한국교회 선교의 주역인
미국교회의 영향이 큽니다.
그런데 독일어권에서
‘에방겔리쉬’(evangelisch)라는 용어는
‘개신교’를 뜻하며,
천주교를 뜻하는
‘카톨리쉬’(katholisch)와 구별할 때 씁니다.
독일의 개신교 총회/연합회를
‘Die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EKD)라 하는데,
이를 ‘독일복음주의교회’라고 번역하면 완전 오역입니다.
마찬가지로
‘evangelische Theologie’는
개신교 신학이지,
복음주의 신학이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익숙한
‘복음주의’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에방겔리칼’(Evanglikal)이라고 별칭합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
개신교 내에서
에큐메니컬이란 운동에 대한 노선상의 반대로
에반젤리컬 운동이 나왔고,
이 둘이 갈등하면서
지금의 한국 상황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가톨릭,
에큐메니컬,
에반젤리컬이란 용어를
면밀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안재웅
기독교가
하나의 교회를 오랫동안 이어오다가
1054년에 대분열을 일으켜
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로 갈라지고,
그다음에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로
여러 가지 분파로 갈라졌죠.
그러고 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선교에 대한 이슈였다고 봅니다.
복음의 내용을
우리끼리만 공유하고
우리끼리만 교회를 이룰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모르는 대륙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자고 하면서
선교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죠.
즉 1517년 종교개혁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경쟁적으로 선교하다가
오이쿠메네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이쿠메네는
전 우주적, 전 세계적, 전 지구적으로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
그런데
새로운 대륙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선교부에서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하다 보니까
현지에서
선교사들끼리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자기를 보낸 교단,
선교단체에 충실하다 보니까
결국 선교사들끼리
경쟁이 너무 심해지는 거예요.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도록
모든 교단을 아우르는
작은 모임을 하다가
이게 확대되어
1910년 에든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를 하게 된 것이죠.
1910년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분수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 이후에도
선교하는 그룹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잘 해결할 방법으로
에큐메니컬 협의회를 계속하게 된 것이고요.
이렇게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한다는
사명에 충실하려고 한 운동을 통틀어서
오이쿠메네,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해석했습니다.
//
김흥수
에큐메니컬이란 용어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또 에큐메니컬 활동이
어떻게 나타나게 됐는지를
세계 선교와 관련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서 속에 나오는
오이쿠메네라는 말을
19세기 세계 선교 상황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다시 발견하고
연합 운동에
그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MC),
1925년에 들어서
‘Life and Work’(생활과 사업)라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2년 뒤에는
‘Fatih and Order’(신앙과 직제)
운동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다가 1937-38년에
이러한 운동들을 하나로 모으기로 합의하면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가 탄생했지요.
이 과정에서
선교와 사회봉사, 신학을 포괄하는
‘에큐메니컬 무브먼트’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세계교회사 차원에서 보면,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칼케돈회의(451)인데,
라틴어로
‘Concilium Oecumenicum’
으로 표현했습니다.
영어로 하면
‘Ecumenical Council’이죠.
//
이홍정
어떤 특정 언어가 시대의 변화나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의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개념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일부 지식인들은 에큐메니컬이라는 용어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용어가 성서적으로는 헬라-로마 제국의 세계관 안에서 사용된 언어라는, 당대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담고 있다는 비판적 성찰이 있습니다.
이 같은 성찰은 위대한 19세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집니다.
선교를 통해서
전 세계를 기독교화하고
서구 문명화하겠다는
프로젝트에 담긴
오이쿠메네의 의미가
다분히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용어라는 것이지요.
소위 1910년을 정점으로 전개된
에큐메니컬 운동이
서구 중심성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성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복음의 총체성이나 온전성이
파편화되었음을 드러내는 용어로 사용되었고요.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마저도
에반젤리컬에 대해서
갈등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 숨 쉬는
전 교회가 지녀야 하는
온전성, 총체성과 같은 요소가
오이쿠메네나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하는
영어 단어 속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시대적 제약 속에서
이것이 분절되었다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로잔운동이 제시한
‘전(全) 교회가,
전(全) 복음을,
전(全) 세계에 전파한다.’라는
구호 아래에서
이 문제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구호는
WCC의 선교 운동도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서구와 비서구로 분리해서
이해하던 세계를 극복하고,
복음을 냉전적으로 이해하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며,
또 교회 역시 기존 교회와
신생교회 즉 마더(mother) 처치와
도터(daughter) 처치로 구분해온
그런 이분법 역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용어가
개념사적인 변천을 한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원하는 개념을
그 용어 안에
강조하고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에큐메니컬이라는 용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 크리스티나(Pax Christin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등의 의미로 사용해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껏 지향해온 것이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해왔기에
이 개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안재웅
서구 중심 기독교 운동으로서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 당시는 그리스-로마가 전 세계였고,
거기에 끼지 못한 곳이
제3세계 대륙들이었죠.
그러니까
그레코-로만 세계의 복음을
다른 곳에 가서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슈였어요.
우리가 먼저 배웠고 아니까,
아는 것만큼 전파하자 이런 의도였던 것 같아요.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지만,
이에 대한 비판이
훗날 나오는 것이지요.
/
1895년 WSCF(세계학생기독연맹)를 창설한
존 모트는
온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엄청난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디 선생 등 모여서
학생들을 훈련해서
선교사로 보내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실행했지요.
그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때 참석한 사람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이었어요.
그들이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결심해서
한국으로 온 것이지요.
/
이런 선교적 캠페인을 회상해보면,
WCC가 생기기 전에는
교회도 연합체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세계 각 나라들이 연합체를 이루기로 하여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만들려는 것처럼,
‘리그 오브 처치스’(League of Churches)라는 걸 시작했어요.
한스 루디 베버(Hans-Ruedi Weber)의 책
Aisa and the Ecumenical Movement, 1895-1961(아시아와 에큐메니컬 운동, 1895-1961)을 보면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4명의 준비위원까지 뽑아서 준비하다가
/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니까 멈춘 거지요.
그러고 나서
유엔이 생기는 걸 보고,
교회도
결국 WCC를 만들게 된 거죠.
그 동안에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한
청년학생 운동의 지도자, 신학자들, 교단장 등이 의견을 모아 협력하면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겠다는 기대가 담겨 있지요.
그런 이해를 통해
에큐메니컬 운동이 확산되었다고 봅니다.
/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학생운동에서는
‘워크 캠프’(work camp)라는 걸 시작합니다.
적대국의 학생들을 한데 모아서
화해와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같이 먹고 자고
서로 이해하고 성서 연구하고
일하고 이런 일을 한 것을 보면,
에큐메니컬 운동이 초기부터
‘화해와 일치’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박종화
에큐메니컬이란 용어의 성서적 전거로는
먼저 요한복음 17:21의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서소.”
즉 갈라진 교회들의 일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일치 방식을 따르는
에큐메니컬 일치요,
동시에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여
하나 되게 한다는 선교를 위한
에큐메니컬 일치 운동이에요.
한마디로 선교이지요.
선교를 위해,
복음화를 위해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또 다른 전거는 로마서 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니까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선은 ‘하나님의 뜻과 나라’이고,
선이 펼쳐지는 곳은
바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실
이 세계/땅입니다.
/
요한복음의 말씀,
그러니까 선교를 강조한 것은
1910년 에든버러 대회이고,
모여서 선을 이루자는
로마서의 말씀을 강조한 것은
1925년 시작된
‘Life and Work’(생활과 사업) 운동이에요.
그런데 후자에서 말하는
‘선’이 구체적으로 뭐냐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가 유럽에 기승을 부리니까
전 세계의 교회가 모여서
히틀러와 전체주의 체제에
저항한다는 의미예요.
그게 1925년 스톡홀름 모임의 의미죠.
그러니까
‘생활과 사업’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에요.
/
이렇게
1910년에 선교의 일치가,
1925년에 봉사의 일치가 이루어졌고,
그다음에
신학과 교회도 일치를 이루자고 해서
2년 뒤인
1927년 로잔에서
‘신앙과 직제’가 출발한 겁니다.
선교, 봉사, 신학
이 3개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효시인데
개신교 전체 운동으로 번졌고,
1960년을 넘어오면서
개신교 혼자 하지 말고
가톨릭과 함께하자는 움직임까지
일어나 신/구교 연합이 생긴 거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말이죠.
/
1924년에
우리나라에서 NCC를 만들 때
에큐메니컬이냐
에반젤리컬이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 돼서 선교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거였죠.
이처럼
에큐메니컬은
선교적 봉사라는 시각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점검하고
또 성찰하는 좋은 출발점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김흥수
이렇게 설명을 들으면 이해가 가는데,
저는 용어 자체가 어렵다고 봅니다.
지금 에큐메니컬 운동이
한국교회의 중요한 과제인데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이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Life and Work’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생활과 사업’ 또는 ‘생활과 실천’ 또는 ‘삶과 일’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와 닿지 않습니다.
1920년대가 되면서
이제 다양한 교파들, 선교 그룹들이
사회 문제를 앞에 두고
‘기독교적 삶의 방식’
(Christian way of life)이 뭐냐
고민이 생겼던 거죠.
그 논의를 하면서 ‘life’라는 말을 썼습니다.
2002년에 WCC에서 출간한
『에큐메니컬 운동 사전』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에
그런 설명이 나옵니다.
즉 ‘Life and Work’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 문제,
국가적인 문제 또는
세계적인 문제에 대해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하고 반응할 것인가
그런 뜻을 담고 있는데
‘생활과 사업’이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신앙과 직제’도 어려운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서로 다른 게 많으니까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대화하는 운동이지요.
신앙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직제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1948년 WCC 암스테르담 총회를 다녀온
엄요섭 씨가
「새가정」에
총회 참석기를 보고하면서
‘신앙과 질서’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지금은 신앙과 직제라고 쓰지요.
직제란
교회 구조와 실천적인 면들,
예를 들면
교회의 정치 체제,
세례와 성만찬,
여성 안수 같은 것들이죠.
//
이홍정
1910년을 시발점으로 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논의할 때
선교 현장에서
서구 선교사들이 경험한
불일치의 주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가
갈등 요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종교개혁 이후에
교파주의가 형성되고
정통주의 물결을 따르게 되면서
그 안에서
종교 전쟁을 비롯한
엄청난 갈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요.
이것이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결합하면서
제국과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교파적 정당성이 형성되고요.
그러면서
제국주의 시대에 선교사들이
피식민지 지역으로 가서
자신들의 제국과 민족, 교파를 위한 유익에
1차적으로 복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관계가 형성됐다고 봅니다.
뜻있는 선교사들이
이러한 선교 행태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의 협의체가 만들어져 논의하고
1910년에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이를 국가 단위 차원에서
더 가속화하기 위해서
1921년에 형성된 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국제선교협의회)가
본격적으로
각 나라의
NCC를 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고,
그 결과로
존 모트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죠.
그렇게
1924년
우리나라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무대에 초청되어
IMC에 가입한 게
1928년 예루살렘 대회입니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국제연맹이 형성되고
스웨덴의
죄더블룸 대주교가 주동하여
교회 연맹을 강조하게 되고,
아마 스웨덴 등
북유럽의 중립국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세계평화 운동의 영향 속에서
‘Life and Work’가 탄생하지 않았는가 생각해요.
그 이후에
교회 내적인 문제로
‘신앙과 직제’의 문제 역시
서구의 역사 속에서
서구 교회의 어젠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요.
결국은
서구가 제국주의 선교 시대에
교파주의 선교를 식민지에 뿌리내렸고
우리의 교파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서구의 교파주의적 전통에서 온 것인데,
이런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서구 교회가 일치의 어젠다를 내세우며
신앙과 직제가 탄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Life and Work’ 같은 경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전후 서구사회 복구의 주도권을
기독교와 사회주의 운동 중
누가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하였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WCC 암스테르담 창립총회 등에서
나타난 대로
서구 교회가 직면한
사회변혁의 주요 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서구 사회의 변혁을 위해
그야말로 신앙과 삶이 일치된 의제들을
선점하고 주도해야 한다는
선교적 동기와
반공주의적 시대적 동기도
같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NCC와 에큐메니컬 운동 그리고 에반젤리컬과의 대립
//
김흥수
에큐메니컬 운동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협력과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는 말이
그렇게 받아들여지는지,
오히려 복음주의와
대립적인 명제가 된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한국교회는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잖아요.
오히려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이
분열의 씨앗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NCC 안에 있는
교단들 사이에도
에큐메니컬에 대해 생각하는 게
다 다르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지금 이 용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진영을 표상하는 깃발이 됐습니다.
사실
‘복음주의권’이라는 용어도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 개신교가
교회의 제도가 아니라
모두 다 ‘복음’을 들고 탄생한 거니까요.
이것에 대해
성찰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
박종화
제가 복음주의권 사람들과 만났을 때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을 쓰면
바로 반응을 해요.
‘우리 복음주의와는 반대네요.’
현재 우리 한국 상황은
에큐메니컬,
에반젤리컬이 교회 정치화,
이념화의 표상이 돼서
어떤 논의를 진지하게 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
역사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은
한국에서
1970년대에 민주화 운동,
민중 운동으로 발전하고,
제3세계에서는
식민지 해방 운동으로
전 세계를 뒤집어놓은 운동입니다.
이렇게 에큐메니컬이라는 말이
하나의 이념과
가치체계로 등장한 거죠.
그것의 반대급부로 한국에서는
복음주의 운동이
반(反)에큐메니컬 운동으로 등장한 것이
우리의 아픔이지요.
/
그런데
세계적 차원에서
1960-70년대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요.
제3세계가 들어와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도권을 가지려고 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서구 중심이 아니게 된 거죠.
그때 로잔대회 얘기도 함께 나오죠.
로잔이
복음주의 그룹이잖아요.
1974년 로잔(Lausanne) 대회에서
‘그동안 너무 개인 구원에만 치중했다.
사회 구원을 등한시했다. 사죄한다.’라고 하고,
1975년 WCC 나이로비(Nairobi) 총회
2차 본회의에서도
복음은 전적인 복음이며,
전 세계에 전파해야 할,
전 인류를 위한 복음이라는
대전제하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 사회 구원에만 집중했고
개인 구원을 등한시했다. 미안하다.’
이렇게 서로 반성한 거예요.
1960-70년대에
이러한 세계적 변환기에
한국은 왜 그렇게 분열하게 되었을까요?
아마 한국 사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에서는
민주화 운동,
민중 운동에 집중하게 되니,
그때부터
반대급부로
복음주의권에서 반발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좀 해요.
//
안재웅
제가 보기에는
교회를 하나로 모으는 끈이
에큐메니컬이에요.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하는 용어를
우리가
아주 보석처럼 다뤄서
묶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어요.
WCC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컬 기관과 모임들이
교회 연합과
선교와 봉사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한 아름다운 보석이에요.
그런데 교단의 정치꾼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반사 이익을 얻으려고 해서
오염된 거예요.
에큐메니컬 운동 자체가
사람들에게 헌신짝처럼 취급되는
그런 계기를 제공한 거죠.
한국교회만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봐요.
분단으로 인한
용공논쟁을 교묘하게 내세운
매킨타이어 등이
결국 반에큐메니컬로 나서서
에반젤리컬이라는 말을 내세우면서
교단이 분열하는 데도 한몫하고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고
그것을 교단 정치꾼들이 써먹었지요.
앞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이
잘 받아들여지도록 이해시키고
잘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홍정
저는
에큐메니컬, 에반젤리컬
갈등과 대립의 문제는
전형적으로
분단 냉전 시대의 산물
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분단과 한국전쟁의 영향력 아래에서
소위 냉전 기독교의 탄생이
에큐메니컬과 에반젤리컬의
대립적 갈등을 강화하고 고착시켰습니다.
그 이면에는
반공주의와 친미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
한국교회의 한계도 있지요.
NCC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 혹은
통일 운동이
민족과 민중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간 것은
유산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에큐메니컬 혹은 진보 운동이라고
하나의 파편화된 운동으로 폄훼하면서
반대급부로 교회 성장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 자체가
분단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의 유산을 살리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온 NCC가
전 교회 차원에서
이 기억의 유산을 공유하기 위해서
협의회적인 과정을
얼마나 발전시켜 왔는가 자문하면,
대단히 많은 과오와 부족함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에반젤리컬, 에큐메니컬의 대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출발했으며,
그 안에서
신앙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밝혀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NCC라든가 한교총이라든가
이 협의회들이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갈등 구도 안에서 형성됐는데
그 협의회들을 포괄하는
협의회적 과정(conciliar process)을 설정하여
이런 문제들을 함께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함께 맞대고
그 지역사회의 주체가 되는
지역교회가
이런 부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지역 에큐메니즘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NCC가
기억의 유산을
나름 소유적 패턴으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는 노력을 했습니다마는,
그동안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반감을 가지고 있는
지역교회들을 향해서
일치를 위한
대화의 문을 열었는지,
전 교회의 유산으로
전 복음으로 승화시키고
전 세계를 향해서 펼쳐나갔는지
자문해보면,
역시 냉전적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서
에큐메니컬 본연의 자세가
많이 제한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현주소
//
김흥수
지금까지 에큐메니컬이라는
용어 문제를 바탕에 놓고
여러 말씀들을 나눴고요.
용어도 문제지만
연합운동의 사업도,
일도 스스로 제한을 두면서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
NCC가
1924년 연합공의회를 기점으로
100주년을 기념하는데,
그 연합공의회가 생길 때
규칙을 만들었거든요.
그때
성서와
정치
[교회의 정치 체제-편집자],
예배 모범,
교회의 구조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규칙을 애초에 만들었어요.
한마디로
신앙과 직제 영역은 관심 갖지 않고
사회 문제에만 관심을 갖겠다는 거였지요.
서구 전통에서 말하는
에큐메니컬 운동과는 달리
‘선교’와 ‘일과 실천’ 영역에만 관심을 갖되,
신앙과 직제 영역은 배제한 거예요.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의 기구로서의 NCC의 기점을
1924년으로 삼는 건 타당하지만,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시작을
1924년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이전 1905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단일한 교단을 만들기로 하고 명칭까지
‘예수교회’로 합의했습니다.
그 일이 1912년까지
무려 7년간 진행되었지만,
선교부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져요.
예컨대
마펫은 장로교 체제가
성서에 가장 가까운데
다른 교단을 합하는 게 문제라고 봤고,
스크랜튼 같은 경우도
감리교와 감리교 학교를 잘 운영하고 있는데
왜 장로교와 같이해야 하는지 불평하면서
단일 교회를 만들자는 운동이 좌초된 거죠.
1912년에 이미 실패를 맛봤고,
1924년에 그러한 규칙을 만든 겁니다.
/
그래서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은
다시 1905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처럼 수많은
교회 분열이 있는 상황에서
선교와 사회적 실천만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폭을 넓혀서
정말 교회도 가능하면 하나가 되고,
적어도 장로교 같은 경우
100개가 넘는 교단이 적어도
몇 개로 통합해야 한다는 거죠.
그걸 늘 염두에 둬야지
1924년의 어젠다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
박종화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지
어떤 직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에큐메니컬 또한 운동이지
제도가 아니잖아요.
지금 보수나 진보나
모두 그 운동을 추진하는 기구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의 싸움으로
변질되었어요.
넓은 의미에서
선교, 봉사, 교회 일치 운동을 해오면서
제도화되다 보니까
권력 내지는 기득권 싸움으로 번진 건데,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큐메니컬은
정책이고
신앙의 고백이잖아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상황이 달라지면
그 상황에 선제적으로
또는 후속적으로 맞춰서
토론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게 안 될 경우
굳어진 제도가 되고
기득권 세력이 되는 거죠.
//
이홍정
에큐메니컬이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에
전혀 이견이 없습니다.
우리가
WCC, CCA, NCC를 구성한 것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폭을
무제한으로 열어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는 거예요.
동시에
그 운동을 추진하는 방식을
협의회적 친교를 통해서
협의회적 과정 안에서
지역 교회들과 더불어서
진행하겠다고 울타리를 설정하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제한하는
약속을 한 겁니다.
이 범주가 지켜지지 않고
협의회적 특성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구심력이 약화되고
우리 안에 값비싼 친교가 약화되고
결과적으로 원심력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컬 운동권’이 협의회를
일종의 도구로 인식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에큐메니컬 운동이 약화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협의회적 과정 자체를
충실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다시 한번 협의회의 운영 방식이나
목표를 선명하게 해야 합니다.
협의회가
다양한 운동의 차원을
내부 논의에 다 포괄하되,
다만 협의회는
그런 특화된 운동 단체들의
산파 역할만 하는 것이지
스스로 운동 단체는 아니라고 하는
겸허한 한계를 지니고
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박종화
맞습니다.
운동을 나만이 주도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운동 자체의 의미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집단화,
권력 집단화가 운동을 망치게 합니다.
운동 자체가 중심이 되고,
제도적 장치 즉 운동‘권’은
운동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근데 지금은 제도 자체가
운동을 삼켜버려서
내용은 빈약해졌고
거죽만 얇게 남은 상태가 된 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칼뱅이 말한 종교개혁의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미 개혁’했고(reformata) 동시에
‘항상 개혁하며’(semper reformanda) 살라는 교훈 말입니다.
협의체는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다양한 집단이 다양한 방식으로 도와서 세워야지 협의체를 특정 방식과 집단이 독점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자기성찰 없이 교리나 선교 등을 이야기해 봐야 별로 의미 없는 것이지요.
NCC 100주년이 됐으니까 자기 비판적 성찰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도의 문제는 스스로 비판하면서 장점을 보전하고, 운동은 살아 있는 무브먼트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 본질은 잘 살리되 스스로 헌신하며 미래로 나아가자는 겁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이념화, 체계화를 넘어서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포괄적인 새로운 지평을 만들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강조하는 ‘계승’과 ‘창조’의 선순환적 수레바퀴가 역동적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김흥수
『에큐메니컬 운동 사전』을 보면, ‘에큐메니컬 콘퍼런스’라는 항목이 있어요.
거기에 1910년부터 2000년까지 46번의 에큐메니컬 콘퍼런스를 했다고 나와요.
‘Fatih and Order’가 10번 조금 넘고 ‘Life and Work’가 10번 좀 넘고 그다음에 선교 영역이 이렇게 있고, 그다음에 기타 등등 굉장히 골고루 회의가 진행됐더라고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신앙과 직제 영역을 굉장히 소홀히 한 것 같아요.
한국교회가 분열되는 걸 방치할 수밖에 없는 운동을 해온 것 같고요.
NCC가 100년을 맞이해서 이 부분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05년부터 1912년 그리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부터 3·1운동 직전까지 선교사들이 교회 합동에 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씁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 같은 경우도 ‘세례 형태 또는 장로교의 정치를 포기하고 감독주의 교회의 정치라도 받아들이겠다.
진정으로 합동을 이룰 수 있다면 신학이나 예배 형태까지 다 수용할 수 있다.
세계가 그렇게 가고 있다.
호주를 봐라, 뉴질랜드를 봐라, 스코틀랜드 봐라, 영국을 봐라.’ 그렇게 예를 들면서 통합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가 그런 전통을 반드시 되살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
CCA의 창설
//
김흥수
우리는 WCC뿐만 아니라 CCA와도 관계를 맺고 있으니 CCA 얘기를 좀 해주시면 좋겠네요.
1957년 이후 CCA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한국교회가 깊이 참여했는데 아시아 교회에 관한 관심은 좀 적은 것 같아요.
//
안재웅
CCA가 창설되기 전에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제네바가
WCC의 본산이라고 생각했어요.
WCC 측에서는
제네바에서 하면 되는데
왜 지역협의회를 만들려고 하냐고 반대했습니다.
제네바가 본부이고
다른 곳에서는 따라오면 되는데
왜 따로 하려고 하느냐고
CCA 창설에 반대하는 대표들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시아끼리,
아시아의 성격에 맞는
그런 교회 연합, 일치, 선교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아주 강했습니다.
1950년에 제네바 근처 다보스에서
WCC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아시아 대표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소외시키고 심지어 보고도 안 받았습니다.
CCA를 창설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아주 백안시했습니다.
그럼에도 CCA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게다가 독립국가가 많이 생기는 세계 상황,
1955년에 반둥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Asian-African Conference)가 열리고
제3세계라는 말이 크게 거명되는
이러한 환경들이 CCA를 만드는 데 활력이 됐습니다.
그래서 1957년에 프라팟에서 모여서
동아시아교회협의회(East Asia Christian Conference, EACC)를 탄생시켰지요.
제네바에서 CCA,
즉 아시아기독교협의회라는 말을 못 쓰게 해서 EACC,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게 된 거죠.
CCA는 초기부터
‘함께 복음을 증거하자’(witnessing together)는 것을
가장 큰 키워드로 삼았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도 있고
또 타 종교가 성행하는 나라도 있는데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
CCA가 어떤 식으로 함께 복음을 증거하면서 선교할 수 있겠느냐 고민하면서 만든 것이
‘사회 봉사’(social service)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 지원(Inter-Church Aid) 사회봉사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뉴질랜드 사람
앨런 브래시(Alan Brash)를 데려다 놓고
서구 교회의 돈을 가져와
사회에 봉사하는 데 쓰자는 것이 한 흐름이었지요.
둘째로 복음 선교,
마지막으로 청년 운동이었습니다.
소리투아 나바반(Soritua Nababan)을 데리고 청
년 운동을 시켰고요.
그다음에 시간이 흘러 아시아에
군부 세력이 등장하게 되지요.
필리핀의 마르코스,
한국의 박정희,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만의 장개석 등이죠.
이런 여러 가지 판도 속에서
교회가 그들의 아픔에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CCA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그래서 CCA 안에
결국 국제국까지도 만들게 된 겁니다.
아무래도 CCA에서
가장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URM(도시농촌선교국)인데요.
URM은
도시농촌 선교,
노동자뿐만 아니라 거기에 피플스 포럼(People’s Forum)이라는 걸 만들어서
빈민선교, 농촌선교, 도시선교, 학생 선교 등을 묶어서 협의하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직을 많이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기구들을 만들어서
CCA 안에 두지 않고 독립시켰습니다.
모금을 해서 이런 기구에게 돈을 줘서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하는
아주 이상적인 방식을 취한 것이
CCA가 초기에 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CCA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아시아 정체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아시아 교회를 묶었다는 거예요.
그 묶은 협의체로서의 펠로십을
잘 이끌어오고 있다는 거 그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미래
//
김흥수
이제 NCC를 포함하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 지도력을
한국교회가 육성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WCC는
보세이 에큐메니컬 훈련원을 통해서
1년 과정으로 육성하고 있고,
CCA도 1년에 한 번
한 달 동안 30여 명의 아시아 청년들을 모아서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에 기여할 사람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최근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얘기를 들으니까,
교단 청년 운동도 무너졌고 EYCK에도 청년이 없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교육이 약화됐는지,
왜 그 부분을 소홀히 했는지,
미래 준비가 약해졌는지 등을 말씀해주시죠.
//
박종화
사실 어려운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평온해지니까
에큐메니컬 운동도 어려워졌어요.
마치 유엔과 똑같아요.
전쟁할 때는 유엔이라는 기구가 필요하지만,
각자도생을 시작하니까
유엔의 필요가 적어졌잖아요.
변화하는 상황에서
선교, 봉사, 신학
이렇게 세 가지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고민해야 합니다.
이걸 살리지 않으면
운동이 망가질 뿐 아니라
교회 역할 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지금 신학, 봉사, 선교는
전부 뒤로 가고 남은 것은
제도, 권력, 자리가 앞장서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걸 두고 싸움만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이런 상황에서
빨리 변화된 현장을 바로 알고
본래의 모습을 확립하자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갈등, 패권 등 비신학적 요인 때문에
에큐메니컬 운동이 동력을 잃었는데,
에큐메니컬 운동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는
신앙과 신학적 근본을
다시 살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이홍정
저는 N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컬 운동이 관통해온 시대를 크게
3개로 구분해봅니다.
/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그런 운동이 일어난 건데
소위 민족, 민중 문제를
NCC가 어떻게 붙들었는지
조금 더 역사적으로 잘 고찰하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일제강점기에
포로가 된 민족에게서
집단 민중성을 발견한 거죠.
수난당하는 민족에 대한 이해,
민중적 민족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자주와 독립과 해방이라는
모티브를 끝까지 잘 살려 나갔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안에 많은 분열과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회는 교회다웠고
내면적으로 건실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두 번째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 혹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까지의 시기입니다.
냉전 분단 시기이지요.
그때 NCC는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통해서
소위 민족적 민중의 문제를 붙들었고,
그래서 흔히
우리가 민중의 부활이라고 얘기하는
민주화에 크게 공헌했고,
특별히 광주5·18을 경험하면서
민주화의 문제와 통일의 문제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대 인식을 갖고
통일 운동의 기조를 열어갔지요.
그때만 해도 교회는
이 민족과 민중의 문제,
분단 시대의 문제를 붙들면서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세 번째 시기인
소위 탈냉전 분단 시기인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제 우리 한국교회만의 협의체로 형성되면서
상당 부분 교권화되고
조직화되고 또 제도화되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이 지녀야 하는
본연의 운동성을 매개하는 협의회라기보다는
한국교회 안에
또 다른 권력 지형을 형성하는
그런 매개체로 전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가
핵전쟁과 영구 분단화라는
수렁 속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다시 한번 일깨워서
이 민중과 민족의 문제를
우리의 어젠다로 만들어내고,
이를 위해서 지역교회를 포괄하는
협의회적 논의 과정을 펼쳐나가면서
다시 한번 민족과 민중의 문제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깨어나는,
정말로 이 땅의 사람들의 가슴에 심겨지는
그런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오늘날 탈냉전 분단 시기에
민족의 문제가 해체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돈과 권력과 명예의 문제로 이동하면서
한교총, 한기총 이런 단체들과
각을 세우면서
과거의 유산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상황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다시 한번 자기 비움,
케노시스의 영성을 바탕으로
치유와 화해를 이루기 위한
풀뿌리 에큐메니컬 운동과
지역 운동을 중심으로
활성화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세상에 전파하는
진정한 의미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질이
한국교회 안에
회복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박종화
제가 복음주의권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구원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면서요?’ 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구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 구원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우주적, 역사적 구원입니다.
개인 구원의 문제를 위해서는
조직체가 필요 없지요.
국내 조직도 필요 없고
세계 조직은
더더욱 필요 없습니다.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이니까요.
그러나
사회적, 우주적 구원을 위해서는
집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입니다.
’
일반 사람들이
이 용어 자체를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사회 구원만 얘기하고
개인 구원은 없다고요.
이게 틀린 말인데
그동안
너무 깊고
넓게 주입된 거죠.
시대마다 강조점이 다를 수는 있으나 개
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에요.
이걸 다시 회복해야 해요.
우리 스스로가 잘못 이해하는 부분을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 구원을 위해서는
집단이 필요하고,
그래서 NCC 에큐메니컬 운동이
꼭 필요한 겁니다.
문제는 지금
변화하는 시대에서
N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컬 운동이
실질적인 삶의 이슈를
선점해야 하는데,
지금 NCC가 이슈 발굴과 전개에 약해요.
단지 ‘민주화’만 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진정한 선진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대
안을 제시해야 해요.
남북문제 또한 당연히
NCC에서 다루어야 하는데,
‘남북문제는 민족 문제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세계의 문제이다.’ 하는 방식으로
포괄적으로 접근하면 좋겠어요.
그다음에 선교 봉사 문제인데요,
이것은 복음주의나
우리나 비슷하게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선교 봉사에 관한 한
교파와 이념의 갈등을 넘어서
한국적인 모델을 만들어보자고,
그래서 선교의 일치,
봉사의 일치를 이루어가자고
주장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NCC가
이러한 이슈들을
새로운 시대에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로 여기고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이를 위해서
기구적 변혁,
정책적 변혁을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곧 종로5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우리가 내세우는 지향과 목표를
다시 한번 신학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안재웅
규모가
점점 축소되는 한이 있더라도
에큐메니컬 운동의 필요성과 당위는
점점 필요하고
더욱 요구될 것이라고
저는 전망합니다.
박종화 목사님의 말씀처럼
수많은 이슈 중에서
몇 가지 매력 있는 이슈를
선정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된
이슈를 끌고 나갈
기동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적재적소의 적임자가 나타나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뭉쳐서 이끌고 나가면
에큐메니컬 운동이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WCC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많은 내용이
국내에 잘 전달되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요즘은 예전보다는 좀 나아요.
배현주 목사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많은 역할을 했고,
또 김서영 목사가
지금 중앙위원을 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정리해서
잘 전해주는데요.
그래도 그런 세계적인 흐름에 대해서
국내에서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그 일에
NCC가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그냥 보고만 받고
하나의 흐름 정도로만 이해해선 안 되고,
우리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우리의 좋은 것을
저쪽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8·15 남북교회 공동 예배문 같은 거 만들어서
온 세계에 뿌리는 것처럼요.
이렇게 잘해오던 것은
더 정교하게 하고,
세계가 돌아가는 것에 대한 이해를 더 높여야 합니다.
그럼 이걸 누가 하느냐?
NCC 회원 교회 멤버들도 할 수 있겠지만
역시 동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청년, 학생, 여성,
또 소외된 평신도 그룹들이 해야 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YMCA가
‘mind, spirit, body’라는
세 가지의 틀을 구성해서
운동을 해나가는 것처럼,
NCC도
‘일치와 갱신, 선교와 교육, 봉사와 나눔’ 이런
세 가지 틀을
늘 리마인드해서
이 운동을 잘 이끌어 나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이홍정
저는 운동의 방식을
훨씬 더 협의적이고
연대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CC 사무국이
9개의 교단회원,
5개의 기관회원 외의
또 하나의 단체처럼 활동하는 부분들을 최소화하고
NCC 사업이
회원 교단과
기관들을 포괄하면서
그들의 운동으로
전환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시민사회와 지역교회가
그 운동에 참여하면서
지역 에큐메니즘의 폭을
확산시켜 가도록
운동의 운영 방식에
철저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NCC가
또 다른 하나의 회원처럼
사무국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고,
또 위원회가 독자적 자율성을 갖고 주장하는 것을
협의회적 사고를 통해
자제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단체로
스스로를 변화시켜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자기 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권력과 명예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갱신을 할 때입니다.
과거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끌어간 분들이
역사적으로 그 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것은 기억해야 하겠지만,
이것이 전체의 유산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내고
세대를 계승하는
그런 자기 비움의 운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사람이 중요합니다.
각종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
또 그들이 같이 모여 있는
에큐메니컬 협의회의 집단 인격이
정말 시대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돈과 권력과 명예의 문제에서
다른 세속 사회나
보수적 교회 권력과 그
렇게 큰 차별성이 있는가 하는 반성이 듭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변화의 희망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
박종화
제가 교단 총무를 할 때 보니,
노회가 해야 할 일을 전부 총회로 가져와요.
그래서 총회 산하에 구성된 위원회가 스무 개가 넘어요.
사실 총회가 추진하는 중점 사업 영역이 있고,
그것에 모든 자원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노회가 가져오는 그 많은 일을 총회가 할 수 있을까요?
전문 지식이 없고
인력이 없어서,
돈이 모자라서,
전문 인력이 없어서 못 해요.
총회는 만병통치약이 아니거든요.
NCC도 마찬가지로 위원회가 열 개가 넘습니다.
지금 평화 문제 등
특정 문제를 중점 사업으로 해놓고,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만 하는 것이 훨씬 나아요.
우리가 오늘
NCC라는 기구에
기대하는 것은
종합운동장 짓는 게 아니라
특별한 걸 하자는 거예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의 공감을 만드는
중점 사업 몇 개를 정해서 추진하고,
나머지는
뜻과 방향을 공유하는
다른 주체에 맡기는 방식으로
넓은 의미의
협의체적 연대를
구현해보자는 제안을 해봅니다.
//
김흥수
사실 교단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고
NCC는 몇몇 스태프로
그 일들을 다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교단들이 할 일은
교단이 하고
교단이 할 수 없는 일을
엮어서 해주고
그래서 정말 교단 회원들의 요구를 받고
또 좀 더 나아간 결정을 하고
이렇게 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새롭게 어젠다를 정해야 하고요.
기존의 어젠다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새롭게 정리해야 하고
조직을 정리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향후 10년간 NCC의 중점 사업은 무엇인지,
청년, 여성, 평신도, 교단 지도자 등
모두 모여 토론해서
합의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남은
한국 기독교 150주년을 놓고
근본적인 방향에 대해,
그것을 실행할 조직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홍정
과거 NCC의 선교훈련원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했는데
수년 전에 없어졌습니다.
제가 총무가 된 이후에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교회 아카데미라는 것을
6개 분야로 만들고
각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에큐메니컬 단체와 연대해서
공동의 아카데미를 해봤는데요.
저는 그런 것들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N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컬 운동의 연대체들이
공동의 에큐메니컬 인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구조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에 대해서
각각의 회원 교단이나 단체들이
나름의 교육적 기능을 갖고 있겠지만,
그것을 한국교회 아카데미 안에 통합시켜서
공동의 인식을 가진
에큐메니컬 인력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그 인력들이 성장하여 각
각의 분야에서 제 역할을 하고
지도력을 형성해간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
김흥수
저는 청년들이 지금까지
에큐메니컬 운동이
자기들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전통과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 말은 NCC가
새로운 동력을 갖고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운동을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헌신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청년 세대가 들어와야 하는데요.
청년들이 가진 고민은
과거와는 매우 다릅니다.
기존 세대가
한국 사회를
거시적으로 보는 문제의식과
젊은 세대의 문제의식은
꽤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이 겪는
외로움이나 고독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심각한 것 같고요.
어떻게 그들을 감동시켜
여기로 몰려들게 할 수 있나를 고민하여
해결책을 찾는 것이
미래를 위한 현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과거 또 현재, 미래 그리고
WCC와 CCA 관계를 폭넓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를
얘기한 것처럼
NCC도 100주년을 기해서
NCC의 미래를 많이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좌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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