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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같이 있어도
한 번의 이별은 있다
랠프 왈도 에머슨 수상록
Ralph Waldo Emerson.1803~1882
“하루라는 날짜는 양털보다도 화려한 천으로 그것을 짜는 기계는 훨씬 더 정교하다.
그대가 남들 몰래 천 속에 짜 넣은 거짓된 시간을 감출 수 없다.”
“의욕을 가질 수 있는 인간에게 있어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 - 이것이 성경의 유일한 법칙이다.”
[옮긴이의 말]
개신교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8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독학으로 하버드 대학 신학부를 졸업 후 1829년에 유니테리언 보스턴 제 2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개방적 사고思考 때문에 1832년 사임하였다. 플라톤, 칼라일, 그리고 영국의 시인 워즈워즈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사상을 일군 그는 1835년 이래 뉴햄프셔 주의 콩코드에 거주하였으므로 ‘콩코드의 철학자’로 불기도 한다.
미국의 수많은 작가들의 글 속에서 에머슨의 문구를 인용한 부분을 자주 접할 수가 있다.
[머리말]
“에머슨(Emerson. Ralph Waldo)과 그의 사상에 대하여”
에머슨은 미국의 초절주의 超絶主義Transcendentalism 시인이자 사상가로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의 종교, 예술, 철학, 정치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초절주의란 내부의 정신적 자아가 외부의 물질적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자, 모든 피조물이 본질상 하나이며 진리를 밝히는 데는 논리나 경험보다는 통찰력이 더 낫다는 믿음에 기초한 관념론 사상체계로 초월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에머슨은 이러한 초절주의의 선구자다.
에머슨은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로 명성을 날릴 때도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에머슨의 설교는 전통적인 교리보다는 영혼의 활용에 대한 개인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한 자아신뢰와 자아충족이라는 개인적인 교리 선포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외적, 역사적 전거들을 제거했으며, 우주의 도덕법칙에 대한 사적私的 직관에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두었다. 그 뒤로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목사직도 그만 두었으며, 성서에 기록된 기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체험으로 신을 경험하고 싶어 독일로 향했다.
귀국 후 <자연(Nature)>을 집필하고 강연을 하면서 그의 사상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럽의 심미적, 철학적 조류를 미국에 전했던 문화의 중계자 역할을 하며 미국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 부흥기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지성과 정신적 품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머슨은 인간이 자기 자아와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렇게 각성된 자기인식으로부터 행동의 자유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온다고 설파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근거해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인디언에 대한 가혹한 조치에도 반대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려는 용기를 지녀야 하며, 자신의 직관에서 생긴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자신의 내적인 힘을 신뢰해야 한다는 그의 탁월한 사상은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전 세계 유력한 인물들이 새겨듣는 지혜의 금언이다.
e아시 소로(1817년 출생, 1837년 하버드 졸업)와 에머슨이 서로 공감하고 우정을 이어나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소로가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소로의 사상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에머슨이다. 그 둘은 호손과 함께 <다이얼>지를 발견하기도 했고, 소로의 에세이 <월든>도 에머슨 소유의 월든 호숫가 숲속에서 쓰인 것이다.
소로에 이어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팝의 전설로 남은 마이클 잭슨까지, 에머슨 사상에 공감하고 이를 시금석으로 삼는다고 고백했다.
이 책에는 1841년 발표한 <에세이 제1집 (Essays: First Series)>, 1844년 기관지 <다이얼>에 발표한 <비국(The Tragic)>, 1844년에 발표한 <에세이 제2집>,1860년에 발표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The Conduct of Life)>, 1870년에 발표한 <사회와 고독(Society and Solitude)>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이 담겨 있다.
에머슨의 인간과 우주, 사회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쓰인 사랑, 우정, 자기 신뢰, 경험, 비극적인 것, 운명, 힘, 부, 스상어록, 환상, 일과 일상, 정치에 관한 각각의 이야기는 자기 확신과 올바로 사는 삶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편집자-
제 1장 사랑
1841년 출판한 <에세이 제1집>의 1편
"Love" in Essays: First Series. 1841
“사람들은 때로 인격과 명성을 동일시하고 혼동한다. 인격은 그 사람이 갖춘 마음의 자태이지만 명성은 다만 그 사람의 인상을 남이 마음대로 평판하는 외부적 소리다." -에머슨
“나는 감춰진 보석과 같았다. 이글거리는 빛이 내 몸을 밝혔다.” -코란
영혼의 맹세는 모두 무수한 방법으로 나타나며, 영혼의 환희는 모두 숙성된 하나의 새로운 욕구가 된다. 전진적이고 유동적이라 막을 수 없는 인간본성은 친절이 싹트자마자 그 위대한 빛 속에서 사소한 고려를 모두 무시한 사랑을 예견한다. 이 지복至福의 세계는 일대일의 부드러운 개인관계로 시작되지만, 이것이 인생의 매력이다. 또한 그것은 성스러운 영감과 정열처럼 한순간에 사람을 사로잡고 그 사람의 심신에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게 해 그를 인류와 결합시키고 가정과 개인으로서, 또한 시민으로서의 관계를 이어 주어 새로운 공감을 통해 대자연과 접촉하게 해 감수성을 강화시키고, 상상력을 개방시키고, 영웅적인 성격과 정신적 특징을 깊이 있게 해 주고, 결혼을 성립시켜 인간사회에 영속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지성 혹은 진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체험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고통이다. 사소한 사실은 슬프다. 그러나 계획 그 자체는 훌륭하고 고귀한 것이다. 현실의 세상 속 - 때와 장소의 제약을 받는 이 고통스러운 왕국-에는 걱정과 근심과 공포가 살고 있다. 사상에는, 이상에는 영원의 희열, 환희의 장미가 피어 있다. 뮤즈의 신들은 모두 그 주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비탄은 이름과 몸뚱이, 어제와 오늘의 국부적인 이해에 집착한다.
어떤 사람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고, 한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가장 사소한 것조차 금빛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우리의 몸 전체가 눈이 되고, 사라지면 몸은 추억 그 자체가 된다.
제 2장 우정
1841년 출판된 <에세이 제 1집>의 1편
"Friendship" Essays: First Series. 1841
용맹한 자의 붉은 피 한 방울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제압한다.
세상은 멈추지 않고 변화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친애하는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빛나고 있다.
고민이 많은 나의 정신은 다시 맑아졌다.
내 가슴은 말한다, 아아 친구여.
그대로 인해 하늘은 맑고
그대로 인해 장미는 붉고
만물은 그대로 인해 고상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숙명의 물레방아도
그대의 고귀함 덕에 내게도 가르쳐 준다.
나의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을
감춰진 내 생명의 샘은
그대의 우정으로 인해 아름답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북풍과 같이 마음을 차갑게 하는 이기심이 얼마나 크던 간에, 전 인류의 대가족은 일종의 미묘한 에테르와 같은 사랑의 물에 촉촉하게 젖어 있다. 말을 걸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존중하고 있으며 그것들 또한 우리를 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은 때와 장소에서 만나고 있단 말인가! 거리에서 자주 만나고 교회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 중에 말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즐거운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들의 눈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마음은 알고 있다.
우정을 이어주는 데 있어 도움이 될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들은 모두 지고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뛰어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우며, 또한 무엇을 먼저 거명해야 할지도 단정할 수 없다.
하나는 진실이다. 친구는 내가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 앞에서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생각할 수 있다. 너무나 진실하고 겉과 속이 같기 때문에 거짓, 예의, 재고 등의, 사람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가장 안에 입는 속옷까지 벗어버리고 하나의 화학분자가 또 하나의 화학분자로 결합하는, 그 솔직함과 완전함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의 면전에 나는 결국 도착을 하게 된 것이다.
진실은 왕관이나 권위와 마찬가지로 최고 계급의 인간에게만 허락된 호사이다. 왜냐하면 진실이야말로 자신보다 위에 아첨을 해야 할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진실하다.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게 되면 위선이 시작된다. 우리는 동료들이 다가오는 것을 아부나 잡담과 오락과 사무적인 행위로 막아낸다. 자신의 생각은 모두 자물쇠로 채우고 동료에게 밝히지 않는다. 나는 어떤 종교적인 광기로 인해 이 자물쇠를 풀어버린 사람을 알고 있다. 인사나 불필요한 이야기 따위는 정부 생략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의 양심에 호소한다.
처음에는 그 사람은 반발을 샀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데 모두가 의견이 일치됐다. 그러나 한동안 이런 삶을 지속하는 사이에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는 지인들 모두와 거짓이 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우정의 또 한 가지 요소는 친절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인연, 혈연, 자부심, 공포, 희망, 이익, 색욕, 증오, 칭송, 모든 상황과 기억과 세세한 것에 의해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의해 우리를 매료시킬 만큼의 품성이 타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믿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만큼 모든 타인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우리는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내게 있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면 나는 행운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나는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 눈과 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정이라고 하는 말이 시대의 흐름과 세속적 맹세를 의미하기 위해 악용되는 것을 증오한다. 만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경박한 허사, 쌍두마차의 여행, 일류 요릿집에서의 식사 등으로 축복하고 비단 옷에 향수 냄새가 풍기는 사람들과의 친교보다 나는 농부와 대장장이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
우정은 생과 사의 모든 문제와 사건을 통해 도움과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평온한 날, 우아한 선물, 시골길을 산책하기에는 어울리며 또한 험악한 길과 상황, 난파, 빈곤과 박해에도 어울린다. 그것은 경구를 날리고 종교적인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도 친구가 되어 준다.
우정이란 대담히 진귀하고 고상한 성격이 필요하며 이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서로가 깊은 수양을 쌓고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또한 모든 상황이 그것을 가능할 수 있게 해 줄 필요성이 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한 사람이 듣고 있어야 하는데 세 사람은 가장 진지하고 철저해야 할 종류의 대화에는 빠져들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잇을 경우에는 단 두 명이서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나누는 진솔한 대화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개개인이 서로 자기중심적이 되며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 각자의 의식과 완전히 똑같은 의식을 가진 한 사람의 사회정신 속에 몰입되고 만다. 친구들끼리 서로 역성을 들고 형이 동생을 대하는 듯한 애착, 혹은 아내의 남편에 대한 맹목적 사랑 등을 드러내는 것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금물이다.
그럴 때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 단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의 바다를 누비고 있는 사람만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지 고민하는 것은 바로 친화력이다.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서로 따분할 뿐이며 서로의 잠재력 등은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를 잘 선택하라는 등의 말을 하지만, 친구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존경이 우정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친구는 매우 중요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 물론 친구 증에는 당신에게는 없는, 게다가 만약 그 친구를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하게 된다면 존경할 수 없게 되는 장점이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장점들에 여지를 두어야 한다. 그것들을 상승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친구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가장 고귀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짧고 모든 것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쾌락을 빨아들이는 것은 어린 남녀 아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우리는 어째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속에 침입해서 그들을 모독하려 하는가? 어째서 당신은 친구와 경솔한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려 하는가? 어째서 친구의 집을 방문하거나 친구의 어머니, 동생들을 알려고 하는가? 어째서 친구에게 자신의 집으로도 찾아오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것은 우리의 맹세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일까? 이렇게 손을 마주 잡거나 껴안는 행위는 금하는 것이 좋다. 본인에게 있어 친구는 하나의 영혼이어야 한다. 나는 친구로부터 소식, 생각, 성의 등은 바라지만 뉴스를 전해 받거나 죽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연을 천박하게 하지 말고 대자연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도록 하자.
친구는 자신에게 있어 영원히 길들일 수 없는, 진심으로 존경을 다해야 할 일종의 아름다운 적으로서 당장 필요 없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오팔의 색채나 다이아몬드의 빛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그것이 당신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편지는 친구가 쓸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한 나는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종의 영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함부로 모독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서로의 기가 맞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 사람의 집을 방문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당신에게서 빠르게 멀어지고 그의 참된 응시를 받기는 어렵다.
제 3장 자기 신뢰
1841년 출판된 <에세이 제 1집>의 1편
"Self- Relianc" in Essayas: First Series. 1841
자기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남몰래 깊이 생각하고 자신에게 있어 진리인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천부적인 재능이다. 몰래 감추고 있는 확신을 쏟아 내라, 그러면 그것이 만인의 견해가 된다. 왜냐하면 가장 내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장 외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최초 사상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의해 우리 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정신의 소리는 만인에게 친숙하지만 우리가 모세, 플라톤, 밀턴 등으로 귀착하게 해주는 가장 큰 공적은 그들이 책과 전통을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시인, 성자가 보여주는 천상의 광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빛나고 있는 미광을 발견하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내버리고 있다.
요셉이 매춘부의 손에 웃옷을 남기고 도망쳤던 것처럼 학설을 버리고 도망쳐야 한다.
어리석은 시종일관은 어린아이들의 신으로 싸구려 정치가, 철학자, 신학자들이 숭배하며 받들고 있다. 시종일관이라고 하는 것에 위대한 인물들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험한 말로 내뱉고 내일은 다시 내일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오해를 받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피타고라스도 오해를 밭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루터도,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도, 이 세상에 태어났던 순수하고 현명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다 오해를 받았다. 위대하다는 것은 항상 오해를 받게 마련이다.
나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본성을 침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용솟음치는 모든 의지는 그 사람의 본성의 법칙에 의해 완성된다. 그야말로 안데스 산과 히말라야 산의 돌출처럼 지구의 곡선 안에 있기만 한다면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행동이 설령 천차만별이라 할지라도 각각 그것이 행해질 때 정직하고 자연스럽기만 한다면 그것들의 일치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의지로부터 나왔을 때는 아무리 다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모든 행동은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다.
한 가지 경향이 그것들 전부를 통일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배가 항해를 할 때도 수많은 방향전환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우여곡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항로를 멀리서 바라본다면 모든 우여곡절도 평균적으로는 곧바르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진실 된 행동은 보기만 한다면 금방 그 본질을 알 수 있으며, 그 사람의 다른 진심에서 우러나 행동의 본질도 그로 인해 알 수 있다.
과거의 모든 덕행은 그 활력을 오늘날의 덕행을 위한 것이다. 사람의 꿈을 빼앗아가는 의회와 전쟁 영웅의 장엄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의 위대했던 세월과 승리의 의식으로부터 온 것이다.
명예는 그것이 순식간에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귀하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도 없애고 스파르타 군의 피리를 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절대로 아부를 하거나 사죄를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 위대한 인물이 우리 집에 식사를 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눈치를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내 눈치를 살피기를 바란다. 나는 여기서 인류를 대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물론 친절하게는 대하겠지만 꾸밈없이 대하고 싶다. 현대의 느낌이 좋은 범용의 초라한 만족감을 모욕하고 질책하여 습관과 사업과 소임의 얼굴에 모든 역사의 귀결인 진실, 즉 인간이 일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위대하고 책임 있는 사상가와 실천가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진정한 인간은 다른 어느 때와 장소에도 속하지 않은 만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주겠다.
시저라고 하는 한 인간이 태어나면 그 뒤로 몇 시대에 걸쳐 로마제국을 통치한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면 수백만의 인간이 그의 가르침을 따라 성장하고 그의 재능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의 덕행과 인간의 가능성을 혼동하고 있다. 제도는 한 사람의 긴 그림자에 불과하다.
생명만이 도움이 될 뿐, 살아온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힘은 멈추는 순간부터 효력이 사라진다. 힘이란 과거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이동하는 순간에 칸막이를 뛰어넘어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데 존재한다.
도시의 인형 같은 인간 백 명보다 가치가 있다.
인간은 신과 일체가 되자마자 구걸을 하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행동이 기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밭에 쭈그려 앉아 풀을 베고 있는 농부의 기도와 팔꿈치를 대고 노를 젓는 어부의 기도는 생활에 가까운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자연에 울려 퍼지는 참된 기도이다.
여행은 어리석은 자들의 음악이다. 단 한 번만 여행을 해보면 명소라는 곳이 얼마나 하찮은 곳인지 알 수 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나폴리와 로마의 정취에 취하고 자신의 슬픔을 모두 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트렁크에 짐을 채우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마친 뒤 바다를 건너 나폴리에 도착하게 되면 꿈에서 깨게 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도망친 냉엄한 현실, 그러나 전혀 변함이 없는 슬픈 자아만이 자신의 곁에 있지 않은가? 나는 바티칸을 찾아가 궁전을 돌아본다. 나는 경관과 추억에 젖은 척을 해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어딜 가든 나의 거인은 항상 나를 따라 다니고 있다.
흉내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자. 자기 자신의 운명이라면, 사람이 누구나 평생을 걸쳐 키어온 누적된 힘을 쏟아 부어 언제라도 이것을 피력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의 것을 빌려온 재능이라면 그것은 당장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세익스피어는 세익스피어의 연구를 한다고 해서 절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충실하게 해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소망이 너무나 크거나 대담해지는 일도 없다. 지금 현재 당신이 쏟아내야 하는 것은 페이디아스의 거대한 끝, 이집트인의 흙손, 모세와 단테의 펜이 호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웅대하며 그 모든 것들과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 무한히 풍부하고 웅장하며 수없이 많이 갈라져 있는 혀를 가진 성령이 같은 말을 내뱉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회는 절대로 진보할 수 없다. 한쪽에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다른 한쪽이 뒤처지고 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야만적이거나, 개화를 하거나, 기독교로 교화가 되거나, 풍요롭거나, 과학적이 되거나 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개선이라 부를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언가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면 낡은 본능을 잃게 된다.
문명은 마차를 선물했지만 다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팡이를 짚어야 할 만큼 다리 근육이 퇴화한 것이다. 훌륭한 제네바산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태양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능력은 잃고 말았다. 그리니치 항해력을 가지고 있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지와 동지에 둔감하다. 마찬가지로 적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1년 12달의 역曆을 일러줄 나침반이 그들의 마음속에는 더 잇아 존재하지 않는다.
수첩은 기억력을 떨어뜨리고, 도서관은 지력에 부담을 더하고, 보험회사는 사고를 늘어나게 하고 있다. 따라서 기계가 방해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세련된 정력이 어느 정도 떨어지지 않았는지, 국교와 하나의 의식으로서 보호를 받고 있는 기독교로 인해 삶 그 자체의 덕의 힘을 어느 정도 잃은 것은 아닌지와 같은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사회는 일종의 파도와도 같아 항상 앞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파도를 이루고 있는 물은 정작 움직이지 않는다. 같은 분자가 계곡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 통일성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해에는 죽고 그 체험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힘은 타고난 것이며 사람이 약한 것은 자신의 외부에, 혹은 자신과는 다른 곳에서 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무런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을 자기의 사상 속에 던질 수 있는 자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홀연히 일어서서 자신의 손과 발로 기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마치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이 물구나무를 서 있는 사람보다 강한 것과 같다.
제 4장 경험
1844년 출판된 <에세이 제 2집>의 1편
Experience" in Essays: Second Series. 1844
모든 순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을 때는 초라한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 어떤 배라도 우리가 그것을 타지 않았을 때는 낭만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타보면 우리가 탄 배에서 낭만은 사라지고 먼 수평선 위를 달리는 배들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저 언덕은 비옥한 목장이고 이웃집에는 풀이 잘 자라는 목초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밭은 그냥 흙만 있을 뿐이다.
어떤 그림이라도 한 번은 강한 인상을 남기지만 우리가 그 기쁨을 억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든 바퀴가 희색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돌려야 한다.
제 5장 비극적인 것
1844년 트랜센덴틀 클럽 기관지<다이얼>에 발표된 논문
The Tragic. 1844
고뇌의 집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우주의 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지구 표면의 3분의 1 이상을 짠 바다가 차지하고 있듯이 슬픔은 인간의 행복을 침투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 대부분은 회한과 불안의 혼합물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인간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의 바탕 색깔은 우울이다.
인간의 재난에는 독자적인 구제가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균형 상태를 취하길 바라고 있어 모든 종류의 확장을 싫어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안인 ‘시간’, 모든 변화를 풍성하게 가져다주는 ‘시간’은 우리의 눈에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의상과 새로운 도로를 제시하며 우리의 귀에 새로운 소리를 들려주고, 우리가 지금 막 흘린 눈물을 닦아 준다. 태풍으로 쓰러진 보리를 서풍이 다시 세워주고 헝클어진 머리처럼 풀들을 곱게 빗질해 주듯이, 우리의 어둡고 칙칙하고 쓰러진 사상의 밭에 상쾌한 바람처럼 ‘시간’을 불어넣는다.
우리 인간은 틀림없이 유연성이 뛰어나 여기서 특정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달려가 또 다른 만족을 얻고 그로 인해 메워나가려 한다. 혹은 물의 흐름과도 닮았다고 할 수 잇을 것이다. 하나의 제방으로 막으며 다른 곳의 제방을 넘어 범람하고, 모래든 진흙 위든 대리석 위든 간에 항상 자신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 6장 운명
1860년에 출판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1편
"Fate" in the Conduct of Life. 1860
미국은 천박하다는 오명을 듣고 있다. 위대한 인간과 국민은 어릿광대나 허풍장이였던 적이 없다. 그들은 인생의 공포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며 그 공포와 의연하게 맞서 싸울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조국을 자신들의 종교로 여겼으며 조국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터키인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에 자신의 운명이 철판에 새겨졌다고 여기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적의 칼날을 향해 돌진한다. 터키인,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은 미리 정해진 운명을 감수하고 받아들인다. 인도인들은 바퀴에 깔리더라도 태연자약하다.
우리는 이 세상이 가혹하고 냉정한 존재이며 남자든 여자든 간에 태연하게 물속에 빠뜨리고 인간이 탄 배를 종잇장처럼 삼켜버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추위는 우리의 피를 얼리고 우리의 발목을 잡으며 인간을 나무토막처럼 동결시켜버리고 만다. 병환, 지수화풍, 운명, 중력, 번개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귀뚜라미가 여름 내내 울어대다가 기온이 급ㄱ겨하게 떨어지면 조용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콜레라와 천연두는 갑작스러운 서리가 귀뚜라미의 목숨을 앗아가듯이 어떤 부족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대략적인 인상에 대해서는 머리가 나쁜 사람도 파악할 수 있는 듯하다. 마차를 끄는 마부들도 이런 점에서는 꽤나 골상학적으로 뛰어나서 상대의 얼굴을 보고 제 값을 치룰 지 말지의 여부를 판단한다. 잘 발달된 이마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고, 불룩 나온 배는 또 다른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다. 사시, 매부리코,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부색은 각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천적인 기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아니, 기질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슈푸르츠하임(1776~1832. 독일의 골상학자)과 케틀러(1796~1874. 벨기에의 수학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가지 성질(담즙질, 점액질, 우울질, 다혈질)에 대해 쓴 의학서적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아직 타인에게 말하지 않은 자신의 사상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검은 눈동자와 파란 snsedh자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생명으로부터 물려받은 한 방울의 검은 피를 자신의 혈관에서 제거해 버릴 수가 있겠는가?
인간은 어머니가 만들어 준 그대로의 존재이다. 조잡한 천 만 짤 수 있는 편물기에 대고 어째서 캐시미어를 짜지 못하냐고 추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관사에게 시를 추구하고, 일용잡부에게 화학적 발견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땅을 파는 인부에게 뉴턴의 법칙을 설명해 달라고 해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도 이처럼 삶의 방향이 다르다.
영국에는 돈도 있고 인맥도 상당히 넓은 사람이 건강 할 때는 항상 진보적 입장에 서지만 몸이 쇄약해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진보운동을 멈추고 무리에서 빠져나와 보수주의로 전향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모두 신체적인 결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과 천성 때문에 유약해지며 부모의 사치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절름ㅂ라이나 맹인과 같은 환자처럼 그저 자신을 지키려고만 한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씩씩한 사람, 개척지의 사람들, 뉴햄프셔의 건장한 사내들, 나폴레옹, 버크, 브로엄, 웹스터, 코슈트와 같은 사람들은 그 생명력이 쇄약해지고 힘이 꺽이기 전까지는 둘도 없는 애국자의 삶을 살았다.
가장 강력한 관념은 다수자들 속에서, 국민들 속에서, 가장 건강하고 강한 힘 속에서 구현된다. 아마도 선거는 체중에 의해 정해지는 것 같다. 도시의 휘그당 당원 100명과 민주당 당원 100명의 체중을 건초더미의 무게를 재듯이 수평 저울로 잰다면 어느 당이 선거에 이기게 될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잇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투표를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도시의 행정위원과 시장과 시의원을 저울에 올려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환경과 생명의 두 가지가 있다. 한때 우리는 적극적인 힘(생명)이야말로 전부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적극적인 힘이란 주변 상황이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베드퍼드 항구에 내려진 한 통의 비단조개 속에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다른 조개가 섞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 만 명의 말레이인과 회교도 속에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천문학적 두뇌를 가진 사람이 있다.
폭풍이 사납게 몰아칠 때 배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고통을 받으며 깊숙한 바다 속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들은 서로 잘난 척 얼굴을 바라보지만 상대를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혼자만이라도 떠 잇을 수 있다면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할 뿐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야 한다.
우리가 세속적으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하나의 요소로 우리에게 제약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제약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광폭하고 야만적인 존재라면 운명도 광폭하고 무서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세련됨에 따라서 우리를 저지하는 것도 고상해지게 된다. 우리가 정신적인 교양을 높이 쌓아간다면 적대적인 것도 정신적인 형태를 취한다.
북미 신화에 따르면 하늘의 신들이 팬리스 울프라는 늑대를 강철은 물론 큰 산으로도 제압이 불가능했을 때(늑대는 강철을 끊어버리고 산을 발로 걷어 차버렸다), 신들이 늑대의 다리에 명주실과 거미줄과 같은 부드럽고 가는 실을 감자 늑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늑대가 발버둥 칠수록 실은 더욱 단단히 조여졌다. 운명이라는 연결고리는 이와 마찬가지로 부드럽지만 견고한 것이다. ※ 운명에 대한 비유.
운명은 모든 곳에서 경계가 되고 제약이 된다. 그러나 운명에도 섬겨야 할 주인이 있고 제약에도 한계가 잇다. 위에서 보고, 아래서 보고, 옆에서 보고, 겉에서 볼 때, 운명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운명은 거대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힘 또한 거대하며 힘이라는 것은 이 거대한 이차원적인 세계에 있어 또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힘에 휩쓸려 이것을 제약으로 여긴다면, 힘은 운명에 휩쓸려 이것에 대항하게 된다. 우리는 운명을 박물지(일종의 백과사전)로 존중한다. 그러나 박물지 이상의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물건을 넣는 주머니, 복부와 신발, 방어막의 형태를 취하는 하나의 틀, 경멸스러운 짐이 아니다. 인간은 우주의 양끝을 끌어다 하나로 만든 경탄할 만한 대립인 것이다.
첫째, 그러나 운명과 맞서기 위해 운명으로 대처하는 것은 방어적 대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그 이상으로 고귀하고 창조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다.
운명이란 아직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기인한다. 물은 배와 선원들을 단숨에 삼켜버린다. 그러나 수영을 배우고 선체를 조종한다면 배를 삼켜버렸던 파도는 배에 의해 갈라지며 오히려 배를 수면 위의 거품처럼, 모자네 달린 깃털이나 고귀한 인간을 대하듯이 운반해 줄 것이다. 추위는 인간에게 배려를 하지 않고 피를 얼게 하여 인간을 이슬처럼 얼려버린다. 그러나 얼음을 지치는 법을 배운다면, 얼음은 인간에게 우아하고 즐거우며 시적인 운동을 선물해 준다.
증기는 얼마 전까지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악마였다. 인간인 도공이나 대장장이가 만들어 내는 냄비 뚜껑에는 반드시 구멍이 나 있다. 이것은 증기라고 하는 적을 밖으로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그러지 않으면 그 적은 냄비와 지붕을 뚫고 집을 날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그 사람의 성격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친구는 그의 매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의 실례를 찾아 헤로도토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이 그 실례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성격이 사건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 그 사건이란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분출되고,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사건은 성격과 함께 퍼져 나간다. 한때 완구들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거대한 조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의 성장은 그의 야심, 그의 친구, 그의 행동 속에서 명확하게 표현된다. 그는 운명의 한 조각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과관계의 단편- 그가 채워나가야 할 간격을 확실하게 채워나가듯이 조각을 맞춰나가는 모자이크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존재의 비밀을 푸는 열쇠, 운명과 자유와 예지처럼 오랜 옛날부터 존재했던 난문에 대한 해결은 단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이중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적인 천성과 공적인 천성이라는 두 마리 말을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서커스의 곡예사가 이 말에서 저 말로 가볍게 옮겨 타거나 한 발은 갑이라는 말 등에 다른 한 발은 을이라는 말의 등에 놓고 말을 타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운명의 희생양이 됐을 때, 다시 말해 허리에는 좌골신경통, 마음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발이 휘고 지상도 휘고, 무뚝뚝한 얼굴에 마음은 삭막하고, 거드름 피우며 걸어 다니며, 애정에는 쉽게 빠지고 같은 인간끼리의 악덕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다- 이런 때는 우주와 자신과의 관계에 의존해서 힘을 회복시켜야 한다. 심신의 파멸이 우주와의 관계를 험악하게 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마를 버리고 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신은 그의 고통을 통해 만인의 이익을 꾀하기 때문이다.p253
인간을 쓰러뜨리는 기질과 종족과 같은 방해물을 상쇄시키는 것에서는 이런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자연의 모든 곳에서 몰 수 잇는 두 개의 요소가 교묘하게 공존하기 때문에 인간을 불구로 만들거나 마비시켜버리는 것은 전부 다 이것을 봇아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좋은 의도는 갑자기 힘이라는 옷을 걸치게 된다. 신이 타고 달리려고 하면 나무토막이나 자갈도 날개와 다리 나와 신을 타고 달리는 말이 된다.
자연과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하나로 녹여내고 온갖 원자를 통해 불문곡직하고 위대한 우주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하는 ‘성스러운 통일’의 앞에 제단을 쌓도록 하자. 눈발과 조개껍데기와 여름의 풍경, 별들의 아름다움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 우주를 발밑에 복종시키는 아름다운 필연이야말로 경탄스러운 것이다. 모든 것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또한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무지개와 지평선의 곡선과 창공의 아치는 인간의 눈 조직에서 탄생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탄할 사실인 것이다. 밖을 보면 자연의 화려함과 우아함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게 될 때, 어리석은 호사가가 나와 동반해서 화원과 태양빛에 물들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구름과 폭포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는 데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면의 필연이 혼돈의 이마 위에 아름다운 장미를 심고 자연의 심오한 의도가 조화와 환희라는 것을 드러낼 때, 여기저기서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움의 빚줄기는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필연 앞에 제단을 세우도록 하자. 모든 것은 하나의 것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원고와 피고, 적과 동료, 동물과 혹성,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이것은 단 한 가지 종류라는 것을 보증할 필요가 있다. 천문학은 광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은 태양계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질학은 장대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을 지배한 법칙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어째서 우리는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자연이란 철학과 신학이 구체화된 것에 지나지 않은가? 어째서 우리는 광폭한 지수화풍에 깎여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우리는 이것들과 똑같은 원소로 만들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아름다움의 필연 앞에 제단을 세우도록 하자. 인간은 이미 정해진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정해지지 않은 위험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에게 그것을 믿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 아름다움의 필연인 것이다. 어떤 때는 거칠게, 어떤 때는 부드럽게 인간을 가르치며 이 세상에 우연은 절대로 없다는 것, 위대한 법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필연인 것이다. 이 법칙은 예지능력이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예지 그 자체이며, 인격적이지도 비인격적이지도 않으며, 말을 모멸하고 인간의 깨달음을 초월한다. 개개의 인간을 하나로 녹여 자연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마음이 맑은 사람에게 그것이 가진 전능의 힘에 의지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제 7장 힘
1860년에 출판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1편
"Power" in The Conduct of Life. 1860
어떤 말(馬)의 비약 능력은 체내에 있지만 다른 말의 비약 능력은 채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갑의 인간 속에는 이와 같은 등정적인 힘이 있지만, 을의 인간에는 그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활동적인 성격과 수동적인 성격이 있지만,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보다 깊이 있고 중요한 정신적 의미에 있어서의 성격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남녀 모두에게 창의력이 풍부한 창조적인 무리와 창조력이 약하고 수동적인 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활달한 인간은 각각 자신이 속한 무리를 대표한다. 그리고 그 인간이 우연히 개인적으로 더 뛰어난 것을 갖추고 있다면(이것은 재능의 많음을 읨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병사, 혹은 한 교사가 가진 개성의 강한 눈, 아니면 타인을 복종시키는 눈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다.)매우 간단하게 타인의 질시나 저항을 받지 않고 그의 협력자와 지지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흉증에 억누르고 있는 그의 권리를 용인하는 것이다. 상인은 부자와 출납을 담당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일을 하고, 법률가의 근거로 삼는 판례는 그의 사무실에 있는 조수가 찾아낸 것이며, 지질학자의 보고는 그 조수의 측량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 윌크스 제독(1801~1877)은 자신이 세운 탐험에 참가한 모든 박물학자들이 모은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토르발센(1770~1844. 덴마크 조각가)의 조각상은 석공들의 손에 의해 완성됐으며, 뒤마(1802~1870. 프랑스 소설가)는 조수를 많이 두고 있었으며, 셰익스피어는 극장의 매니저로 다른 각본을 이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의 노력을 이용했다.
학교에 새로운 학생이 들어올 때, 혹은 누군가가 여행을 하면서 매일 모르는 사람들과 만날 때, 혹은 오래된 클럽에 신입회원이 들어 와서 익숙해 질 때, 그럴 때는 많은 소를 키우고 있는 우리나 목장에 한 마리의 새로운 소를 넣었을 때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있던 소들 중에서 가장 뿔이 강한 소와 신참 소 사이에서 순식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되고 누가 대장이 될지를 결정한다. 사람의 경우에도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역량의 비교가 이루어진 뒤 나중에 두 사람이 대면하게 되면 반드시 한 쪽이 복종을 하게 된다. 두 사람 다 상대의 눈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어낸다. 약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목적에 대해 깨닫지 못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가 알고 있는 것 모두가 마치 과녁에서 빗나간 것 같지만 상대의 화살은 정확하게 과녁을 꿰뚫는다. 그러나 그가 백과사전처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마음의 평정과 침착한 태도의 문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는 태양과 바람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발사할 때마다 무기와 과녁을 선택한다. 그리고 누군가 다른 상대와 싸울 때마다 그가 쏜 화살은 정확히 날아가 과녁에 명중한다.
국가 재정에 빌붙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기적인 무리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거대한 동물은 기생충을 먹여 살리고 있다.
아칸소 주와 오리건 주, 유타 주의 주민들이 선출해서 자신들의 분노와 가난을 대변하게 하기 위해 반은 웅변가 반은 자객의 심정으로 워싱턴으로 보낸 대리인들.
리버풀로 향하는 우편선의 선원 중에 말레이인 요리사는 질풍이 불어오면 “자아, 불어라. 더 세차게 불어라.”라고 소리치면서 희열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런 사람의 친구와 부모는 그들의 폭발적인 성질을 발산시킬 배출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왁자지껄한 것을 좋아하며 국내에 잇을 때는 오명만을 남길 사람들도 멕시코로 보내면 국민들의 영광이 되고 영웅이라 불리는 장군이 되어 귀국한다.
넘쳐나는 정력은 개인의 생활과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역사 전반에 있어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강인한 민족과 개인은 결국 자연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자연의 힘은 미개인들에게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그들은 주변의 들짐승들처럼 자연의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것이다.
얼음이 소중한 것은 열대제국과 한여름 날이다. 불의 존재가 고마운 것은 난로 t고에서 작은 불길을 일으키고 잇을 때이다. 전기가 고마운 것은 먹구름에서 내리치는 번개가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선을 타고 흐르는 전류이다. 정신의 힘과 정력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도덕적인 문명인 속에 그것이 존재할 때 태평양의 식인종과 마찬가지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두개골 속에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힘이 감춰져 있었다. 아일라우(나폴레옹 군과 러시아 군과의 결전지)에서는 그의 휘하의 군대 6만 명 중에 약 3만 명까지는 두둑과 강도들의 무리였다고 한다. 이런 무리들은 평화로운 사회에서는 족쇄를 차고 감옥에 들어가 간수들의 삼엄한 감시를 당해야 할 인간들이었지만, 나폴레옹은 그들을 맨손으로 상대해서 군에 입대를 시키고 그들의 총검 덕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미켈란제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릴 때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프레스코화법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서자 바티칸 rdn전의 뒤편에 있는 교황의 정원으로 가 삽으로 적토와 황토를 파내서 그것을 아교와 물과 수없이 배합을 해 본 뒤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자 사다리에 올라 일주일, 그리고 한 달 시간을 더해가며 부당과 예언자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미완성으로 끝낸 그림이 한 점도 없었다. 그의 인물 묘사방법은, 일단 골격을 그린 다음 살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옷을 입혀 나가는 방식이었다.
성공이라는 것은 이렇게 반드시 특정의 적극적인 힘에 의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일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 것은 버려야 한다.
일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결심한 모든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영감이 아니라 필요가 그의 시상을 눈뜨게 해주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전쟁에 있어서도, 상업에 있어서도,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힘의 비밀은 집중에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발견을 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뉴턴이 대답한 말은 아주 귀중한 일화가 되었다. 그는 “항상 내 마음을 그것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침착함을 갖춘 사람은 똑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게으르고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람 10명을 합쳐도 따라올 수가 없다.
선천적인 천성을 대신 할 수 있는 두 번째 것은 훈련, 다시 말해 습관과 일정한 일이 가진 힘이다. 빌려 타는 말은 아라비아 종의 준마보다 평소에 타고 다니기에 좋다.
위대한 웅변가는 모두 처음에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제 8장 부(富)
1860년에 출판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1편
"Fate" inThe Conduct of Life. 1860
부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튼튼한 지붕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는 이러한 필수품에서 시작된다.
부는 먹고 사는 집뿐만이 아니라 도시의 자유, 대지의 자유, 여행, 기계, 과학이 가져다 주는 온갖 이익, 음악, 미술, 최상의 교양과 최상의 친구를 얻는 것을 추구한다.
부자는 어디서든 준비를 하고 있고 어디에 있든 집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라고 사디(페르시아 시인)는 말했다. 부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섭취하여 인간의 생활의 일부로 만든다. 도시는 물론 시골, 해변도, 극서부도, 유럽에 있는 고대 사람들의 성곽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그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포함되어 있다. 세계는 그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진 사람들의 소유물에 불과하다. 부자가 항구에 찾아오면 장려한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를 위해 거친 대서양 위에 융단을 깔고 폭풍우가 치는 대서양 한 복판을 호화스런 호텔로 바꾸어 버린다.
목사나 신문 잡지들은 부자에 대한 갈망을 비난하는 어리석고 부질없는 말들만 떠들어댄다. 글러나 만약 사람들이 이런 도덕군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자가 되는 꿈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들은 갑작스럽게 민중들 속에서 들끓는 이 권력에 대한 사람의 불씨를,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또다시 들끓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은 멸망해 버린다.
부는 부를 관리할 수 있는 자만이 소유해야 한다. 쌓아놓고 숨기기만 하는 사람,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지처럼 사는 사람은 부자라고 부를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나눠주고 인류를 위해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부를 소유해야 한다.
현실적인 사람은 외관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자부심은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의 존속을 허락하지 않고 모든 악덕을 근절해 준다. 그러므로 허영심을 자부심으로 바꾸는 것은 매우 큰 이득이 된다. 자부심은 하인을 두지 않더라도, 훌륭한 옷을 입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방이 두 개밖에 없는 집에서 살면서 감자와 콩과 저린 옥수수를 먹으며 밭일을 하고, 걸어서 여행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귀면서도 훌륭한 거실에서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조용히 앉아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그러나 허영심은 돈과 노력과 말과 남자와 여자와 건강과 평화를 필요로 하지만 결국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아 마치 목적지가 없이 먼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 한 하기 결점이 있다면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이며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온화하고 순응적이다.
예술은 질투심이 깊은 여주인이다. 어떤 사람이 회화와 시, 음악과 건축, 철학 등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낭비벽이 심하며 가족들에게 생활의 불편을 끼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초라하게 하고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자신을 무력화하게 만들어버리는 의무로 자신의 몸을 얽매어서는 안 된다.
2년 전에 뉴잉글랜드 지방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풍조가 있었다. 농부가 돼서 경작과 지적인 연구를 종합적으로 하려는 열렬한 바람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겼으며 실험을 통해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농부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사람들이 학문과 스스로 땅을 일구며 경작하는 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신앙을 포기하고 말았다.
창백한 얼굴의 학자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확고한 의지로 책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며 정원을 거닐면서 자신의 사상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실험을 했다. 정원을 걷다보니 밭에서 무성한 잡초들이 옥수수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몸을 숙여 잡초를 뽑는다. 그러자 앞쪽에 잡초가 두 개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세 개가 더 보인다~~~결국은 자신의 어리석은 몽상에서 깨어나 그날 아침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렇게 철석같이 결심을 했는데 결국은 고작해야 민들레에 당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정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매달 신문에서 접하는 무시무시한 기계와 닮았다. 그 기계는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팔과 다리와 전신을 칭칭 감아 저항할 수 없는 파멸로 그를 몰아넣는다. ~~~인간이 토지를 소유하고 시간이 지나게 되면 결국 토지가 인간을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된 다음에 인간은 집을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여행자나 인디언은 물소가 지나간 흔적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잘 알고 있다. 그 흔적은 반드시 산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도크 스퀘어나 밀크 스트리트라는 곳에 사는 시민이 처음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땅을 살 경우. 그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서제에서 서쪽 방향의 전망을 맘껏 볼 수 있으며 불루힐과 와추셋 산 정상과 그 위로 저부는 노을을 매일 바라볼 수 있다. 고작해야 30에이커의 땅, 1500달러의 돈으로 이런 장려한 전망을 바라볼 수 있으니 5만 달러라도 아깝지 않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당장 지어야 할 집의 초석을 정한다. 우물을 만드는 석공은 40피트는 파내려가야 한다고 한다. 빵집은 빵을 배달하기 위해 이런 집들의 문 앞까지 차를 몰고 갈 수 없다고 한다. 옆집 남자는 창고 자리에 대해 현실적인 입장에서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해서 도시에서 온 남자는 전에 살던 농부가 햇빛과 통풍과 우물과 하수도를 고려하고, 목장과 정원과 밭으로 가는 도로의 편의성을 고려해서 적당한 장소에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도크 스퀘어에서 온 사람은 양보해서 모든 것을 흐름에 맡기게 된다.
제 9장 수상여록
1860년에 출판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1편
"Considerations by the Way" in The Conduct of Life. 1860
귀가 따가울 정도로 남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천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은 이생이란 설교의 제목이라기보다는 경이적인 대상이라고 해야 한다.
세상에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세 가지가 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부자의 욕망, 다른 것을 바라는 환자의 욕망, “이곳이 아닌 어디 다른 곳을.”이라는 여행자의 욕망이다.
제10장 환상
1860년 출판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1편
"Lilusion" in The Conduct of Life. 1860
제11장 일과 일상
1870년 출판된 <사회와 고독> 속의 한 편
"Works and Days" in Society ans Solitude. 1870
뛰어난 측량사는 16로트의 거리를 그저 걷기만 해도 다른 사람이 줄자로 재는 것보다도 훨씬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인디언과 돌팔매 달인이 눈과 손의 감각만으로 돌을 과녁에 맞추고, 나무꾼이나 목수가 통나무 위에 가늘게 그은 선에 도끼질을 하는 것도 이런 예이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해안에 금작화를 심어 바다와 맞서고, 소나무 숲을 좃어해 모래바람 몰아치는 불모의 땅과 맞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
내 토지에 인접한 땅을 전부 갖고 싶다 고 한 농부가 말했다. 마찬가지 욕심을 품고 있던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프랑스 영의 호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는 훨씬 더 영토 확장에 대한 욕심으로 불타고 있어서 태평양을 자신들의 바다라고 부르길 원했다. ~~~하루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부자인 것이다. 국왕도, 부자도, 요정도, 악마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일상은 멀리 있는 친구들이 보낸 복면을 쓴 사람처럼 왔다가 다시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선물을 가지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날들은 인간 정신에 자신을 맞추어 아름다운 옷처럼 정신을 감싸며 정신의 모든 생각들을 그 안에 감싼다.
어떤 작가의 책은 겨울에 읽기 좋고, 또 어떤 작가의 책은 삼복더위에 읽기에 알맞다.
과거를 세로 줄로 하고 미래를 가로 줄로 삼는 직물기 위에서 일상을 짜인다.
하루하루가 1년 내내 최고의 날이라고 하는 것을 e아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 하루하루가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당신은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수상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고 방문하는 것이 예로부터 신들의 비밀인 것이다. 황금과 보석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치장하고 찾아오는 자는 저속한 사기꾼에 불과하다.
진정한 군주는 자신의 왕관은 옷 속에 감추고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꾸민다. 우리의 선조가 전해 준 북유럽의 전설에 의하면 오딘(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사 신족의 최고 신)은 어부의 초라한 오두막에 살며 작은 배를 수선하고 있었다. 인도의 전설에서는 하리(비슈누 신의 별칭)는 일반 백성으로 밳어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리스의 전설에 따르면 아폴로는 아드메토스(그리스 신화에서 테살리아 페라이의 왕 페레스의 아들)의 양치기들과 함께 기거했고, 유피테르(주피터)는 스스로 가난한 에티오피아인들과 함께 시골에서 살았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예수는 구유에서 태어났고 그의 12제자는 어부였다. ~~~요정학의 전설에 의하면 가장 힘 센 요정은 몸집이 제일 작다는 사실은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지켜야 할 법칙이 되었다. ~~~기독교적 미덕에서는 겸손이 모든 것 중에 최고의 위치에 있으며, 이것은 성모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다.
수많은 동물이 똑같은 접시 위의 음식을 먹더라도 각각 자신의 신체조직에 따라 시간이든 공ㄱ나이든, 빛이든 물이든, 음식이든 간에 자신에게 속한 것만을 수많은 원소로부터 동화시킨다. 뱀은 목장에서 얻은 음식으로 점점 뱀으로 변하고, 여우는 무엇이든 여우로 바꾸며, 피터와 존은 모든 것들을 혼합시켜 피터와 존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사의한 것으로 묘한 음색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완벽한 시간을 통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우리가 그것을 분석하지 않을 때만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은 하루를 소중하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 자신이 하루가 되어 결코 대학 교수처럼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된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비밀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고 따뜻한 배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의 상태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이것을 명사와 동사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좀 더 점잖고 순종하는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침이라는 것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걸까?
섬에 사는 미개인들은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큰 파도를 타고 뭍으로 돌아오면 다시 헤엄을 쳐서 바다로 나간다. 이렇게 몇 시간이고 유쾌하게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이라는 것도 파도에 몸을 맡기는 연속이다. 무언가에 몸을 맡기지 않고서는 위대한 것이 탄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천문학이라는 놈이 감시를 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 달과 별을 바라보면 달과 별이 자신이 한 일의 양을 측정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만났을 때보다 얼마나 진척이 있었나요? 몇 페이지 진척이 있었나요? 하고 묻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지금 말한 것처럼 섬에서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 섬에서는 하루하루가 완전히 다른데, 그날들은 단 한 가지에 대한 완벽한 사랑이라는 것으로 결합되어 있다. 단 1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아아, 신이시여, 이 1시간을 충실하게 해 주소서. 내가 이것을 끝냈을 때 보라. 내 생애의 일각은 사라지고 한탄스러운 것이 아니라 1시간을 참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게 하소서.
노래하는 사람이 의무감이나 도망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래한 것이라면 그런 노래는 필요하지 않다. 잠들려 하지 않으려는 자만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글을 쓰고 이야기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는 자만이 가장 좋은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시간에서 그 환상을 벗겨내고 하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할 때, 우리에게 있어서 ‘순간’이라는 것의 특정이 문제가 되고, 시간의 길이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깊이이지 생활의 표면적인 넓이는 절대 아니다. 우리는 영원으로 돌입해 간다. 시간이란 영원히 변천해 가는 표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거기에 사상의 속도가 더해진다면, 사상의 힘이 조금일도 늘어난다면, 인생은 거대한 길이를 가진 것처럼 보일 것이며 실재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시간이라 부르고 있지만 사상의 가속도와 그 변화가 효과를 불러일으킬 때, 그것은(영원이라는) 보다 높은 명칭으로 불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제12장 정치에 대하여
1844년 출간된 ' 에세이 제 2집'의 1편
"Politics in Essayas: Second Series:1844
[Review]
지난 대선에서 정당 대표가 대선후보 수락 연설문 일부분이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인용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다. 또, 전직 대통령이 비선 실세였던 여인과 국정을 협의하고 또 연설문 원고를 보여주었다는 일로 엄중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이번에 국민의 힘 대표로 선출된 젊은 정치인은 수락 연설에서 모 가수의 노래 가사를 일부분 인용했지만, 국민들은 그게 바로 젊은 정치인의 매력이라고 너그럽게 넘겨버렸다. 같은 말이나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단호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다.
이에 대해서 ‘로버트 차 알디’는 그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에 따라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재판과정에서 피의자의 외모에 따라 판정을 그르칠 수 있는데, 판사는 범죄를 외모와 연결해서 생각함으로 예쁜 여자는 유리한 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소위 ’네가티브‘는 대중에게 불신을 당하면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에머슨(1803~1882)은 오늘날 미국의 지성과 정신적 품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사상과 언어적 표현은 탁월하다. 그의 말은 수많은 문학 서적 속에서 인용돼왔고, 유명 인사들의 연설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글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1804∼1864), ‘헨리 데이빗 소로(1817~1862)’ 등과 함께 한때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을 끼친 초월주의를 주창했으며, ‘소로우’는 에머슨의 권유에 따라 일기를 쓰며 문학인의 길에 들어섰고,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진 <월든>이 탄생한 월든 호숫가에서의 3년은 에머슨이 장소를 제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의 대통령연설이나 회담 내용을 귀담아듣다 보면 내용보다는 언어의 구사력에서 세련되고 멋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어 그때마다 잔잔한 감동이 온다. 장황하게 업적이나 자랑하는 우리 내 연설문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책 표지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애독서”라는 표시를 붙여놓았다.
매력적인 것은 모양도 중요하지만 매력적인 말의 구사에 있다. 이때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삶의 현장에서 신물이 나도록 접하는 실용주의 언어로는 어느 정도 진실은 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감동을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비록 한 시대 전의 책이지만 매력적인 언어가 가득 들어 있는 책이다. 사랑, 우정, 자기 신뢰, 경험, 운명 등 열두 편의 주옥같은 글들이 실려 있다.
현실 세계의 유한성을 부정하는 ‘초월주의’는 그 후 산업자본주의 물결과 함께 일어난 실용주의에 의해 빛이 바래지고 사라져 갔지만 문학적 유산은 아직도 소중한 것으로 남아있어, 현실의 삶 속에 메마르고 갈증을 느낄 때 두고 읽으면 심신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청소년들이 탐독해야 할 책이며 노년에게도 어느 정도 품위를 위한 도구로도 유익하다고 본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심정으로 언어를 다시 배우는 심정으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본문>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북풍과 같이 마음을 차갑게 하는 이기심이 얼마나 크던 간에, 전 인류의 대가족은 일종의 미묘한 에테르와 같은 사랑의 물에 촉촉하게 젖어 있다. 말을 걸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존중하고 있으며 그것들 또한 우리를 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은 때와 장소에서 만나고 있단 말인가!”(우정)
“자기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남몰래 깊이 생각하고 자신에게 있어 진리인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천부적인 재능이다. 몰래 감추고 있는 확신을 쏟아 내라, 그러면 그것이 만인의 견해가 된다. 왜냐하면 가장 내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장 외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최초 사상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의해 우리 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정)
"고뇌의 집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우주의 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지구 표면의 3분의 1 이상을 짠 바다가 차지하고 있듯이 슬픔은 인간의 행복을 침투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 대부분은 회한과 불안의 혼합물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인간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의 바탕 색깔은 우울이다."(비극적인 것)
“정신의 소리는 만인에게 친숙하지만 우리가 모세, 플라톤, 밀턴 등으로 귀착하게 해주는 가장 큰 공적은 그들이 책과 전통을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시인, 성자가 보여주는 천상의 광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빛나고 있는 미광을 발견하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내버리고 있다.”(자기 신뢰)
“인간존재의 비밀을 푸는 열쇠, 운명과 자유와 예지처럼 오랜 옛날부터 존재했던 난문에 대한 해결은 단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이중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적인 천성과 공적인 천성이라는 두 마리 말을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서커스의 곡예사가 이 말에서 저 말로 가볍게 옮겨 타거나 한 발은 갑이라는 말 등에 다른 한 발은 을이라는 말의 등에 놓고 말을 타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운명의 희생양이 됐을 때, 다시 말해 허리에는 좌골신경통, 마음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발이 휘고 지상도 휘고, 무뚝뚝한 얼굴에 마음은 삭막하고, 거드름 피우며 걸어 다니며, 애정에는 쉽게 빠지고 같은 인간끼리의 악덕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다― 이런 때는 우주와 자신과의 관계에 의존해서 힘을 회복시켜야 한다. 심신의 파멸이 우주와의 관계를 험악하게 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마를 버리고 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신은 그의 고통을 통해 만인의 이익을 꾀하기 때문이다.”(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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