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우리 토종소 '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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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있는 우리 전통소인 칡소를 10여년째 지켜나가는 경남 고성군 회화면의 축산농 이창섭(38)씨. 자신이 기르고 있는 칡소 20여마리중 한마리를 쓰다듬고 있다. 칡소는 머리와 온몸에 칡덩굴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토종소였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줄어 현재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연합뉴스
1448(조선 세종 30) <동국정운> 반포
1895(조선 고종 32) 음력 폐지하고 양력 사용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505년 1월 1일로 함
1905 을사보호조약 체결 조인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정부대신이라는 자는 자기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어 4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년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명을 모두 남의 노예 노릇을 하게 하였다.... 동포여!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2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 이래 4천년의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끝나고 밀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장지연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시일야방성대곡>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은 마음대로 조약 체결이 안되자 고종 황제의 허가 없이 거짓 날인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공표했다.
1906 위정척사 사상가 최익현 대마도에서 세상 떠남 을사 조약에 반대하다가 대마도로 끌려갔던 최익현 선생이 7월 13일 단식을 시작한지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1932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세상 떠남 독립군, 쌍성보 일본군 공격, 섬멸시켜 대승 거둠
1954 한미경제협정 조인. 공정환율 180대 1
1962 일본서 반환한 문화재 152점 공개
1980 작곡가 이흥열 세상 떠남 1984 전남 신안군 근해서 굴 채취선 영암호 정원초과로 침몰. 12명 사망 1985 일본 야마구치현 도요우라앞 1㎞해상서 화물선 침몰. 10명 사망, 실종 1986 김일성 피격사망설 발표됨 1987 캐나다 동부 세인트존스 해역서 한국인 선원 33명 태운 배 침몰 온두라스의 그로브수산회사 소속 트롤어선 호산나1호. 12명 사망, 2명 실종 1989 한국과 체코 상공회의소, 업무협력의정서에 조인 무역사무소 교환개설을 포함
1994 김영삼 대통령, 시드니에서 세계화구상 발표 1997 대북수해복구장비 북송
1858 영국의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1771-1858) 세상 떠남 "당신과 나를 제외하고 세계가 모두 이상하다. 아니, 당신조차 약간 이상스럽다."
1869 수에즈 운하 개통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동북부의 수에즈 지협에 건설된 수로식 운하. 홍해와 지중해를 직접 연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장 가까운 항로이다. 프랑스 외교관 레셉스가 이집트 왕 사이드 파샤를 설득하여 시작한 이 공사는 1854년부터 1869년까지 16년이 걸렸다.
1887 영국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 태어남 제2차 세계대전시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서 롬멜 부대 격파
1917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세상 떠남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 청동시대, 칼레의 시민
1969 미국과 소련간의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헬싱키서 개막
1970 소련 무인우주선 루나 17호, 달에 착륙 1971 태국에 친위 쿠데타, 타놈 총리 전권 장악 군정 실시
1999 200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역시 매서운 새벽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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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체결 1905. 11. 17
 을사조약 체결 축하 기념촬영을 하는 일본군 장성 및 일본 공사관들 |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한일협상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해가 간지로 을사년이었기 때문에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통치권을 구체화하기 위해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했다. 이토는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출하여 체결을 강요하는 한편 대신들과 원로대신들을 숙소로 납치하여 조약체결을 강권했다. 11월 17일 일본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가운데 군신회의를 개최했지만 조약거부로 결정이 났다. 일본인들은 대신들에게 개별적으로 찬성여부를 물었고 한규설·민영기·이하영 등은 반대했으나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토는 찬동한 5대신(을사5적)만으로 회의를 재개해 '한일협상조약' 을 강제 체결했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승인 없이 불법적으로 체결·처리된 이 조약에 의해 외교권을 발탁당했으며 이어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급기야 일제에 합병되었다. |
젱어, 명예훼손죄로 구속 1734. 11. 17
1734년 11월 17일 <뉴욕 위클리 저널 New York Weekly Journal>의 발행인 존 피터 젱어가 명예훼손죄로 구속되었다. 1697년 독일에서 태어나 13세에 뉴욕 시로 이민 온 젱어는 중앙 식민지 지역의 개척 인쇄업자 밑에서 8년 동안 견습생활을 한 후 1726년 인쇄소를 시작했다. 1733년 11월 5일 젱어는 당시 식민지 총독 윌리엄 코즈비의 정책을 반대하던 주민들 모임의 정치적 기관지 <뉴욕 위클리 저널>을 창간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학식이 뛰어난 동료들이 썼고 젱어는 법적인 발행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다. 코즈비를 통렬히 공격하던 <뉴욕 위클리 저널>의 발행인으로서 젱어는 1734년 명예훼손죄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러나 젱어는 1735년 최종 공판에서 무죄 석방되어 북아메리카가 영국 식민지에서 거둔 언론 자유를 위한 첫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변호를 맡은 앤드루 해밀턴은 기사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판결 권한은 배심원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며, 식민지 배심원들은 젱어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 점은 이후 명예훼손 소송사건에서 핵심적인 고려 대상이 되었다. 젱어는 그후 뉴욕과 뉴저지 2곳에서 공공 인쇄업자로 일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