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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우리가 지난 주일 저녁에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과거 선민 이스라엘 집에 베풀었던 은총에 대하여 회상했던 것을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고난 중에 있는 그들의 환난에 동참하셨으며, 천사와 여호와의 사자 곧 우리 주님을 보내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그들을 대우하셨으며, 그들을 독수리가 그 새끼를 날개로 받아 나르듯, 그들을 광야 사십 년 동안 드시고 안으셨음을 회상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63장 10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주의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을 근심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을 근심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셔서 그들을 친히 치셨다고 여기서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은혜를 기억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하였던 큰 과오와 범죄, 그로 인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책망과 심판을 빼놓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이렇게 한 줄로써 슬픈 아픔의 과거 역사를 요약하여 회상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건져진 후에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성막 안 지성소에 계셨으며, 하나님의 종 모세와 칠십 인 장로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여러 일꾼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성막과 성막의 제사에 쓰이는 여러 기구들을 잘 만들 수 있는 지혜와 재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성령이 이스라엘 백성과 사십 년을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지도하며 보호하며 가르치며 이끄셨는데, 그들은 늘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거스르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밝힌 바처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사 그들을 치시곤 하셨습니다. 시편 78:40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게 함이 몇 번인가”
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노엽게 하였던 일들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그들이 성민 언약을 엄숙하게 체결한 직후에 벌인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을 우선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자주 그들이 범했던 원망 불평의 죄가 성령을 근심케 하고 노엽게 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거스려서 스스로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 없이 왕노릇하려고 반역을 꾀했던 일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이 감사하는 대신에 탐욕을 부렸던 일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보낸 가나안 땅 정탐꾼들이 보고했을 때에 그들이 보여주었던 그 무서울 정도의 불신앙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 약속의 땅에 자기들을 들일 수 없노라고, 자기들은 다 죽을 것이니 모세 대신에 장관 한 사람 다시 세워서 종살이하던 애굽 땅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부르짖으면서, 밤을 새우면서 울고 불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분노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돌을 던져 치려고 하였던 그들의 불신앙은 성령을 심히 노엽게 하였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에도 바알브올 우상에게 절하고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과 음행을 벌인 일도 성령을 노엽게 하고 슬프게 하고 근심하게 하신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 후에도 선민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으니,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계속하여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잔존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지 아니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그들과 통혼하면서 함께 지내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켰으니,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도 이웃 나라들이 와서 그들을 쳐서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그처럼 성령을 근심시키기를 거듭함으로 인하여 결국 성령이 이스라엘을 잠시 성전에서 떠나버리십니다. 그것이 에스겔서 8장에서 10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을 성령께서 환상 중에 머리카락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와서 성전을 보여주는데, 그 성전 안에는 온갖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에 계시던 여호와의 영광이 결국 성전 문지방을 넘어 동편 성문 문을 지나 성벽 위로 올라 동편 감람산에 머물다가 완전히 떠나시는 환상을 선지자 에스겔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곧 바벨론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의 모든 성벽과 성전, 궁궐, 집들을 다 파괴하고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끌어가고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이처럼 계속하여 슬프게, 하고 노엽게 하고 근심하게 할진대 결국 성령께서 그들을 버리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경우에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사기 시대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임재하여 사사의 사명을 감동하도록 쓰신 평생 나실인 삼손의 경우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를 감동하여 블레셋과 접촉 과정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 때마다 성령께서 그를 충동질을 해서 블레셋의 힘을 빼고 그들의 장정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제압하도록 삼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거슬러서 계속하여 나실인의 서약을 어기고 시체를 가까이 하기도 하고 포도주를 마시기도 하고 부정한 여인들과 방탕한 삶을 지속하였습니다. 들릴라라는 요망한 여인이 많은 돈을 주겠다는 블레셋 왕들의 말을 듣고는 자기를 열애하는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집요하는데도 그녀를 끊지 못하고 계속 그 여인을 사랑하여 있다가 결국 자기 힘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 무릎에 뉘어 잠을 자다가 머리카락을 잘려져서 힘을 잃어버리고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몸이 결박된 채 감옥에 갇혀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그토록 오랫동안 성령을 근심시키고 슬프게 한 대가를 그렇게 비쌌던 것입니다.
사울 왕도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부었을 때에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암몬 왕 나하스와의 전쟁 때에도 담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이끌어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 사무엘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기 이로운 대로 행동하고 맙니다. 그 결과 그의 몸에 계신 성령께서 떠나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떠난 그 심령 가운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악령이 찾아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렇듯 한 때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성령의 사람도 만약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면 성령께서 떠나가시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만 볼 때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곤 하는 것 같습니다.
한 때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크게 쓰임을 받았던 박태선 장로는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후에 자기가 교주가 되어 예수님을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단 괴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기동 목사도 초창기에 병고치는 은사를 받아 많은 사람을 고쳤으나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 신학을 만들더니 결국 변질되고 그의 말년에 성적 부도덕에 사로잡혀 무너지고 교회에서 내쫓기는 출교 처분을 받는 비참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왜 이렇게 변질되고 추락하는가요? 미국의 신유 사역자 중에 캐더린 쿨만의 후계자로 손꼽혔던 베니 힌이라는 신유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고 그의 책들과 집회는 대단한 인기를 누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형편 없는 처지로 전락한 것으로 평가되곤 합니다.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한 부자이지만 그는 어린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집착하는 자라고 그 아내가 밝히고 그를 떠났습니다. 결국 영적으로 크게 쓰임받는 자들에게 마귀는 그만큼 더 강력한 공격을 하여 결국 이렇게 넘어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크게 쓰임받았다 하더라도 깨어 기도하며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가도록 몸부림치지 아니하면 결국 이처럼 추락의 길로 누구라도 미끄러질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잘못을 범할 때에 속히 정신을 차리고 곧장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계속하여 성령을 거슬러 행하고 근심시키는 자는 아무리 성령에 크게 사용되었던 자라도 더 크게 더 비참하게 쓰러지고 버림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군 다윗도 성령의 사람으로서 귀하게 쓰임받았지만 시험에 크게 넘어졌다가 간신히 다시 일어난 경우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합한 왕이 되어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에 그만 성적인 유혹을 받고 넘어지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까지 전쟁터에서 전투를 빙자하여 그 생명을 빼앗는 살인 교사의 죄까지 범할 정도로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행동을 악하게 보신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신랄하게 죄를 지적하였을 때 그는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자기 죄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혹독한 징계의 나날을 오랫동안 보내는 시련의 삶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다윗은 큰 죄를 범하였지만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심을 다한 회개를 했기 때문이며 성령이 그를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단의 책망 후에 금식하면서 참회할 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바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편 51:9~13)
다윗은 성령이 떠난 후에 악령에 사로잡혀 비참한 영적 상태 속에서 고통을 겪었던 전임자 사울을 기억하면서 정신이 바짝 나서 자기에게서도 성령이 떠나실까봐 간절히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성령을 근심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한 때 성령의 사람으로 쓰임받았으나 도중에 이런 저런 시험 가운데서 넘어졌던 성경의 인물들을 반면 교사로 삼아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항상 기억하고 성령을 근심시키거나 노엽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대적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 늘 성령님을 잘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특별히 가르쳐주신 바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면 자기와 동일한 보혜사 돕는 자를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이셨지 않습니까? 자기와 성품과 능력과 영광이 동일하시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기를 믿는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함께하시면서 가르쳐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능력을 주실 분으로 성령님을 자상하고 지속적으로 가르쳐주신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 것이니 자기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힘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실제로 성령 하나님께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강림하신 후에 교회는 놀랍게 부흥이 되고 성령께서 주의 백성들 모두에게 함께하시면서 세계 선교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어오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큰 은혜의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주의 백성된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가장 큰 복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약 성도들은 구약성도들보다 더 훨씬 강력한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으니,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시며 가르치시며 죄와 싸워 이기도록 우리의 거룩함을 북돋아주시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동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성령님을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늘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늘 충만함을 사모하면서 늘 성령 충만받기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물도 자주 쓰지 않으면 결국 우물 물이 줄어들게 되고 우물 물이 더 이상 맑거나 신선하지 않습니다. 한번 판 우물이라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우물은 나중에 쓸모 없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판 우물도 아브라함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서 목축하려고 종들과 함께 가서 내버려두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에다가 돌과 자갈과 흙과 쓰레기들을 던져서 다 메꿔버리곤 했습니다. 이처럼 한 때 뜨겁게 기도 생활을 함으로 인하여 기도의 우물에서 늘 신선한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와 영혼과 삶이 생명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만족과 기쁨과 축복을 누리곤 했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하지 않고 성령님께 간구하지 않고 살아가면 성령의 생수의 우물이 막히게 됩니다. 한 때 생수의 강이 넘쳐 흘러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적인 감화력을 주던 사람도 나중에는 그냥 그렇고 그런 생활인으로 바뀌어버리고 더 이상 생수의 강을 흘러 보내는 영적인 사역자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님과 소통이 막히고 성령님을 거슬러서 행하고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하나 둘씩 쌓이게 되면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상태가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인간적인 결정을 내려 성령의 계획하신 바를 저버릴 때 그로 인하여 영적 침체기가 찾아옵니다. 그러한 일로 후일에 큰 손해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자식을 주신다는 약속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는 중에 그 아내 사라가 자기 계집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자는 말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생각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가정에 평지 풍파가 생기게 되고 후일에도 그 하갈을 통하여 낳은 이스마엘 자손과 이삭의 후손과의 갈등과 전쟁이 지금까지도 중동 지역에 이어지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거나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근심시킨 결과 긴 영적 침체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무엇인가 장벽이 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느껴지고 세상에 대한 애착이 우리 마음에 많이 들어와 있다고 느껴지면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다시금 영적인 은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진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의 서신 야고보서 4:5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질투심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세상에 대하여 우리 마음이 커지고 세상 것에 대한 관심과 갈망이 커져가면 이에 대하여 질투심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을 열망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키지 말고 하셨는데, 성령은 불과 같이 우리 속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위하여 구약의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정금 등대에 매일 심지를 정리하고 늘 깨끗한 감람유 기름을 바꾸어 공급하여 성전 안에 불이 타오르도록 해주는 것처럼, 바깥 뜰에 번제단에 늘 불이 타오르도록 레위인들이 장작을 늘 번제단 아래에 넣어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불이 늘 꺼지려고 하지 않는가 잘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힘써서 성령께서 늘 활활 타오르고 우리 심령 전체를 사로잡아 이끌어 주시고 때마다 우리 마음에 사인을 주시고 길을 인도해주시기를 늘 청하는 자가 됩시다.
사도 바울은 늘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늘 성령께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늘 기도에 힘쓰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차 전도 여행 때에 튀르키에 지역을 지나 서남부 지역의 소아시아 지역에 가서 전도하고자 계획하고 이동했을 때 성령께서 그를 막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반대편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또 다시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서쪽으로 기도하면서 갔을 때 항구 도시 드로아에서 밤중에 또 다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바다 건너편 마게도냐인이 손짓하면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가서 전도하라는 뜻인 줄 알고 기쁨으로 바다를 건너 가서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성령께 늘 의지하며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랐기 때문에 인도함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 시대 성령을 받은 자들 아닙니까? 너무가 귀중한 돕는 자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늘 충만하여 그를 근심시키거나 소외시키거나 노하게 하거나 대적하여 꺼뜨리지 말도록 합시다. 도리어 우리 모두 갈라디아서 5:5:25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살았으니 성령에 발 맞추어 행하라”
는 사도의 권면대로, 우리가 성령과 날마다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기를 늘 갈망하는 자가 됩시다. 늘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늘 계심을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늘 기도합시다. 그리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늘 도와주실 것이요 필요할 때는 우리에게 나타나주시고 개입하시고 인도해주시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되고 평안하고 보람이 가득한 삶을 살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