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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
아모스 8장 11-12절, 마태 4장 4절, 디모데후서 3장 12절 - 4장 5절
한 문 덕 목사
[말의 위력(威力)]
하루는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소크라테스, 안녕하시오! 제가 당신 친구에 대한 좀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소크라테스는 급히 그의 입을 막았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내게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진실한 것입니까?”
“글쎄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사실 그 말이 진실한 것인지는 확신이 안 듭니다.”
“음 ~,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친절하고 애정이 담긴 내용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이지요.”
“그러면 조심해서 이야기해야겠네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지요. 그 이야기는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오. 꼭 필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힘 있게 말했습니다.
“그럼 좋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진실하지도 않고, 친절한 이야기도 아니고, 더욱이 불필요한 말이라니, 집어치우는 게 좋겠소.”
우리들이 평소에 하는 말들은 어떻습니까?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하는 말들은 진실하고, 친절하며, 꼭 필요한 말인가요? 말이 깊은 속마음을 전할 수 없을 때, 솜씨 있는 말이라도 그것이 상대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느껴질 때, 애정 없이 남의 결점을 떠벌리고 싶을 때, 확인되지 않은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입을 닫고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을 꼭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권력으로 진실을 가두거나 왜곡시킬 때, 무고한 이가 누명을 써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불의와 부정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준엄한 경고를 해야 할 때는 꼭 말을 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이에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는 우리 삶에 큰 힘과 위로와 영양소가 됩니다. 정곡을 찌르는 스승의 말 한마디가 제자의 삶을 바꾸고, 양심에 따른 증언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어렸을 때 들은 전래동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먼 옛날 어느 겨울날 사또는 산딸기가 먹고 싶어서 이방에게 당장 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오라고 했습니다. 겨울이라 산에는 산딸기가 없는데도 사또가 명령을 한 것이지요. 산딸기를 안 따오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해서 이방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이방의 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사또를 찾아 갔지요. 사또가 왜 네 아버지가 오지 않고 네가 왔느냐고 묻자, 이 아이는 아버지가 산딸기를 따러 갔다가 뱀에 물려서 몸 져 누웠다고 말을 했습니다. 사또는 이 엄동설한에 뱀이 어디 있냐며 화를 냈습니다. 이방의 아들은 한 겨울에 뱀이 없듯이 한 겨울엔 산딸기도 없다고 공손하게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사또는 자기가 부린 억지를 인정하고 지혜와 효성을 칭찬하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방 아들의 재치 있는 말을 들을 때, 동화를 듣거나 읽는 독자들은 속이 후련하고 시원합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상황에 적합한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는 유익]
오늘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성경이 얼마나 유익한지 디모데에게 차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가르치고, 논박하고, 바로잡고, 정의를 위해 교육하는데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여, 그가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비춰보게 됩니다. 오목거울에 비춰보면 우리가 길쭉해지고, 볼록거울에 우리를 비추면 우리가 뚱뚱하게 보이는데, 우리를 하나님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즉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더 나아가 온갖 선한 일을 하는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들이 가진 희망, 즉 예수 안에서 지닌 희망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답변할수록 준비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준비된 사람이 되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성경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2015년에 썼던 표어 “말씀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이라는 표어를 다시 올해의 표어로 계속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2년간 성경 통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오셨는데, 이제는 읽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말씀이 머리로 이해되고, 가슴에 새겨지고, 선하고 유능하여 준비된 예수의 제자로 거듭나야하는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명이 그 말씀 안에서 약동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내셔서 사람들이 배고파하고 목말라하게 되는데, 그 배고픔과 목마름은 밥이 없거나 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말씀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지니고 계십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내 삶이 나아지고, 영혼이 자라나며,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은총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혹시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굶주리고 목마르십니까?
[말씀의 기아현상과 성서를 살기]
제가 “성서를 보는 눈”이라는 강좌를 할 때마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나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성경을 읽지 않거나, 성경을 잘못 읽거나, 성서를 제대로 읽고도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생명사랑교회가 든든히 서지 못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미비하고, 이 세상의 풍조에 휘둘린다면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그대로 산다는 것인데,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경대로 사는 것이 뭔지를 모르거나, 읽어도 잘못 읽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900년 강화 북부 해안 홍의 마을에는 종순일이라는 부자 교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그의 돈을 빌려다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곧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잡아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을 전부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21절이하의 말씀을 들려 준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오. 그러나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 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그는 빚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종순일은 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읽고는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하고, 교회는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 묘지를 구입했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는 아내와 함께 괴나리 봇짐을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후 그는 그렇게 강화, 석모, 주문, 옹진 등지의 외딴 섬을 돌며 열 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구절은 누가 보아도 명확하지만 어떤 성경구절은 수없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고 잘 이해도 되지 않고 뜻도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쓰인 시대와 장소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신앙이 성경을 쓴 사람의 신앙의 깊이만큼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성경을 제대로 읽고 살아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첫번째 훈련은 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생들 사이에서 경구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제는 어떤 신학생이 일류 신학생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름난 신학대학에 입학한 신학생이라고 모두가 일류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너도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선포를 듣고 나서 바로 “아멘”하고 응답한 신학생은 삼류 신학생입니다. 같은 설교에 “어떻게 사랑하지?”라며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하는 신학생은 이류입니다. 그렇다면 일류 신학생은 어떨까요? 일류 신학생은 설교를 듣고 “도대체, 왜 사랑해야 하는가?”하고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신학생입니다.
사실 “아멘”이라고 답한 학생이 곧바로 나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돌보되 지속적으로 사랑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떻게 사랑할지, 왜 사랑할지를 생각도 하지 않고 “아멘”이라고 말로만 외쳤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당시에는 “아멘”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실천을 해도 방법에 대해 묻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두번째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생각한 신학생은 그 방법을 찾아 다양하게 도전을 하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신학생 또한 “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과 고난이 오면 쉽게 이웃 사랑의 실천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물은 학생은 끝까지 궁극적인 질문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행동해야 할 근거를 스스로 찾게 되고, 그러한 확고한 신념 속에서 외부의 어려움이나 환경의 제약에 흔들리지 않고 실천을 지속해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 신앙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진지한 회의 속에서 참다운 신앙의 꽃이 피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병폐 중에 하나는 교회에서 성서나 교리에 대해 묻고 성찰하는 것을 마치 믿음이 없는 것인 양 치부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러다 보니 교인들도 성서 말씀을 이리저리 되새기며 질문을 하고 스스로 대답도 해보는 일에 대단히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좀 무리가 되더라도 수요기도회, 오후 특강, 금요성서배움마당, 구역모임, 취임 심방에 이르기까지 계속 성서를 되짚어 살피고 꼼꼼히 따져보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섣부른 행동을 하기 이전에 먼저 묻고 따져보아야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계속 깊은 질문을 던지다보면 이전의 작은 질문에서 생긴 궁금증은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너무 이른 대답과 질문 없는 확신은 맹목적 신앙을 낳습니다. 신학 없는 교회, 삶과 무관한 믿음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께 투사하게 하여,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경배하고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은 여기저기 남발되지만 예수의 능력은 발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잘못 읽은 사람들의 행태]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도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이고,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 중에 이런 가짜 스승들이 많았고, 그 밑에서 환호하는 교인들 또한 오늘 바울에게 비판을 받아야할 사람들입니다.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 낳았습니다. 농부가 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찬양했습니다.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서 자기 부인에게 말하기를 “여보 송아지 새끼가 두 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그 농부의 부인도 “아멘.” 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이 되어 방안에 있는 자기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큰일났어”, “아 글쎄 주님께 드리기로 한 송아지가 죽었어.”
이런 농부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숙명여대 교양교육원에서 가르치는 김응교 교수님이 쓰신 글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교수님이 숙명여대와 삼일교회 사이에 있는 브라운 돈까스라는 가게 입구에 “교회 단체 손님 사절”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 걸 보고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식당에 들어가 주인에게 왜 이런 표지판을 세워 놓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들어오면 돈까스 하나 시켜놓고, 소그룹(셀) 모임을 해요.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요. 들어와서 안 나가요. 그리고 늦게 들어오는 사람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주문 안 하고 물만 먹는 경우도 있어요. 차라리 안 받는 게 나아요.”
이 분에게 교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남의 가게에 와서 장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염치도 없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삶의 행태가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성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서에 밑줄을 치며 제대로 읽었다면 그것은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성서를 어떻게 읽었길래 이런 식이 모습이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일까요?
신학을 하기 전에 저는 국어교육을 전공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모님과 헤어져 낯선 곳에서의 첫 수업시간! 표언복 교수님이라는 분이 들어오셨는데, 우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에베레스트(초모랑마)산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을까요?”
우리들은 멀뚱멀뚱 있었지요. 그러자 교수님이 다시 말씀을 이어나가셨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이 제일 높은 건, 밑변이 제일 넓기 때문입니다. 받침이 튼튼하고 넓어야 높이 솟아오를 수 있지요. 그렇게 높이 솟아오르려면 튼튼히 기초를 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대학에 들어오셨으니 다양한 분야를 열심히 공부해서 밑변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폭넓게 공부하다보면 언젠가는 에베레스트처럼 우뚝 솟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뚝 솟으면 되는 것이지 빨리 솟거나 늦게 솟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탐험가들이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고 도전을 하지요. 누가 먼저 올랐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산에 올랐느냐 못 올랐느냐가 중요하지요. 지방대학에 왔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자신의 실력을 닦아 나아가시면 여러분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교수님의 말씀은 제 삶과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년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교회에 오래 다녔나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 말씀의 깊이에 다다랐는가? 그래서 그 말씀을 힘입어 하루를 살 수 있는가? 불평불만을 하기보다 감사의 찬양이 넘치는가? 더욱 매력적이고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가?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가? 입니다.
대학(大學)이라는 동양고전에 사물에는 뿌리와 가지가 있고, 일에는 끝과 처음이 있으니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해야 할 지 안다면 도에 가깝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后, 則近道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읽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잘 쌓아나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자!]
TV 프로그램 중에 극한직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은 가구공장이 나왔는데, 못을 박거나 철로 된 나사를 사용하지 않는 고급 가구를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기계가 워낙 발달해서 나무를 자르고 매끈하게 만드는 작업들도 모두 기계가 합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여전히 대패를 가지고 나무를 다듬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목수 30년 경력의 장인이었습니다. 손으로 나무를 느껴가며 대패질을 하시는데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몇 밀리미터 볼록하게 나온 부분을 쓱싹쓱싹 하니 금방 울퉁불퉁하던 나무가 매끈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분의 손을 자세히 보니 손가락 두 개의 마디가 잘려 있었습니다. 목수 30년 세월의 흔적이었습니다. 위대한 장인이라는 결실을 위해 이 분은 수 만 번 실패를 했을 것이고, 심지어 손가락이 잘릴 정도의 아픔도 겪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서 오늘의 실력이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성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이 정도의 세월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실수로 인해 상흔이 생기고, 가끔은 좌절을 겪더라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성장하려면 이 가구 장인의 투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지금 여러분은 빵만으로 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십니까? 혹시 빵만으로 영혼을 살리려 하신 것은 아닙니까?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셨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한 대목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을 때 변하십시오.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잃어버릴 만큼 완고한 마음을 지니지 마십시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가 애써 여러분 안에 심어 놓은 좋은 씨를 세상 걱정과 탐욕으로 숨 막히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씨를 뿌리시지만, 저희는 그 분의 일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좋은 땅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올 해 여러분의 마음밭에 말씀의 씨앗을 가득 뿌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 씨앗이 많은 열매가 되어 풍성한 수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풍성한 소출을 얻으려면 땅은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밭을 가꾸시는데 게으르지 마십시오. 성경에 관한 질문으로 저를 찾아오신다면 저는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가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최선을 다해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그 말씀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약동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찾아오시어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올 한 해 우리가 무엇보다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매일 당신의 말씀을 펴서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새기고 몸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곧게 선 정신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 곧은 정신은 오로지 당신에게 있사오니 우리의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말씀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얻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에 의지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삶 터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