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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박힌 노래와 흐르는 시
나희덕의 시세계
김지윤
1. 디스크로니아
빛이 어디나 있듯이, 어둠도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때로 어둠 곁을 걷고, 어둠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며, 어둠을 만들어내고, 어둠을 잊는다.
빛 속에서 어둠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나희덕의 시는 빛 속에 서서 어둠을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려면 기억의 힘이 필요하다. 어둠 속에서 빛의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고, 빛 속에서도 어둠을 망각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하는 일이다.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던 예전 시편들과 달리, 2000년대 이후 나희덕의 시에는 점점 더 위기감과 불안의 감각이 높아졌다. 병든 사회의 심장에 깊은 뿌리를 박은 시들은 세상의 고통을 빨아들이며 자라나서, 점점 더 어둠의 공간을 늘려갔다.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풍장의 습관」,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연두에 울다」 등의 시편이 수록된 『사라진 손바닥』 (2004)에서부터 어둠의 징조가 발견되었고 『야생사과』(2009)에서는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섶섬이 보이는 방」”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 「새는 날아가고」 에서와 같은 마음의 공동에 깃든 그늘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돼지머리들처럼」에 등장하는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잘린 돼지 머리. 「구경꾼들이란」에서 시체를 구경하는 사람들 등 죽음의 이미지들로 심화되었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2010년대의 사회적 문제들과 ‘세월호’로 대표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준 절망감은 세계의 고통에 대한 어두운 인식으로 드러났다. 이 시집의 시 「뿌리로부터」는 「뿌리에게」(1991)로 시작했던 나희덕의 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려준다. ( 줄기와 가지, 그리고 더 나아가 잎에 관심을 기울인다. 뿌리로 흡수한 것이 세상으로 전해지려면 나무가 물관과 체관으로 그것을 힘겹게 끌어올려 꽃을 피우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고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구절을 보면, 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다. 나무가 힘겹게 피운 꽃이 져버리면 오히려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이 “뾰족해지는 감각”은 더 예민해지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세상 속에 떨어져 겨울 동안 언 땅을 파고들어 봄을 준비할 씨앗이 되려면 인고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후 나희덕은 파일명 서정시(2018)에서 세상을 “모든 악이 모여서 배출되는 곳”이자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곳/ 이것이 인간인가, 되묻게 하는 곳/ 지금도 시커먼 괄약근이 고통스럽게 헐떡거리는 곳”(「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으로 바라보지만, 여전히 죽임의 세계 뒤에 올 ‘살림의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시인이 어둠을 노래하는 것은 그 어둠의 현실을 드러내 ‘밝히고’, 어둠의 세상에 출구의 빛을 드리우며 ‘밝혀’줄 희망을 찾기 위해서이다. 시인은 세계의 끝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되물어볼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을 남겨놓는다. 그 질문으로 인해 세상의 파멸은 지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답을 하려면 오랫동안 깊이 숙고해야 한다. 성급하게 답변을 하려고 하면 꼭 필요한 과정을 생략하게 되거나, 진짜 중요한 것들이 누락될 수 있다. 무거운 질문일수록, 그 무게를 제대로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답을 찾지도 못한 채 그것에 짓눌리게 된다.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2021)에서 나희덕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느린 걸음을 보여준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미래 가능성에서 “디스크로니아(dyschronia)”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것이 현대의 정서적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의식(consciousness)과 감정(emotion)은 정교해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급변하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디스크로니아, 즉 '삶의 시간'의 병적 측면으로 인해 그들의 내면은 황폐해진다.
또한 기억은 사람들을 묶어줄 수 있고, 시간을 유의미하게 한다. 그러나 한병철이 지적했듯, 이 시대는 지속의 경험을 상실하게 하고, 기억 대신 데이터와 정보를 축적하게 한다.한병철은 정보화된 사회가 기억을 훼손하며 경험의 조건 자체를 손상시킨다고 보았다.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는 구별되고, 기억의 자취는 역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빛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은 중요하다. 어둠이 영원하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출구를 찾지 않는다. 이 ‘출구’를 다른 말로 하면 ‘가능성’일 것이다. 시대의 병증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 내면을 파괴하는 ‘디스크로니아’와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이다.
2. 노래의 못
아무리 깨끗한 페인트칠로도 없앨 수 없는 것이 벽의 못 자국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 칠한 벽에만 눈길을 준다. 어떤 벽에는 전 거주자가 박아놓은 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들은 상처를 몸으로 증언하며 조용히 그 자리에 있다. 세상은 못 자국으로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벽만 쳐다본다. 세상의 환부들은 대개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는다.
시인은 ‘못 박힌 노래’를 말한다.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입술들은 말한다」) 이 노래들에는 못이 박혀 있으며, 그 자체가 벽 속에 박혀 있는 못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 못은 뽑히고 나서도 계속 박힌 자국으로 그곳에 남아있다.
입술들이 하는 말들은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등을 힘겹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향과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후위기, 정부 대책 등의 큰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저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일 수도 있다.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 그리고 장마비와 파도소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 무수한 이야기들은 삶에 자취를 남긴 어떤 경험에 대한 기억이다. 그들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들은 다시 다가올 시간들을 위한 기억이 된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동안 기억은 전승된다. 그들의 현존은 이야기 속에 남아 이어진다. 가능주의자의 2부와 3부에는 유령들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이 못이나 못 자국을 보지 않고 벽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유령들을 보지 않는다. “점점 투명해져간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유령들처럼」)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이 유령이 되어가는 것은 바로 시선의 바깥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비주얼’ 시대이지만, 보이는 것이 많아지는 만큼 보이지 않는 것도 많아진다. 사용자 맞춤 AI 추천 서비스가 일상화된 시대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시각화가 일어나고, 플랫폼과 미디어가 제공하는 시각적 스펙터클에 휘둘려 자신만의 시야를 잃기도 한다. 취향에 맞고 관심이 있는 것을 찾기 쉬워짐에 따라, 다르고 낯선 것들을 마주하는 일은 점차 기피된다. 아도르노가 『미학이론』(1970)에서 개인을 보편에 귀속시키려하는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했을 때는 전체주의를 낳은 도구적 이성에 지배되는 사회를 비판했던 것이지만,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의 폭력을 양산한다. 소비사회에서 광고와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균질적 욕망은 삶의 방식과 정신을 획일화시키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이들’로 만들어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사회적 불평등이 시각적 차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각 테크놀로지의 폭력성에 대해 논한 나병철은 ‘시각기계’가 내면화될 경우 폭력에 침묵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시인은 ‘입술들’에 대해 쓴다. 침묵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입을 다무는 사람들 사이에서, 침묵과 싸우는 목소리들이 있다.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노래를 부르는 입술들에 시는 관심을 기울인다. 베라르디는 미래를 상실한 사회를 ‘시간의 식민지’라고 불렀고, 식민화된 시간 속에 갇히지 않으려면 타자와의 교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할 때 그것은 대화가 된다. 대화할 때 발화되는 말은 ‘서로’를 향한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말에 담긴 감정과 경험, 내적 맥락까지 알게 되는 일이다.
나희덕이 가능주의자의 ‘시인의 말’에 적어놓은 구절을 보면 “마음이 기우는 대로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는 대로 가 보면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영혼들 곁”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의 통증, 허기, 한기를 느낄 수 있어야만 교감이 가능하다. 누군가의 아픔과 곤경은 가까운 곳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떨림, 신음, 낯빛은 곁으로 다가선 사람만 알아챌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누군가의 균열과 찢어짐을 발견하면 조용히 허리춤에서 바늘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수록시 「꿰매다」는 “무언가 열심히 꿰”매고 있는 사람을 보여준다. 이 시는 “실패에는 실이 남아있다”라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실이 남아 있는 한 꿰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패에서 풀려난 실은 한 땀 한 땀 길을 낸다.” 바늘은 작은 바늘땀들을 만들며 “한 걸음 한 걸음 찢어진 길을 꿰매”간다. “뜯어진 바짓단이든 구멍난 양말이든 떨어진 단추나 후크든 조금 해지거나 터진 구멍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꿰매다 실이 모자라면/ 실패를 집어올려 새로 꿰면 된다”고. “무언가 꿰고 꿰매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이 불안도 가라앉히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꿈꾸게 한다. 비록 찢어진 세상이지만 “무언가 꿰매는 손등에는 고요가 내려와 반짝”이고 세상의 균열은 조금씩 사라진다. “실패에는 실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한, 바느질을 계속할 수 있다.
누군가 깨끗한 페인트칠로 시대의 남루와 얼룩을 지우려할 때, 못은 자신의 상처 안에 조용히 박힌 채 지워지지 않고 버틴다. 어떤 못들은 피를 흘려 다시 얼룩을 만든다. 못들은 망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깊은 상처를 내려고 두드려대는 망치 아래에서도 외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못이 박힌 채로도 입이 노래하게 하고,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듣게 하는 것은, 분명 어떤 신념이다. 희망 없는 시대에도 우리에게 어떤 희박한 믿음이 남아 있다면, 이런 것이 그 믿음이 아니고 무엇일까.
3. 시의 물결
가능주의자의 표제시 「가능주의자」는 이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역능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베라르디의 표현처럼 “가능성을 전개하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주체적 에너지”인 ‘능력’(potency)이 차갑고 언 땅 어딘가에 씨앗처럼 묻혀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낙관주의가 아니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어떤 핏기와 허기와 한기가 삶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만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뀌기 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을 바꾸려고 했는지,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잊는다면 아무 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생각만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가능주의자에는 제목이 동사로 되어 있는 시가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이 주목되는데, 이 시편들은 제목처럼 다양한 행위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이 시집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움직임은 정체되지 않고 변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움직인다면 할 수 있는 일, 볼 수 있는 것,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 있다. 새 봄의 씨앗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겨울 땅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 겨울을 견디며 자라나 결국 모습을 내보이게 될 것이다. 이 시집은 이러한 미래의 ‘가능성’을 말한다. “내재적인 가능한 미래의 다양성, 현재 안에 이미 새겨져 있는 다른 것 되기”를 꿈꾸는 시집이라고 하겠다.
다만 그 가능성들은 이미 현재 속에 존재하되 그 잠재태의 가치가 밝혀져 있지 않다. 「줍다」는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는 화자를 보여주는데, 이 화자는 줍는 행위를 통해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무언가를 주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조개를 주우러 갔지만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일 때, “줍고 또 줍는 것”만이 허무를 견디는 방법이며,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어떤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으려면 가까이 가서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지 못하지만 나의 하루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면 나에게는 값진 것이 된다. 줍는 행위는,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 않고도 결핍을 채울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한다. “다른 사람 몫을 조금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아야 “그날의 해변처럼/ 빈껍데기만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이 시집의 1부는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에게 ‘해변’은 벽과 반대되는 존재이며, 무언가를 가로막기보다 계속 나아가며 ‘주울 것들’을 탐색할 수 있게 하는 열린 공간이다.
‘흐르다’라는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며 시작되는 시 「흐르다」는 아래를 향하는 수직적 운동성을 보여준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평적 운동, 혹은 위를 향하는 수직적 운동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 사람들은 다른 이보다 좀 더 앞으로, 좀 더 위로 나아가야한다는 강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아래로 내려가는 움직임의 가치를 눈물을 통해 발견한다. “상류에서 하류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들이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으며 또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는 곳”, 그 “하류의 퇴적층”이 무엇일까에 대한 상념은 시에도 아래로 흐르는 물의 흐름을 만든다. 그러나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 또한 시인의 마음에 남는다.
“종이에서 시가 싹트리라 기다리지 마라”(「종이감옥」, 파일명 서정시, 2020)라고 말했던 대로, 언어는 실제 움직이지 못한다. 시는 현실에서 싹 트고, 세상 속에서 함께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시의 물결이다. 많은 것들을 품은 채로 함께 흐르고 흘러서, 두렵도록 고요한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시인은 「가능주의자」에서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만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보여준다.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가능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라는 회의와 불안, 환멸이 지나간 뒤에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펜을 든다. 반딧불이가 작은 빛을 깜박이기 위해서는 어둠을 헤치고 다닐 수 있도록 어둠에 밝은 눈이 있어야 한다.
어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그림자에 잠길 필요가 있다. 나 역시도 어둠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어둠과 제대로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어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라고 말한다. 빛을 어둠에 기대어 찾을 수 있고,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어둠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 적응하되 어둠을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빛을 망각하거나, 빛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둠 속에 주저앉아 어둠의 일부가 된다.
베라르디는 이것을 현대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처럼, 우리 사회는 양극화와 무한경쟁 속에 파편화되며 허무주의에 순응해가고 있다. 그가 보기에 사회의 무능력을 초래하는 니힐리즘은 상상력의 위기이며, 꿈의 빈곤이다. 그리고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문학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라르디에 따르면, 시에서 의미는 “미리 존재하는 현실의 재현이나 지시대상과의 조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 목소리, 리듬 등이 환기하는 힘에서 나온다.”그는 시가 지시대상으로부터 언어 기호를 해방시키는 점에 주목하며, 이처럼 언어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시가 사회적 자율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 보았다.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라고 시인은 쓰고 있지만,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승산이 낮더라도 ‘가당찮은 꿈’을 꾸기 때문이다. 시는 성공한 지배자의 역사보다 실패한 꿈의 가치를 노래하는 데 헌신해왔다. 그래서 “하류의 퇴적층”에 모인 꿈들이 오래 쌓여서 새로운 지형을 만들 수 있도록, ‘못 박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가능주의자다. 또한 그 노래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섞이고 흘러가며 생기는, 저 낮은 곳의 자율지대는 가능주의자들의 영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