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대한 국민대중의 평가가 부정적으로
된 것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가운데 친일파의 주도로 나라가 세워졌다는 대중적 인식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친일파 문제는 6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계기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불거져 나와 우리 건국사를 비판하는 가장 아픈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건국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함에 있어서 친일파 문제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깊은 지혜가 요청되는 성찰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이 이 문제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않고서는 해방전후사를 재인식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재인식》이란 책에 관련 논문이 없음에도, 자칫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그 문제에 관한 장을 펼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합니다.
"그때 말이야, 친일파를 적어도 천 명쯤은 처형했어야 했어.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에
빚진 게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감쌌는지 알 수 없어."
이 같은 이승만 비판에 대해서, 저는 그 선의를 이해합니다만 솔직히 말해 무언가 거창한
민족의 영웅 서사를 추체험해 보고픈 푸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객관적 현실은
그러한 영웅 서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엄연했던 역사적 제약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니체가 운명에서 자유로워졌듯이 우리도 친일파
문제의 주박(呪縛)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겁니다.
1948년 9월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합니다. 그에 기초해 반민특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1949년 1월부터 활동에 들어갑니다. 동년 8월까지 559명이
특별검찰에 송치되고, 221명이 기소되었으며, 38명에 대한 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를 보면 체형이 12명, 공민권정지가 18명, 무죄 내지형면제가 8명입니다.
체형은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기타 징역 1년 내지 2년 6개월이며 집행유예 등입니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두 사람은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석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반민특위가 엄중하게 처벌한 친일파는 하나도 없는 실정입니다.
반민특위와 가장 심하게 대립한 세력은 경찰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의 절반 이상은 일정 때부터
경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만, 1960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까지도 경찰의 3할이 일정 때부터의 경력자였으니 그렇게 짐작해도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해방 후 점령군으로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의 입장에서 친일파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 진입하면서 큰 전투를 치렀다면 입장이 달랐겠습니다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미군정은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 세력의 저항을 제압할 때, 그 방면에서 전문 능력을 지닌
일정 때의 경찰들을 채용함에 별로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경력 27년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한 노덕술 같은 고참 경찰도 있었습니다. 반민특위는 그를
포함하여 경찰 간부 세 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집단이 격앙하고 드디어 1949년
6월 서울시경 국장의 지휘하에 경찰부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 요원을 연행하는
중대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공권력에 의한 백주의 테러였지요.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러한 불법행위를 묵인합니다. 뒤이어 임명된 반민특위의 위원장은 처음부터 반민특위의
활동에 회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잔여 업무를 처리하고 같은 해 8월에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반민특위의 비극적인 좌절은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 상처가 지난 60년간 아물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 이영훈 교수 저, ‘대한민국 이야기’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