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1] 백제 왕위계승의 계보와 근초고왕
[2] 칠지도
[1] 백제 왕위계승의 계보와 근초고왕
-단일한 성씨로만 계승되었나?
-백제의 초고왕-구수왕-근초고왕-근구수왕의 왕명에 보이는 유사성에 대하여
명칭 자체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근초고왕이나 근구수왕은 초고왕이나 구수왕에 '근(近)'자만을 붙여서 표현한 것으로, '근'자의 사용은 곧 근초고왕이나 근구수왕이 초고왕이나 구수왕과의 계승관계를 강조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초기의 백제 왕실 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거, 백제 초기의 왕위계승도를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온조(1)⇒ 다루(2)-기루(3)-개루(4)
⇒ 초고(5)-구수(6) -사반(7, 폐위) ⇒ 비류(11) ⇒ 근초고(13)-근구수(14)
⇒ 고이(8)-책계(9)-분서(10) ⇒ 계(12)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왕실은 시조 온조 이래 계속 같은 혈통으로 이어져온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몇 번의 혈통 혹은 가문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위의 표에 '⇒'로 표시해 놓은 부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먼저, 1대 온조왕에서 2대 다루왕으로의 변화는 부여씨 왕실에서 해씨 왕실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초기 백제의 왕실은 해씨와 부여씨의 두 혈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씨 왕실은 4대 개루왕을 끝으로 사라지고 백제 왕실은 5대 초고왕의 등장과 더불어 부여씨로 고착되게 된다. 그러니까 초고왕의 즉위는 부여씨 왕실의 확립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초고왕이 지니는 이와 같은 역사적 중요성이 바로 뒤에 근초고왕이라는 왕명이 나오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한편, 부여씨로 왕실이 고착된 후 백제 왕실은 부여씨 내에서 다시 가문의 분화가 생기게 된다. 8대 고이왕의 등장이 바로 그것을 보여 주는데, 초고왕의 후손으로 이어지던 왕위가 고이왕의 등장과 더불어 초고왕의 방계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 때부터 백제의 왕위계승은 초고계와 고이계의 대립구도로 전개된다. 고이계인 10대 분서왕 이후 초고계인 11대 비류왕이 즉위하였다가 다시 고이계인 12대 계왕이 즉위하게 되는 과정은 그 대립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세력간의 갈등은 근초고왕의 즉위와 더불어 초고계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후의 왕위는 계속 초고계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근초고왕을 시작으로 백제왕실은 초고계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백제 초기 역사상 초고왕대는 해씨에서 부여씨 왕실의 확립, 근초고왕대는 고이계에서 초고계 왕실의 확립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이나 그 뒤를 이은 근구수왕이 각각 초고왕과 구수왕의 왕명에 그 연계관계를 강조하는 의미의 '근'자만을 붙여서 칭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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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한마당 묻고답하기에서 옮김
◈ 백제 초기의 정치사 자세하게 참고할 책
-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31-131쪽.
백제 최대판도의 전성기 근초고왕 때 영역 및 대외 진출상황도 | |
근초고왕대 정복사업과 칠지도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은 재위 346~375, 재위 24년 369경에 마한의 나머지 땅을 전부 정복, 26년(371)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 일부까지 점유한다. 대외적으로 동진, 일본과 교섭, 해외 진출, 왕위의 부자 상속, 진씨 왕비를 맞이하고, 고흥이 서기 를 편찬했다.
◈ 요서경략
한성시대 백제는 매우 강성하여 송서 등 중국사서에 백제가 요서 지역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백제의 요서 지역 경략은 요동을 확보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것.
[요서영유설] 또는 [요서경략설]이라고 하면, 백제의 요서지방 진출설을 이야기한다. 이 기사는 488년 중국의 심약이란 사람이 찬술한 [송서] 백제전에 처음으로 이 기사가 보이고 있는데,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다"라고 하여,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하여 백제가 이를 견제하고 요서지방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신경준 등과 같은 실학자들이 이기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요서영유설을 제시한, 이래로 신채호 등이 이를 이어 '백제가 근구수왕대에 요서지방에 진출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고, 근래에는 근초고왕대의 사실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 백제가 부여를 공격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은 요서 지역에 주둔한 백제군사가 부여를 공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백제가 요서 지방(요서군을 설치), 산둥반도(진평군)을 일시적으로 확보했을 지라도 곧이어 고구려에 의해 한강이남 지역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그곳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백제는 또 일본 규슈지역으로 진출하여 상업세력 발전에 치중하였다.
[2] 칠지도(七支刀)
칠지도와 근초고왕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대내적으로는 진씨가문에서 왕비를 맞이함으로써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을 만들고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인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백제 최대의 영역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즉 남으로는 전라도 지방을 백제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지방을 부용시켜 백제의 영향권에 넣었으며, 북으로는 대방지역에 진출하여 고구려 평양성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경략하자 이에 맞서 요서지방을 경략했다는 백제의 요서진출설이 있게 한 주인공이다.
이와 같은 근초고왕의 활약은 일본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문화적 정치적 우위에서 왕인과 아직기를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수하여 주고, 일본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七支刀)를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 또한 중국 동진과도 교류하는 한편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서기’를 편찬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 최대의 중흥군주였던 근초고왕의 무덤을, 현재 학계에서는 한변의 길이가 50m에 달하는 서울 석촌동 3호분 적석총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필지도(七支刀)는 곧은 칼날 좌우에 세 가지의 칼날이 마치 나무가지처럼 뻗어 있어 도합 7개의 칼날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철제 칼의 이름인데, ‘일본서기’신공기에 백제가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기사가 전하고 있다. 또한 현재 실물로 남아 있는 일본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에는
"[전면]태화(泰和) 4년 9월 16일 병오 정양일에 백번 단련한 강철도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많은 적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제후국의 왕들에게 나누어 줌이 마땅하다. ***가 제작함/
[후면] 선세 이래로 이 칼이 없었던 바 백제의 왕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이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라"는 명문이 남아 있어, 학계에서는 奇生聖音을 대체로 근초고왕으로 추정함으로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칠지도가 바로 그것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일본학계와 우리 학계가 '임나일본부'와 관련한 논쟁하고 있다.
칠지도는 나라현 천리시의 이소노카미(石上神宮)에서 발견되었다.
-국가 기원으로부터의 신검이 있었는데 12세기 말 안덕천왕이 源씨와 平씨의 싸움 와중에 8세로 (단노우라)에서 투신할 때 함께 바다 속에 빠뜨렸다 한다.
-명치 천왕이 새로운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간마사또모(管政友)를 1873년부터 4년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로 임명하여 신궁의 禁族地라는 숲에 또 다른 무덤이 있어 신검을 기대하고 발굴하였으나 다시 묻고는 발표하지 않아 여러 가지 억측과 상상도만 남아있다.
-간마사또모가 신궁의 창고에서 우연히 칠지도를 발견하였다.
故爲倭王旨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음.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일본서기 신공 황후 말년조(372년)에 백제왕이 久氏를 보내어 칠지도를 바쳤다 라고 하였다. 비교적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그녀의 아들 응신 천왕과는 120년 연대 차이가 있어 억지로 인정하려면 그녀는 200년이상 살았다는 모순이 생긴다.
-백제봉헌설 : 일인은 명문가운데 供工侯王의 供을 바친다로 해석, 백제봉헌설을 주장. 고대 일본의 영토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임나경영설의 증거로 제시
-동진하사설 : 그후 侯王은 '제후인 왕'으로 재해석되어 동진에서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동진하사설.
-백제하사설 : 侯王은 중국사서에 나타나는 OO侯OO王등의 백제 관직명으로 당시 왜왕은 백제왕의 신하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백제봉헌설과 동진하사설은 거의 부정되고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수준 비교를 바탕으로 백제의 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소답자한 30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