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탐방의 명소 '사와만'
사와다맨션은 고치현 고치시 아조우노 키타쵸에 건설된 집합주택이다. 통칭 '사와만'이라 불리운다. 철근 콘크리트 건축을 업으로 삼은 적이 없는 부부 두 사람이 (후에는 자식도 힘을 모아서) 건축하였다. 철골 철근 콘크리트 구조이며 택지 550평에 지하 1층 지상 5층 (일부 6층) 건물이며, 70세대 약 100명이 입주해 있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외관은 일본의 구룡(청킹맨션이 있는 홍콩 구룡)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으며, 건축물 탐방의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사와다맨션은 아마추어가 독학하여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건설한 철근 콘트리트조의 건축물이다. 사와다 카노 (1927년생-2003년몰)는 코치현에서 태어나 유소년기 잡지에서 본 “아파트”의 모습에 감동받아 집합주택을 건축하고 경영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하겠다고 결심한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코치현 내의 산 속에서 이동하면서 제재업을 시작한다. 1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27살에 코치현 나카무라시로 이사하여 그곳의 제재소에서 일한다. 목공이나 건축 분야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스스로 현장을 관리 감독하고 주택을 지어 파는 판매/분양을 개시하며 이 후 아파트 경영 등에도 진출한다. 32살이 되어서 당시 13살이던 아내 히로에씨와 결혼한다. (1946년생-생존)
1971년, 사와다 카노가 44살이 되었을 때, 코치시 아조우노에 토지 550평을 사들여 사와다맨션의 건설에 착수한다. 건설을 개시한 당시 건축 확인을 받지 못한 채 였는데, 관공서의 반응도“강력하게 제지하지는 않겠지만, 수수료가 준비되면 허가를 받으라”는 정도의 굉장히 헐렁한 것이었다고 한다.
30톤 불도저와 대형 파워샤펠을 빌려 약 10일에 걸쳐 지하 6미터 이상을 파 내려가, 암반에 도달하였다. 이 위에 기둥을 세웠다. 작업은 택지내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어나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철근을 배치한 뒤의 콘크리트 작업에는 초등학생인 딸까지 동원하여 “닿지도 않는 발로 레카차를 이동해서” 생 콘크리트를 운반하여 시멘트 반죽을 했다고 한다. 사와다 카노씨는“건설 도면은 내 머리 속에 있다.”고 호언하며 제대로 된 도면도 그리지 않았다. 옥상에는 부부가 직접 만든 크레인을 놓여있었고 제재소도 설치되어 있었다.
당초의 구상은 “10층 건물/100세대”라고 하는 장대한 것으로, 최종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현재는 5층 건물/60세대 (일부 6층 건물)이 되었다. 사와다 부부의 희망에 의해 처음에는 모자가정 등 사회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임대하였으나, 최근에는 젊은 사람들의 입주가 늘고 있다. 사와다 카노 사망 후, 증축은 하지 않고 개축이나 보강 등 현상 유지를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월세는 2만엔 정도부터 5만엔 정도까지 다양하나, 면적 일조량, 비품(에어컨 유무, 리모델링 유무) 등을 감안하여 월세를 책정하고 있다. 방 번호가 제멋대로인 이유는 건설 당초 입주자가 결정된 순서대로 정했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는 택배업자들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또한 한 때 보통 맨션처럼 101호 102호 하는 식으로 번호를 붙인 적도 있었으나 주민들의 불평의 목소리가 높아져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현재 당시의 번호가 남아 있는 집은 202호를 비롯하여 몇 세대만이 남아 있다. 때때로 방의 번호를 잘못 붙였다가 입주 순으로 고치기도 하여, 방 번호의 혼란은 더욱 더 심화되고 있다.
사와다맨션의 역사는 또한 계속된 행정지도 및 공사중지명령 등의 알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에는 주민들이 자주적으로 방재조직을 결성하여 매년 1회 피난훈련을 하는 등 관공서와의 관계도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