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론, 제 1강 / 서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성경의 진리가 말하는 거듭남(Born again)은 온전한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거듭남(재출생)은 결단코 어떤 선과 악의 행위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부모로부터 육신의 생명이 단 한번 출생한 것처럼 예수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한번 더 새롭게 출생한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거듭남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최우선의 문제입니다.
이런 뜻에서 설교의 황태자로 일컬어지는 영국 출신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목사님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핵심은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교회의 목사가 되었든 또는 교회의 중직자가 되었든 가장 최우선으로 자기 신앙의 거듭남 문제를 확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절대 우선이고 절대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자기 신앙의 거듭남 문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 채 목사 직은 물론 그 외의 어떤 중직을 맡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또한 자기 신앙의 거듭남 문제를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는 예배, 기도, 찬송, 봉사 등과 같은 일들을 행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거듭남이 없는 허망한 맹신 신앙의 행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거듭남 문제를 본인 스스로 확인하고 확신하는 정점에서 자기의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이번 2023년도 가을 학기의 큰 주제를 구원론 (救援論)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해로 이번 가을 학기에 충실히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바다에는 구원선이 있고, 육상에는 구급차가 있습니다. 한자어로 똑같은 건질 구(救) 자에 당길 원(援)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구원선이나 구급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결국 죽음의 위험과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은 복잡한 우리 사회에서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일하는 모든 일들은 그 사람의 영혼과 관련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현실적인 육신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살리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이런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없어선 안되는 훌륭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구원선이나 구급차를 통해서 죽어가는 육신의 생명이 회복되고 살아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로 오늘도 저는 여러분들에게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말씀을 논하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우리 기독교의 구원과 관련된 보다 더 넓고 깊은 깨달음의 수준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론(救援論)은 말 그대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논하고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코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육신적 생명이나 삶의 구원과 전혀 차원이 다른 하늘에 속한 영혼의 구원을 말합니다.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런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속한 삶의 구원도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의 “구원”으로 번역된 원문 히브리어 명사는 예슈아(יְשׁוּעָ)입니다. 이 “예슈아(구원)는 구약에 나오는 “여호수아”라는 말과 같은 어원의 뿌리입니다. 이런 뜻을 가진 히브리어의 “예슈아”를 신약성경의 원문 헬라어에서는 예수스(Ἰησους)구원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스”를 영어성경에서는 지저스(Jesu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헬라어의 예슈아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구원자)로 번역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말 성경에서 사용하는 “구원”이라는 헬라어 명사는 소테리아(σωτηρία)입니다. 이 소테리아(σωτηρία) 는 죄악, 죽음 그리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같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save(세이브)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하다, 또는 살리다, 라는 뜻입니다. 야구장에서 심판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한자어에서 말하는 이 구원(救援)이라는 단어의 뜻은 (구원할 구, 자에 도울 원, 자)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말은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준 것”을 말합니다.
이런 뜻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변에 있는 적대국의 위험과 사울왕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때 사무엘하 22:3절에서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2장 12절에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같은 이해의 말씀으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9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거듭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말하는 구원의 신비를 막연한 상상(想像)이나 관념(觀念) 또는 피상(皮相) 허상(虛像) 믿음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의 믿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타성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온전한 예수 영접 믿음을 통한 거듭난 구원이 어떤 것인지, 올바른 깨달음과 더불어 자기의 신앙 생활을 아름답게 승화시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로 앞으로 있을 구원론에 끝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론, 제 2강 /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시면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향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미리 선제적으로 사도 바울은 선택(選擇)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가릴 선(選)자에 가릴 택(擇)자입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별하게 가려냄을 받고 뽑힘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사울(바울)은 기독교의 예수 복음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초창기 기독교의 원수요 악마 같은 대적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그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지금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다메섹) 직가라고 하는 곳에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울을 불렀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선제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세계화 복음 전파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릇 가계의 그릇들이 주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릇의 주인이 될 사람이 그 그릇을 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13~17절에서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조: 칼빈의(예수주의) 5대 강령
1. 인간의 전적 타락(墮落)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인간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 어떤 의와 선한 반응을 할 수 없는 최악의 어둠과 영적 사망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3:12~18절까지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選擇)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이란 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영생하는 구원에 이를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미리 예정하시고 손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3. 제한된 속죄(贖罪)
제한된 속죄란 말은 태생적 죄인이 다 속죄를 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예정과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 제한적으로 죄사함(속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9:11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9:15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 불가항력적 은혜(恩惠) /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불가항력적 은혜란 말은 그 어떤 완악한 죄인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부르실 때는 자기의 힘이나 능력으로 거절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3: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4:18~20까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7절에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作定)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5. 하나님의 견인(牽引)
하나님의 견인라는 말은 이끌 견, 자에 인양 인,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인이라는 말은 마치 물에 빠져 위험에 처한 사람을 이끌어내거나 또는 고장난 자동차를 이끌어가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견인이라는 말은 전적인 타동사입니다. 자기의 죄악으로 병들고 고장난 영혼과 인성의 상태에 있는 죄인을 끝까지 예비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견인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절에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원론, 제 3강 / 예수 영접(迎接) 믿음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아시다시피 영생하는 구원은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 반드시 예수 영접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의 믿음이 예수 무영접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런 믿음은 참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런 이해로 오늘 제가 강의하는 구원론 제 3강의를 받기 바랍니다.
참조: 믿음으로 받는 구원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6:31절에서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 25~2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 영접 믿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신 예수를 내 안에 맞이하고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 개념의 지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실체(실상)로 영접한 믿음으로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머리 개념의 지식 믿음은 불신앙 믿음에 행당하는 껍질 믿음이고 진정한 예수 실체(실상) 믿음은 실속이 있는 온전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반드시 실체적이고 실상적인 예수 영접 믿음으로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성경의 진리는 온전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 요한복음에서 “영접”으로 번역된 헬라어의 원문은 람바노(λαμβάνω)입니다. “받아들인다” 또는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이 “람바노”를 우리말 성경에서 영접(迎接)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외에도 헬라어 원문 성경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에 대하여도 “람바노”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손님을 영접한다, 또는 기도의 응답을 맞이한다”는 문맥에서 (람바노 λαμβάνω)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로 영접이라는 단어의 뜻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1~13절까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40절에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20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2~9절에서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정코 예수 영접과 믿음은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마치 나무와 가지가 나누어질 수 없는 한 나무인 것처럼 예수 믿음과 영접도 둘이 아니라 한 나무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접 믿음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참조: 예수 영접 믿음의 실체
요한복음 14:20절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4절에서 “(현대인의 성경) 내 안에서 살아라. 나도 너희 안에서 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서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우리 기독교회 안에는 영접(맞이하여 모셔들임)과 상관없는 예수 무영접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오해 또는 착각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인들은 일단 교회를 다니면서 물세례를 받고 신앙의 연륜을 쌓으며 직분은 받은 것으로 자기의 믿음이 온전한 믿은 것으로 믿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학교의 학우는 물론 여러 목사님들 또는 일반 교인들이 예수 영접 믿음에 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강의가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 영접 믿음과 관련된 성경 말씀은 매우 많습니다.
에베소서 3: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27절에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19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원론 제 4강 / 예수 무영접 믿음이란?
요즘의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 무영접 믿음”이 있습니다. “무영접 믿음”이라는 직접적인 용어는 없지만 그와 관련된 성경 구절은 많이 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예수 무영접 믿음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지난주 강의 시간에도 언급했던 말씀입니다. 예수 무영접 믿음은 실제적이고 실체적인 실상과 실속 믿음이 아닌 막연한 이상(異常)상상(想像), 추상(抽象) 또는 허상(虛像)과 피상(皮相)으로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결국 아무 실속이 없는 겉으로 나타난 모양으로만 믿는 믿음입니다. 관련된 성경 구절을 확인하겠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실이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자기의 육신적 본성에서 나오는 악의를 자주 노출하는 사람이 예수 무영접 믿음에 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여지는 모든 모습들은 전형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매 주일마다 고운 옷을 입고 환한 미소로 서로를 대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합니다.
기독교의 직분이나 신앙의 연륜이 너무 화려하고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겉 모습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말이나 행실은 여전히 불신앙에 해당하는 육신적 악행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예수 무영접 믿음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예수님은 예수 무영접 믿음과 관련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39절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7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둘째는
교회 안에 있는 예수 무영접 교인들은 회개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어쩌다 자기의 입술로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껍질에 해당하는 형식으로 회개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도둑질을 했다든지, 또는 사기 행위를 했다든지, 또는 폭력이나 폭행이나 성적 불륜에 빠졌을지라도 그런 문제들을 자기 자신을 고치는 회개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런 해악한 문제들을 껍질로 회개하고 다시 재범행하는 것으로 풀어갑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본인은 매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헌금을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교회 안에 있는 예수 무영접 믿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 언젠가 한 번은 천호동에 있는 어느 태권도 도장에서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40대 초반의 사람이 저에게 신앙상담 요청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가대 봉사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일상의 삶에서는 자기의 병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루의 일과 끝나면 습관처럼 주변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먹거나 술집 여성들과의 밤을 즐기는 일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살다가 또 다시 주일 날이면 교회에 나가서 눈물 쏱아내는 회개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또 다시 평일의 일상으로 돌아와서 저녁 늦은 시간을 맞이하면 또 다시 주변의 술집을 찾아가서 자기 육신을 즐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처럼 그렇게 불량한 신앙생활을 행하는 사람도 천국 구원에는 지장이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청년에게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영접 믿음을 가진 사람의 내심의 영혼에는 영이신 예수님께서 계시고 사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형제와 같은 불량한 삶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개를 하도록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회개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앞으로도 형제님께서 지금처럼 그렇게 여전히 불량자로 산다면 형제님의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예수 무영접 믿음일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주로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 신앙의 영적 관리가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여지는 모양만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인들은 예수로 말미암은 영적 속 사람의 생명이 죽었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인도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에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에는 예수 무영접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관련된 성경 구절을 확인하겠습니다.
야고보서 2:20절에서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0절에서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3절에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셋째는
교회 안에 있는 예수 무영접 교인들은 너무 쉽게 이런 저런 시험에 들어서 자주 넘어지고 실족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 신앙의 기본에 해당하는 주일 예배에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형식적 의무감이나 또는 무의식의 습관을 따라서 교회를 출입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부터는 교회를 다니는 일을 중단합니다. 1~2년 때로는 5년 10년 이상을 중단합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안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가 자기의 불량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의 신앙이 예수 무영접 믿음인 것을 열매로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나간 동안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직분도 받고, 봉사와 헌신도 많이 한 사람들이 지금은 교회 출입을 완전히 중단하고 세상의 불신앙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100만 이상이라 합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끝까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예수 무영접 신앙입니다. 관련된 성경 구절을 확인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4:10~11절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30절에서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3절에서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49절에서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원론 제 5강 / 죄인의 영적 신분에서 의인으로 영적 신분으로
죄인 신분의 영적 상태란?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이 없다는 절대적 용법의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과 의를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 또는 죄인”이라는 명사를 구약성경의 원문 히브리어에서는 하타임(םיאטח)입니다. ‘길을 잃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양이 길을 잃었다는 뜻과 같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곧 아무 희망이 없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은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티끌만큼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죄인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가하면 신약성경의 원문 그리스어에서는 “죄, 또는 죄인”이라는 명사를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ός)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벗어난 자” 라는 동사에 기반을 둔 용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죄인으로 출생한 인간은 이미 표적을 벗어난 화살처럼 화살 스스로가 정해진 표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절망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정도(正道)의 구원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법한 기본의 도리를 벗어난 어둠과 사망이라는 절망의 상태를 숙명으로 떠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인간이든 그 어떤 종족이든 이 세상에 태어나서 태생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어둠의 사망을 불러오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는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죄 악에 종속된 죄의 종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나타날 영원한 어둠의 사망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갑니다.
진정코 누가 뭐라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영적 신분은 영원한 사망 아래에서 죄인의 신분입니다. 마치 모든 흑인의 후손들이 신체적 흑인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죄인의 시조인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영적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결국은 영원한 형벌이 있는 사망입니다.
죄인의 영적 신분과 의인의 영적 신분
우리 예수님은 죄인의 신분으로 영원한 사망과 절망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인의 신분으로 만드셔서 영생으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신 의인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의인으로 오셔서 의롭게 죽으신 그 예수를 영접한 믿음으로 믿으면 그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면서 그 예수님의 의가 죄인된 자의 신분을 의인된 자의 신분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 참조
로마서 5:18 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인간의 시조이며 대표자인 아담 한 사람의 선악과 범죄로 인하여 그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적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대표자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죄인된 인간 대표자가 그 후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죄 값으로 영원한 사망에 처할 인간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억울한 피해자입니다. 어쨌든 이런 절망의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는 자기 자신의 영적 죄인된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절망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신 예수님(구원자)은 죄인을 구하시려고 의인으로 오셔서 의롭게 죽으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하나님은 로마서 5:18절의 뒷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한 사람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는 죄인의 신분을 받은 것 같이 예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인의 신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영원한 사망에 처할 죄인의 영적 신분을 가진 우리 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말미암은 의의 선물을 받아서 그 의로 의인의 영적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로마서 5:19절에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관련된 말씀으로 로마서 3:30절에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요즘의 기독교에 적용하면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또는 교회에서 목사가 되었든 아니면 장로나, 권사나, 집사가 되었든, 교회의 신도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의인으로 오셔서 의롭게 죽으신 그 예수를 영접한 믿음으로 믿어서 된다는 말씀입니다.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인의 영적 신분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은 그 어떤 선이나 의를 행하여서가 아니라 의인으로 오셔서 의롭게 죽으신 그 예수를 영접한 믿음으로 믿어서 된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맥락의 말씀이 로마서 3:28절에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조: 예수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
진정한 예수 영접 믿음은 마태복음 7:20절에 있는 말씀처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합니다.
관련된 말씀을 거듭 확인하겠습니다.
로마서 6:12~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6:17~18절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1:1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론, 제 6강 /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오늘 제가 구원론 제 6강에서 전하는 “거듭남”에 관하여 우리말 국어 사전에서는 “원죄로 죽었던 영혼이 예수를 믿어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새 사람이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약성경의 원문 그리스어에서 말하는 “거듭남”이라는 명사는 아노덴 (ἄνωθεν)입니다. “처음부터”“다시”“새롭게”라는 뜻입니다. 같은 뜻으로 영어성경에서는 본 어게인 (born again)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출생, 태생, 태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짜깁기나, 땀방식과 같은 부분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음의 뿌리인 온 영혼 전체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l
마음의 뿌리인 신령 영(靈) 자에 해당하는 영혼의 거듭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에 대하여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권리(특권) 그리스어로 에쿠시아(εξουσια)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는 말씀입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이 육신이 본체가 육신의 방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본체가 되어 그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출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영혼(마음의 뿌리)에 맞이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성경의 진리는 예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영혼의 개념이 아닌 머리 개념의 막연한 피상(皮相)에 해당하는 지식이나 생각, 상상, 추상, 또는 자기 관념에 해당하는 신념 믿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껍질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 무영접 믿음에 대하여 우리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부분을 이해하시고 진리가 말하는 거듭남에 관한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참조: 거듭남에 관련된 말씀으로 요한복음 3장 4절에서 7절에 있는 말씀을 확인하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은 태생적 육신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직 영과 영혼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죄인된 우리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과 연결된 인간의 마음이 병들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땜방식으로는 그 영혼과 마음이 구원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인간의 육신은 육신을 낳습니다. 이런 것처럼 아담 이 후 타락한 죄인은 죄인을 낳습니다. 이런 것처럼 애초부터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받은 사람은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연의 법칙 중에 씨종자 종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런 법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래의 벼 씨종자는 절대로 중간에 다른 씨종자로 바뀌지 않습니다. 끝까지 벼 씨종자입니다. 보리 씨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단코 중간에 다른 씨종자로 바꾸지 않습니다. 끝까지 보리 씨종자입니다. 포도 씨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포도 씨종자는 끝까지 포도 씨종자이면서 포도나무를 이루고 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번 소와 돼지 씨종자 종으로 태어난 소와 돼지는 절대로 중간에 다른 씨종자 짐승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 외의 그 어떤 짐승이라도 원래의 씨종자 종은 원래의 씨종자 종 짐승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번 원숭이 씨종자 종으로 출생한 원숭이는 죽을 때까지 원숭이로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것처럼 이런 애초에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인의 씨종자 종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은 끝까지 죄인의 종자 종으로 살아갑니다. 중간에 절대로 의인의 종자 종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태생적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의 마지막은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이시며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의의 씨종자 종을 받아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의 뜻으로 거듭남에 관한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거듭난 자들과 관련된 성경 말씀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0절에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8절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5절에는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1:30절에는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1~10절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와 깨달음으로 거듭남의 의미를 깊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구원론, 제 7강 / 기독교 구원의 8단계 은혜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은혜(恩惠)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의 원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은혜, 라는 명사는 χάρις(카리스)입니다. 호의, 배려 선물, 등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χάρις(카리스) 호의, 선물, 배려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카리스의 어원에서 파생된 말 중에는 χαρισμα(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이 카리스마는 은사에 해당하는 명사입니다. 신유, 예언, 능력, 방언, 통역, 영분별 등과 같은 재능이나 기능적 은사를 χαρισμα(카리스마)라고 말합니다.
영어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카리스마(Charisma)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 능력, 영향력”도 고대 그리스어의 은사에 해당하는 χαρισμα(카리스마)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하나님은 “너희는 그 χάρις(카리스)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χάρις (카리스)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5: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은혜
에베소서 1:3~4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11절에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9:11절에도 “그 자식들이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 은혜
로마서 9:24절에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30 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5절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를 영접한 믿음의 은혜
사도행전 4:4절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자녀된 은혜
로마서 8: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6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5) 하나님의 견인 은혜
요한복음 6: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8~10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6) 죄인이 의인된 영적 은혜
로마서 3: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5: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9절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7) 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
로마서 5: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6:18절에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6:19절에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8) 의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의 은혜
요한복음 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론, 제 8강 / 구원의 2분법 진리
이 세상에는 둘로 나누어지는 이분법 진리의 진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높은 하늘이 있고 낮은 땅이 있습니다. 밝은 햇빛이 있고 어둠의 밤이 있습니다. 양지가 있고 음지가 있습니다. 육지에 해당하는 땅이 있고 물로 가득한 바다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인간) 중에도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삶의 윤리에는 선이 있고 악이 있습니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기독교의 구원은 철저한 하나님의 예정과 택하심, 그리고 절대적 주권 안에서 이분법적 논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성경 말씀을 확인하면서 오늘의 강의를 이어가겠습니다.
로마서 9:11~16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절에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타 성경 말씀
마태복음 11:47~48절에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30절에는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49절에는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22:11~13절의 말씀에는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25:6~10절의 말씀에도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는 이분법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25:31~33절에도 관련된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는 이분법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32~35절에도 “롯의 처를 기억하라 /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이해로 구원의 이분법 진리를 깨달아 알기를 바랍니다.
구원론, 제 9강 / 구원(성령)의 9가지 열매
곡식이든 과일이든 모든 열매는 그 열매로서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로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로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 외부로 나타난 행위의 열매로 자기의 존재감을 나태날 뿐 아니라 예수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2~33절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예수님은 마태복음 7:16~21절의 말씀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슴을 하셨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2~24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열매는 예수 성령이 주인이고 예수 본체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는 죽고 예수 성령으로 다시 사는 영적인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가능합니다. 이런 이해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성령의 열매에 관한 말씀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 사랑
우리말 국어 사전에서 ἀγάπη (아가페) 사랑에 대하여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명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은 죄인된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 외에도 그리스어서 말하는 사랑에는 φιλία (필리아) 사랑이 있습니다. 우정, 친구간의 사랑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어의 사랑에는 스토르게 (στοργε) 사랑이 있습니다. 부자지간 또는 친족간의 사랑을 사랑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끝으로 그리스어 사랑에는 ἐρως(에로스) 사랑이 있습니다. 남녀 간의 이성적 사랑을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신약성경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랑”이라는 명사의 대부분은 ἀγάπη (아가페) 사랑에 해당하는 명사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신약성경에 약 116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가페 사랑으로 죄인이지만 구원을 받을 사람들에게 아게페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아가페 사랑을 실행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 희락(喜樂)
한자어로는 기쁠 희(喜) 자에 즐거울 락(樂)자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희락”이라는 명사를 카라(χαρ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행복하다, 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여러 조건이나 만족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영적인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희락, 카라(χαρά)의 어원 뿌리는 카리스(χάρις)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희락의 열매를 통해서 예수를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6절에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11절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3) 화평(和平)
화평의 한자어는 화답할, 화(和) 자에 평할 평(平) 자입니다. 화평의 그리스어 명사는 에이레네(ειρηνη)입니다. 평안, 평화, 평강,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평안의 인사 용어로 많이 사용하는 샬롬(שָׁלוֹם)은 구약성경의 원문인 이스라엘어입니다. 이런 이해로 “화평”의 뜻을 깊이 받으시고 화평을 완성하는 성령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시기 바라니다.
로마서 14:19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1절에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3:18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 오래 참음(인내,忍耐)
한자어로는 참을 인(忍0 자에 견딜 내(耐)자입니다. 같은 “인내”라는 명사를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ὑπομονή (휘포모네)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일이나 상황을 만나든 조바심으로 서두루지말고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는 말씀과 연관성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내의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8:15절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5) 자비(慈悲)
한자어로는 사랑 자(慈) 슬플 비(悲)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크레스토테스’(χρηστοτης) 라는 명사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아리는 슬픔과 사랑으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6: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36~37절에서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6) 양선(讓先)
한자어로는 양보할 양(讓) 자에 먼저 선(先)자입니다. 양선의 그리스어 명사는 아가도스(ἀγαθός)입니다. 너그러움, 배려, 양보, 등과 같을 뜻을 가진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양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ἀγαθός)라는 단어가 모든 성경 중에서 이곳에 단 한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양선하는 삶으로 본인 스스로가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시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7) 충성(忠誠)
충성의 한자어는 충성 충(忠) 자에 정성 성(誠)자입니다. 같은 충성의 명사로 그리스어 원문 성경에서는 πίστις(피스티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믿음, 진실, 정성, 등과 같은 뜻일 가진 단어입니다.
고린도전서 4:2절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절에는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령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비롯한 진리의 진실 앞에 충성하는 삶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8) 온유(溫柔)
온유의 한자어 뜻은 따뜻할 온(溫) 자에 부드러울 유(柔)자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프라오스(πράος)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예절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12:3절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절에는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13절에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9) 절제(節制)
절제의 한자어 뜻은 마디 절(節)자에 절제할 제(制)자입니다. 매 일마다, 때마다 절제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말 국어 사전에는 “절제”를 “올바른 정도를 넘지 않도록 잘 조절하고 관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뜻의 의미로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절제를 엥크라테이아(ἐγκράτεια)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본능적 욕구와 욕망을 거절하는 절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2절에는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7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성령의 사람들은 필연코 절제하는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예수 영접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인 것을 자연스럽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구원론, 제 10강 / 구원의 진리가 주는 영적 자유란 이런 것
구원의 진리가 주는 자유란 이런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우리말 어학 사전에서 자유(自由)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약성경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자유”를 ἐλευθερία(엘류데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노예로 매여 있던 상태에서 자유롭게 놓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영어 성경에서는 “자유”를 freedom(프리덤)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구속 받지 않은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많은 국가나 개인은 자유를 선호하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특히 미국을 건국하는 일에 온 열정으로 헌신했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영국의 억압적 식민지배 정책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뜻으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하는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선택의 자유, 등과 같은 모든 자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본능입니다. 이 뿐 아니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보다 더 낳은 삶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학문과 경험적 지식을 습득합니다. 또는 돈에 해당하는 물질적 넉넉함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구가 충족이 될 때 자기가 삶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심령과 영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온갖 불법하고 타락한 쾌락과 방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한 여성 영화배우로 잘 알려진 메간폭스(Megan Fox)는 자기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육신적 쾌락을 위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참 영혼의 자유가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온갖 죄책감을 비롯한 매임과, 눌림과, 아픔과, 갈등과, 상처의 사슬과 올가미에 걸려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일반적 개념의 세속적 자유는 항상 변화무쌍한 불안전한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자유가 내일의 쇠사슬에 매이는 멍에로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이 세속적 논리로 추구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허울뿐인 거짓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에 속아선 안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말씀하는 진리(眞理)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진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입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진리의 뜻은 “참되고 진실한 것, 또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진리라는 명사를 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미의 진리는 자연만상에도 있고, 과학, 수학, 철학, 인문학, 윤리학, 등에도 있습니다. 예컨대 지나간 한 때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연계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 흔한 수학적 진리에는 “하나에서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인문학에는 “육신을 입고 한번 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한번 죽는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런 진리는 수천 년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 진리를 통해서 한번 받은 영생하는 구원은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수 진리는 이 세상에서 흔하게 통용되는 일반적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속한 진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영적 진리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하나님은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씀은 세상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숨겨지고 감추어진 비밀을 깨닫아 아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이 절대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절대 불변하는 예수 진리의 진실을 진정으로 깨달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그 영혼의 자유함은 한결같습니다. 원죄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참 진리이신 예수주의 신앙으로 살고 예수 성령으로 사는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영적 자유인의 만족을 넉넉히 누립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예수 진리를 거절하는 불신앙들은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구원의 진리가 주는 자유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속한 사람이든 교회 밖에 속한 사람이든 예수 무영접 불신앙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의 진리 뿐 아니라 그 진리가 주는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예수 구주를 영접한 믿음으로 믿어서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은 필연코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주는 자유를 풍성하게 누립니다.
성경 구절 참조
요한복음 8:36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16절에서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3:17절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론 및 총론
바람은 바람이기 때문에 나뭇가지에 걸리지 아니하고 물은 물이기 때문에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 성령은 하나님 영이기 때문에 그 어떤 물리적 상황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예수 영접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의 심령은 예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이기에 결국은 예수 성령의 영과 한 영체(靈體)로 거듭난 영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영원한 사망을 불러오는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는 자유함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과 영혼(심령)이 분리된 영적 상태에서 그 어떤 삶의 장애물에 걸려 실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매 때마다 순간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사신 것을 아느니라"(엡 3:17)는 말씀을 이룹니다.
결국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척박한 가난의 밑바닥에 내몰리고 때로는 고통스런 육신의 중병에 시달려도 그 모든 불행을 초월하는 영혼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어떤 극한의 시련으로 애통하는 슬픔이 쌓이고 낙심으로 절망하는 난제들이 파도처럼 덥쳐와도 한 마디의 불평이나 원망이 없이 주님의 선한 뜻으로 고스란히 수용합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해도 저 천성(天成)을 향한 영혼의 자유는 잔잔한 평안의 소망을 완성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한 영체로 살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필연코 영적인 심령의 자유를 찌르고 그 자유를 빼앗아가는 흉기와 같은 한 점의 죄악을 칼끝처럼 거절하고 이렇게 거절한 직심(直心)을 끝까지 지킵니다.
이 뿐 아니라 한 번 회개한 죄악은 결단코 고의로 재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번 반복되는 회개의 실패는 보다 더 강력한 일곱 귀신을 불러오는 것이고 그만큼 더 악화된 영적 장애와 어둠의 감옥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한 예수 영접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기라는 자아(自我)의 주체(主體)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자기 안에 계시고 사시는 예수 성령이 주체가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과 사정이 어떻하든 끝까지 불법하고 타락한 세상의 육신적 탐욕과 계산법을 초월합니다. 그러면서 온갖 사탄에게 연루된 거짓되고 위선된 허세의 형식을 믿음의 법으로 타파합니다.
그 뿐 아니라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하는 신령한 영적 자유인(自由人)으로 삽니다.
이런 이해의 말씀으로 기독교의 구원과 그 구원의 진리가 주는 자유의 의미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