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정진영 주연
걸쭉한 사투리의 사극 코미디… 맛깔스런 연기 제몫
오랜만에 눈물이 쏙 빠지도록 실컷 웃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17일 개봉)은 중반까지 확실히 웃기지만 후반에는 관객 마음속에 기어이 멍 하나를 남긴다. 그간 충무로의 많은 코미디 히트작들은 ‘유머 70%, 감동 30%’의 공식을 엄수해 큰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배합 비율은 비슷하더라도 ‘황산벌’의 경우는 달라 보인다. 이 영화 후반부는 관객이 뭘 좋아할까를 염두에 둔 영리한 계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눈치보지 않고 우렁우렁 터뜨리고야 말겠다는 진심의 산물이다.
드러나는 외양보다 훨씬 지적인 이 코미디는 백제가 신라에 맞서 황산벌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서기 660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영화에는 소위 ‘표준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 병사들의 경상도 사투리와 백제 병사들의 전라도 말이 걸쭉하게 전편을 지배하는 가운데, 간간이 평안도 사투리와 중국어 대사까지 끼어든다.
서로 다른 사투리들의 충돌은 객석에서 마르지 않는 웃음의 샘물을 시종 길어올린다. 참모들과 작전을 짜며 “우리의 전략적인 거시기(핵심)는 머시기할(죽을) 때까지 갑옷을 거시기한다(몸에 묶어둔다)는 것”이라 지시하는 계백의 말을 엿듣고도 신라 진영에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은 ‘황산벌’이 얼마나 재미있는 기획인지를 증명한다. 전면전 직전 서로 약을 올리는 장면에서, 기상천외하게 몸으로 상대를 욕보이는 경상도 병사들과, 전문 욕쟁이들이 포복절도할 리듬으로 욕의 성찬(盛饌)을 펼쳐내는 전라도 병사들의 대결은 올해 극장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유머의 최대치이다.
그러나 ‘황산벌’의 야심은 유머에서 그치지 않는다. 말투에서 음식까지 신라와 백제를 대비시켜 가며 웃음을 자아내는 이 영화는 서로에 대한 양국 증오의 바닥까지 그대로 터뜨리며 소위 ‘지역감정’에 대해 도발적 문제제기를 한다. 1340여년 후의 현재를 강력하게 은유하며 환기시키는 전략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각국의 처지에도 그대로 관철되어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고, 신라가 당과 힘을 합쳐 양국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감독은 ‘역사는 돌고 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계백의 장렬한 허무주의와 김유신의 냉철한 현실인식을 배경으로 깔고서도 결국 강렬한 휴머니즘을 말한다. 가장 저릿한 순간은 계백의 처가 남편 손에 죽기 전 쏘아붙이는 장면에 담겨 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계백의 비장한 말에 아내는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정의롭고 아름답게 덧칠된 그 어떤 명분(이름)으로도 개인의 소중한 삶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는 ‘이유’가 사라진 자리에서 ‘실존’만 남아 피아의 구분도 없이 진흙밭에서 처절하게 치러지는 클라이맥스 전투장면의 시각적 혼돈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병사 ‘거시기’(이문식)의 생존에서 마지막 희망을 보아낸다.
‘황산벌’은 박중훈(계백)과 정진영(김유신)을 극의 두 무게중심으로 세운 뒤 ‘웃음’은 이문식을 비롯한 병사들에게 전담시키는 의외의 용인술을 썼다. 하지만 코미디 천재 박중훈을 기용하고도 장기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 이 영화의 기이한 전략은 결국 성공했다. 때로 배우는 이제까지의 경력과 존재감 자체로 연기한다. 천변만화하는 그의 표정연기를 볼 수 없다고 아쉬워하지 말 것. 대신 작품 속에 온전히 녹아든 그의 다른 매력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김유신 역 정진영은 이죽거리는 말투 속에 지식인의 복잡한 심경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며 멋지게 연기했다. 그의 대사들이 지닌 깊이와 성찰은 이 영화가 지닌 문제의식 자체를 대변한다. 오지명과 이문식에서 카메오로 등장한 신현준 김승우까지, 함께한 배우 하나하나가 맛깔스런 연기로 제 몫을 했다.
계백이 최후를 맞을 때 지켜보던 김유신은 “와 이리 덥노”라고 딱 한마디만 한다. 목에 칼을 받는 계백은 “겁나게 덥구마잉”이라고 짧게 응수한다. 그 찌는 듯한 더위로서의 부조리를 배경으로 ‘황산벌’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그 어떤 성전(聖戰)도 결국엔 미친 전쟁이다.